다른 이의 기쁨에 함께 기뻐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오늘 아침, 아는 언니가 아기를 낳았다. 작년 11월쯤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선뜻 내키지 않아 축하 인사를 전하기까지 한참 걸렸던 바로 그 언니였다.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를 내뱉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적이 없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다니. 스스로 적잖이 실망했다. 이유가 뭘까. 고민을 거듭하며 몇 달을 보냈다.
돌아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십 대 중반부터 서른 살이 되기 직전까지 약 5년 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새벽 6시면 일어나 도시락을 싸 들고 산 중턱이나 다름없는 오르막길을 20분 올라 도서관에 갔다.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열람실에 앉아 공부했다. 잠자는 시간 빼고 모든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내다 보니 나와 같이 붙박이처럼 열람실 어딘가에 있는 이들의 얼굴은 가족보다 익숙했다. 매일같이 같은 곳에 있다 보면 각각 선호하는 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 앉기 위해서라도 도서관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간다. 자연스레 창가 쪽 자리와 벽을 보는 자리는 지정석이나 다름없었는데 내 자리는 대부분 창가 쪽이었다. 어느 날부터 거의 매일 내 앞이나 옆에 앉는 언니와 말을 트게 되었다. 그러다 벽 쪽 구석에 늘 앉는 언니와 열람실 한중간 통로 쪽에 앉는 언니도 함께 밥을 먹으면서 친해졌다. 여느 사람들보다 꼼꼼히 핸드크림을 바르며 손 관리하는 남자, 조용한 열람실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책장을 시끄럽게 넘기는 아주머니, 왠지 집에선 매일 출근하는 줄 알 것 같은, 양복 차림의 아저씨 등,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작된 관계였다. 가벼웠던 대화는 점점 깊어졌고, 나중에는 서로의 집안 사정까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십 대, 언니 두 명은 삼십 대, 맨 처음 알게 된 언니는 사십 대였다. 영어학원 강사를 그만두고 서른아홉 살에 공무원 준비를 시작해 마흔한 살이 된 언니는 이듬해 행정직에 응시해 합격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장녀로서 오랫동안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두 동생이 결혼하고 시골에 계신 어머니의 생활도 그럭저럭 나아지자 시작한 공부였다. 막 삼십 대가 된 언니는 무역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며 돈을 벌지 않아도 2년을 버틸 수 있을 만큼 주머니를 채워놓고 공부를 시작해 정확히 2년을 채워 세관직 공무원이 되었다.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 국가직을 응시해 다른 지역으로 떠나고 싶다던 그녀는 여전히 부산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삼십 대 언니 중 다른 언니는 시험을 한 번 보더니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다며 일찌감치 내려놓았다. 일반 회사에 취직해 결혼했다는 소식은 나중에 들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공부를 시작했다가 간당간당한 점수 차이로 시험에 불합격했다. 1년 안에 공무원이 되겠다던 청사진은 허무하게 바랬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교잿값과 용돈을 벌기 위해 2년 넘게 회사에 다니기도 했다. 이제 와 말해봐야 핑계이고 합리화지만, 마지막 해에도 1년 동안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며 준비했으니 오롯이 공부에 전념한 시간은 2년이 채 못 된다.
속은 쓰라렸지만, 언니들이 합격할 때마다 기뻐하며 축하했다. 속이 쓰린 것도, 기뻐한 것도 모두 진심이었다. 머지않은 내 미래일 거라 믿고 그들의 응원을 온전히 받으며 힘을 내보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힘에 부쳤다. 이렇게 이십 대를 다 보내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더 늦기 전에 다른 길을 알아봐야 하는 게 아닐까. 매일 고민했다. 무엇보다 하루라도 빨리 경제적 독립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할머니를 아버지가 모시겠다고 한 것이다.
집마다 밑 빠진 독이 있다면 이 집엔 나의 아버지가 그런 존재였다. 부모와 형제자매가 모두 외면하고 덩달아 그들의 자식들마저 언니와 나를 대놓고 무시했다. 물론 엄마는 누구보다 고된 시집살이를 겪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이가 좋지 않은 와중에 명절과 제사, 농사일에 혼자 불려 가 며칠씩, 길게는 한 달이 넘도록 일했지만, 누구 하나 쌀 한 톨 주지 않았다. 제구실하지 않는 아버지로 인해 우리 집은 가난했고 정말 쌀이 없어서 밥을 굶었는데도 말이다. 다른 자식들에게 우리 집을 가리켜 절대로 도와주지 말고 아는 척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할머니를 우리 집에 모신다니 속이 뒤집히는 일이었다.
