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 편두통
"두통이 시작된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지금 두통이요, 아예 처음 두통이요?"
"맨 처음 두통이 시작된 시기를 대략적으로 알려주시면 돼요."
"......"
"정확하지 않아도 돼요. 보통 10년 전후로 말씀하시더라고요."
"음.... 25년 정도 된 것 같아요."
25년 넘게 시달린 두통. 한번 아프기 시작하면 사나흘, 길면 일주일도 넘게 이어지던 통증이 사흘, 이틀, 하루로 점점 주기가 짧아지다가 최근 다시 길어졌다. 새삼스럽게 병원을 찾은 이유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아팠는데 처음으로 신경과에서 제대로 된 진료와 검사를 받았다. 왜 이제야 왔냐는 질문에 적당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는데.. 엄마도 늘 아팠고 저도 늘 아파서, 참는데 이골이 났어요. 하루하루 견디다 보니 이렇게 되었어요."
사실 한 번만 더 자세히 물어봤으면, 이를테면 "그렇게 늘 아팠는데 왜 참기만 했어요?"와 같은 질문을 한번 더 했다면, 자신을 민간의사라 칭하며 괴로운 사람을 앉혀놓고서 괜찮다고 말할 때까지, 치료를 명목으로 더 괴롭게 하는 작자 때문에 병원은 꿈도 못 꾸고 아프다는 내색조차 하지 못한 채 괜찮은 척해야 했던 지난 세월을 이야기할 뻔했다.
병원을 못 믿고ㅡ아니 병원을 못 믿는다기보다 자기애가 넘치고 자신을 너무 믿는다고 봐야겠다ㅡ 어떤 병이든 자신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 때문에 나는 어릴 때부터 집에서 아프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가장 생생하게 느껴지는 고통으로 남는 기억이 있다. 6살 때 날 수 있다고 생각한 나는 책상에서 뛰어내려 팔이 부러졌다. 실수로 넘어지거나 그냥 떨어진 게 아니다. 한껏 솟구쳐 오를 수 있을 만큼 올라갔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팔이 부러졌다고 판단해서 얼른 병원에 데려가려 했지만, 아빠는 기도하며 주무르면 나을 거라고 내 팔을 사정없이 끼워 맞추며 주물렀다. 눈에 띄게 팔이 부어오르고 어린 딸이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기절 상태에 이르러 다 죽어갈 때쯤 엄마의 호통ㅡ그 정도 상황이 아니고서는 통하지 않는ㅡ에 어쩔 수 없이 병원으로 향했다고 들었다. 병원에서는 곧바로 오지 않고 왜 애를 이 지경을 만들어놨냐고 혀를 내둘렀다고 했다. 무려 30년 전의 일인데도 그날의 고통은 생생하다. 고문을 당하면 이런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두통의 역사는 더 길고 복잡해서 한 장면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10살쯤부터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는데 일상생활을 하려면 할 수 있었지만, 신나게 놀다가도 가끔은 참기 힘들어 어디든 몸져누워야 했다. 누울 수 없으면 손으로나마 머리를 짚고 있어야 안정이 되었는데 그렇게 된 지 한참만에 나를 발견한 아빠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자 나쁜 생각을 많이 해서 그렇다고 했다. 나쁜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하면 치료해주겠다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목과 어깨, 등, 허리까지 만지고 주무르는 동안은 정신이 팔려서 아픈 걸 잊기도 하고 일시적으로 괜찮은 느낌이 들 때마저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일시적이었다. 머리가 너무 아프면 속이 같이 안 좋은데 허구한 날 체했다며 배를 주무르고 손가락을 수백 번 땄다. 수시로 물어오는 괜찮냐는 질문에 그대로라고 하면 당신을 믿지 않아서 그렇다고, '계속 아프다고 생각'해서 아픈 거라고 했다. 애초에 아픈 것부터 아프기 시작하면 나아지지 않는 것까지 모두 내 탓이었다. 언제나 '믿음이 없어서 아픈 것'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니 약도 먹을 수 없고 병원도 갈 수 없었다. 조금 지나서는 몰래 해야 했다. 몰래 병원에 다녀오고 몰래 약을 먹은 후 믿음으로 나아진 것처럼, 아니 아픈 적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연기하며 살았다.