잠깐이나마 힘든 시간을 함께 겪었기에 또래의 친한 친구들보다 공시생 언니들이 편했다. 속 얘기를 털어놔도 내가 그리 못나 보이지 않았고 무슨 말을 하든 이해받는 느낌이었다. 공무원이 된 후에 도서관으로 찾아와 공부할 때가 좋았다며 배부른 소리를 해도 역시나 속은 쓰렸지만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5년 만에 공부를 접고 제주로 와서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되었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보았기에 아무 미련이 없다. 그래서 여전히 그녀들과 연락하며 공무원의 고충에 대해 들어줄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머릿속을 다시 정리해봐야겠다.
다른 사람의 출산 소식에 나는 왜 공시생 시절을 떠올렸나.
작년 5월쯤이었다. 결혼하고 1년 3개월, 우리 부부는 그때까지 2세 계획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막연히 결혼 후 첫해는 신혼을 즐기고 이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생기겠거니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남들 다 한다는 산전 검사를 한번 하긴 해야 하는데' 생각만 하던 어느 날 함께 오름을 오르며 남편의 회사 동생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보다 3개월쯤 먼저 결혼했고 결혼 전부터 딩크족을 결심했는데 별안간 아내의 마음이 바뀌어서 한 번만 시도해보기로 했다고. 그리고 배란일을 계산해 시도한 달에 거짓말처럼 바로 임신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도 한번 해볼까?"
그렇게 임신을 준비하게 되었다. 한창 더워지는 계절에 간절한 맥주를 마다하고 커피도 조심하고 엽산을 챙겨 먹으며 나름의 시도를 했지만, 우리에겐 아무 소식이 없었다. 산전 검사를 비롯해 임신에 필요한 여러 검사를 받았다. 결론은 매우 건강한 자궁과 활동성이 높은 정자. 평소 편두통과 위장염을 달고 살아서 건강에 자신이 없었는데, 자궁이 매우 건강하다니 그것만으로 기뻤다.
의사 선생님은 소위 말하는 '숙제'를 내주었다. 난포가 커지고 배란이 될 때까지 여러 날 병원에 들러 질 내 초음파를 하는 것이 불편했지만, 원하는 결과를 위해 의사의 지시를 따랐다. '숙제' 날 관계 후에도 병원에 가서 정자들이 내 몸에 잘 들어왔는지 확인하고 '기대할 만하다'는 말에 한껏 오른 기대감을 안고 지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대한 만큼 실망스럽고 우울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인공수정과 시험관을 준비하느라 배에 직접 놓는 주사기를 아이스박스에 채워가는 부인들의 모습은 안쓰러워서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전혀 모르던 세계였다. 그들 모두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숙제를 받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다시 숙제를 받고 기대하고 실망한 뒤, 의사는 나팔관 조영술을 받아보라고 했다. 자궁경관을 통해 조영제를 주입하고, 조영제가 자궁 내강을 지나 양쪽 나팔관으로 잘 빠져나가는지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 확인한다고 했다. 만약 나팔관이 막혀 있다면 난임의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막힌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나팔관 조영술을 통해 뚫릴 수 있는데 그 경우 좀 아플 수 있다고 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실제로 나팔관 조영술을 받고 난 후 막혔던 곳이 뚫려 두세 달 이내에 임신이 되었다는 사람들의 후기가 많이 보였다.
겪어보지 않은 고통이었다. 의사는 질 내에 기구를 넣고 직접 조영제를 넣기 때문에 아랫배가 싸하고 불편할 수 있다고 했지만, 단지 불편한 정도가 아니었다. 자동차 바퀴에 깔려본 적은 없으나 마치 큰 자동차의 바퀴가 아랫배 위로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등이 서늘하도록 차가운 바닥, 가운에 의지한 채로 헐벗은 몸, 일반적인 생리통과 비슷한 듯하면서 수천 배쯤 극심한 통증. 별 느낌 없이 괜찮았다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나에게는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다. 잠깐의 과정으로 지나왔기에 망정이지 몇 번이나 거듭 겪어야 할 고통이었다면 난 그날로 포기했을 것이다.
두 달이 지나고 또 두 달이 지났다. 여전히 임신은 되지 않았다. 정상적인 부부관계에도 불구하고 1년 이내에 임신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 의사는 난임에 해당한다며 인공수정을 시도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시험관을 하자고 했다. 30대 중반의 나이여서 마냥 기다릴 수 없는 시기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검사상 아무 문제가 없는 우리가 그렇게까지 당장 임신해야만 하는 건지,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병원에 갈 때마다 힘겨워 보이는 이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는데 남편 말에 의하면 당시 내 얼굴도 그들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 후로 병원에 가지 않았다.
매달 다른 배란일을 예측하기 위해 거의 매일 배란 테스트기를 사용하고 배란일이 임박할 땐 있던 약속도 취소한다. 임신테스트기를 사용할 수 있는 날이 될 때까지 약 2주간 온갖 증상 놀이를 하고 임신테스트기를 병적으로 사용한다. 생리가 시작되면 한없이 우울해져 맥주를 한잔 마신다. 생리통을 신나게 겪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배란 테스트기를 사용한다. 이제는 임신 초기 증상과 생리통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과 오히려 임신일 땐 아무 증상이 없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기대하지 않아도 실망감은 커서 신경 쓰지 않으려 외면해 보지만, 한 달에 단 한 번, 일 년에 열두 번. 한정된 기회의 숫자에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아가야 한다.
뉴스에서는 출산율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임신이 유행인 것처럼 여기도 임신 저기도 임신이던, 바로 그때였다. 임신을 위해 갖은 노력을 시도하고 기대와 실망의 굴레에 갇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남들도 이럴까?' 하던 작년 11월쯤 들려온 그녀의 임신 소식. 우리 부부보다 1년 늦게 결혼했다는 사실과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라는 사실에 머리가 멍해졌던 것 같다. 저 친구는 결혼한 지 4년 됐지, 저 사람은 이십 대잖아, 유난히 잘 생기는 사람이 있다는데 벌써 넷째네, 저 사람은 임신 못하는 몸인 줄 알았는데 잘됐네. 열심히 합리화를 하며 이유를 찾던 나에게 더 이상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
무너진 마음 조각은 나를 찔렀다.
남을 시기 질투하는 나쁜 사람이라는 자책감과 심보가 고약하니 자업자득이라는 자기 파괴적 생각으로.
같이 밥을 먹고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며 힘든 시간을 곁에서 보낸 이들이 공무원이 되었을 때, 나의 축하는 진짜였을까. 그들을 잘 아니까, 나에게 좋은 사람들이니까, 조만간 나도 그들처럼 공무원이 될 거니까, 쓰라린 마음을 뒤로한 채 축하할 수 있었다면, 그 언니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나는 이만큼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그녀에게는 쉬워 보여서, 나에게는 '임신'이라는 일이 먼 나라, 아니 딴 나라 이야기 같아서, 차마 축하할 수 없었던 걸까.
다행스럽게도 시간은 약이었다. 3개월쯤 흘러 축하를 전했고 오늘 출산 소식을 듣자마자 또 한 번 축하를 전했다. 여전히 마음 한편은 쓰리고 공허하지만, 또 다른 마음으로 축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치 공무원이 된 언니들이 저마다의 고충을 털어놓으며 공부할 때가 좋았다는 배부른 소리를 할 때 고개를 끄덕여줄 수 있었던 것처럼.
아직 인공수정과 시험관을 시도할 용기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간절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더 오랜 시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며 임신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고통에 비할 바 아니지만 한 번은 털어놓고 싶었다. 너저분하게 뻗어가는 가지를 뻗어가게 내버려 두었다가 싹둑 잘라 깨끗하게 청소하듯,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쁜 일에, 특히 내 의지로 되지 않는 임신과 같은 일에 당장 축하의 말이 튀어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영원히 지속될 현상은 아니므로, 어딘가 나와 같은 마음으로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꼭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