병원은 나중에 고등학생 이후에야 갔고 그 전엔 동네 약국에서 약을 사 먹었다. 두통약이라면 종류별로 다 먹어봤는데 어릴 땐 주로 사리돈과 게보린이 효과 있었고 가끔 판피린, 아주 가끔 아스피린을 먹었다. 점점 일반적인 두통약은 듣지 않고 약국에 파는 편두통약을 시도해봐도 효과가 없어 내과에서 처방받은 진통제를 먹었다. 5년 이상 먹었을 때쯤 머리는 금방 괜찮아지지만, 몸의 다른 부분들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약 성분을 검색해보니 마약성 신경안정제 성분이 있었다. 점점 독해지기만 하는 약을, 그것도 '마약성'의 '신경안정제'를 언제까지 먹을 수는 없었다. (특히 임신을 준비하는 여성에게 권장하지 않는 약이었다.) 그날로 약을 안 먹은 지 2년이 되었다. 요즘은 eve라는 일본 두통약을 먹는다. 위장에 무리가 덜하다고 하는데 실제로 다른 약보다 순하고 두통에 효과도 있어서 주로 먹어왔다. 그러나 그것도 어떤 날은 효과가 있고 어떤 날은 없어서 약이 안 듣는 날은 그저 괜찮아질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늘 그랬으니까, 늘 참고 버텨왔으니 더 나아질 거란 기대가 없었다. 왜 아픈지 더 이상 궁금해하지도 않고 그저 지금의 아픔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나에게 진심으로 병원에 가서 제대로 진료를 받아보라고 권한 사람은 남편이었다.
혹시 의사를 만나면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할까 봐 내가 생각하는 두통의 요인과 증상을 메모장에 적어갔다. 하지만 세세한 질문이 나열된 설문지가 있어 내가 미처 적지 않은 부분까지 모두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아무렴 나 같은 사람이 오죽 많겠는가. 잠을 적게 자도 아프고 많이 자도 아프고, 공복시간이 길어도 아프고 과식해도 아프고, 햇빛에도 아프고 구름이 가득해도 아프고, 피곤해도 아프고 기분 좋게 운동을 해도 아픈 나 같은 사람이.
"한 달에 며칠 머리가 아프세요?"
"흠..." (머릿속으로 계산 중)
"그럼 반대로 물어볼게요. 한 달에 며칠 머리가 맑은 것 같아요?"
"한 일주일 정도 맑아요."
사실은 3일이었지만 일주일이라 믿고 싶었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의사의 예상은 정도가 꽤나 심한 만성 편두통. 나 역시 그리 생각하니 이제 어서 약을 줬으면 좋겠는데, 검사 결과를 본 후 약을 처방해준다고 했다. MRI 등 머리 검사를 심각하게 해 보면 좋겠지만, 새롭게 발현된 증상이 아니라 '만성'으로 보여서 당장 급한 것은 아니라며, 우선 약 처방에 필요한 피검사와 심전도 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한 시간 반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신경과가 속한 뇌센터에는 머리가 아파서 제대로 걷지 못하거나 눈을 질끈 감은 채 머리를 부여잡은 이들이 사방에 보였다. 나 역시 벽 모서리를 찾아 오른쪽 머리를 꾹꾹 눌러대며 약간의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아픈 사람들을 보며 아픈 생각만 하니 '민간의사'의 말처럼 더 아파지는 것만 같아서 바깥은 한여름이지만 나가보기로 했다. 다행히 병원 가까이에 책이 있고 조용한 카페가 보였다. 건강한 사람인 척 자연스럽게 결제를 하고 에이드를 한잔 마시며 책을 읽었다. 잠깐씩 머리를 짚긴 했지만 머리가 지끈거리고 두통이 너무 심해서 토할 것 같은 사람인 줄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검사 결과가 나왔다. 약 처방에 문제 될 것이 없다며 만성 편두통에 따른 추가 설문을 하고 약을 처방받았다. 한 달에 15일 이상 두통에 시달릴 때 '만성'이라고 한다. 나는 한 달에 20일 이상 (사실상 거의 매일) 두통에 시달리니까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약은 두 가지, 아프기 전에 먹는 예방약과 아플 때 먹는 진통제이다. 흔히 편두통을 겪는 사람들은 눈앞에 섬광이 보인다거나 앞이 갑자기 깜깜해진다거나 하는 전조증상을 함께 겪는다. 전조증상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편두통이 시작되므로 통증이 본격적으로 느껴지기 전에 먹는 예방약이 있다. 하지만 나는 만성이어서 전조증상이 있든 없든, 편두통을 유발하는 요소를 잠재워주는 예방약을 매일 먹기로 했다.
우선은 당장 머리가 아프니 진통제부터 털어 넣었다. 오전 열 시 무렵부터 시작되었지만 사흘째 개운해지지 않는 두통의 연장선이었다. 온종일 두통에 시달리다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 잠들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을 때의 절망감이란. 그런 나날의 연속이었으니 큰맘 먹고 신경과를 찾은 나는 이내 실망했다. 약을 먹으면 금세(2~30분 이내로)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거의 3시간이 흘러서야 괜찮아졌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비교적 회사에 있는 낮보다 집에 있는 밤에 두통이 해소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꼭 약 때문이라기보다 괜찮아질 때가 되어서 괜찮아진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14일)
14시 40분 병원 진료
15시 피검사, 심전도 검사
16시 30분 검사 결과, 약 처방
17시 두통 시 먹는 약 복용
18시 1시간 만에 약효 느껴짐 : 빙빙 돌고 뜬구름 위에 있는 기분. 팔다리에 힘이 다 빠지고 코에서 약 냄새나는 느낌. 두통은 그대로
19시 잠이 쏟아짐, 두통은 여전함
20시 30분 두통은 좀 가셨으나 개운하지 않고 약에 취한 느낌. 일단 속이 가라앉아서 저녁 간단히 먹고 예방약 복용 후 잠
(15일)
07시 20분 눈뜨자마자 머리가 무겁고 속이 안 좋음
11시 10분 미적지근하게 머리가 아픈 듯 안 아픈 듯하다가 왼쪽 뒤통수가 뻐근하게 당김. 왼쪽 관자놀이 맥박 느껴지고 눈 시리고 핑 도는 느낌 (전조증상)에 진통제 복용
12시 30분 전날보다 더 늦게, 1시간 20분 만에 약효 느껴지고 머리는 계속 묵직함
14시 속이 안 좋아서 점심 안 먹고 오후 내내 조느라 일이 안됨(근무 중)
19시 집에 오자마자 졸려서 30분 정도 잠
20시 30분 저녁 먹고 조금 편해짐. 예방약 복용 후 잠
(16일)
06시 30분 눈뜨자마자 머리가 무겁고 속이 안 좋고 뒷목이 뻐근함
07시 마사지볼로 스트레칭 후 달리기 (달리기 할 때는 기분 좋고 머리 안 아픔)
08시 운동 마치고 집에 온 후로 편두통 시작되었으나 약을 먹어도 두통이 싹 가시지 않고 속만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참아보기로 함. 주말(토요일)이니까 누워서 쉬기로.
17시 하루 종일 누워서 아무것도 못하다가 진짜 죽고 싶은 생각밖에 안들 지경이어서 결국 약 먹음
19시 약효가 따로 느껴지지 않고 어느 순간부터 살 만해짐
20시 토할 것 같아서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 못하다가 저녁 먹음
(17일, 오늘)
16시 오늘은 괜찮음.
도대체 나는 뭘 잘못했기에 평생 머리가 아플까. 아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더 슬프다. 내 잘못일 리가 없다. 두통이 극심할 때면 머릿속을 다 긁어내고 싶다. 깨끗하게 빨아 널어 뽀송하게 말려서, 다시 집어넣고 싶은 심정이다. 그럴 때면 정말로,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죽고 싶은 것과 다르다. 하루를 살아도 맑은 정신으로 제대로 살고 싶을 뿐이다. 삶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다. 한의원에 가면 비장과 위장이 약해서 만성염증과 만성두통이 멈추지 않는다고 하고, 정형외과에 가면 일자목에 등이 굳고 자세가 안 좋아서 두통이 잦을 거라고 했다. 침을 맞고 한약을 먹고 도수치료를 받고 필라테스를 해도 지끈거리는 머리는 어쩔 수 없었다. 신경과에서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어차피 원인은 알 수 없으니 당장 아파서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이에게 약을 주고, 이 약이 안 되면 저 약을 준비해 놓는 모습이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15일까지는 처방약의 효과를 의심하다가 어제 16일엔 처방약이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어쨌거나 속이 안 좋은 걸 보면 독한 약이다. 하지만 그 약이 없었다면 어제도 잠들 때까지 머리를 부여잡고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수없이 자문했을 것이다.
남편이 나에게 병원에 가서 제대로 검사를 받아보라고 말해주었듯이 나도 엄마에게 말해주었다. 나보다 더 오랫동안 게보린과 이브(eve)와 일반내과 진통제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매일 머리가 아픈 엄마에게 이건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병원에서 필요하다고 하는 검사를 받고 처방해주는 약을 먹어보자고 했다. 하루를 살아도 건강하고 맑은 머리로 살자고. 해답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손에 닿는 것부터 잡아보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