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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이쓰 Oct 15. 2022

스물아홉 #1

겨울에서 봄

2015년, 부산


1

어릴 땐 몰랐다. 조금 돌아가고 쉬어가도 괜찮다는 것을 몰라서, 내 마음이 향하는 곳을 모른 척 외면한 채 남들이 가는 대로 따라갔다. 정신을 차려 나를 바라봤을 땐 지극히 보통인 사람이 서 있었다. 어릴 적 꿈꿨던 장래의 내 모습은 이게 아니었는데.


2

난 사랑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지 않을까. 모두의 생김새가 다르듯 사랑의 모습도 다른 것을, 그것에 옳고 그름이 있는 것마냥 나름의 편견과 잣대를 들이대며 판단해오지는 않았을까. 만약 그런 나로 인해 상처받은 이가 있었다면 진심을 다해 사과하고 싶다. 그땐 내가 너무 어렸다고. 아직도 다 자라지 못한 마음일 테지만 그땐 정말 어렸다고.


3

무엇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이게 마지막이라면 좀 더 신중히 진심을 다할 수 있다. 오늘이 내가 살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면 하고 싶은 일, 보고 싶은 사람을 향해 달려갈 텐데, 우리는 현실을 살아야 하고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경우가 훨씬 많기에 그러지 못한다. 그것이 슬프다. 왜 안 되는 거지? 어떻게 하면 하루하루를 마지막처럼, 그래서 후회 없는 나날을 보낼 수 있을까. 이 고민의 끝자락엔 결국 나 자신을 찾는 일이 숙제처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두렵다.


4

머리가 너무 아파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날, 가만히 있으면 아픈 생각만 하게 되어 일부러 시내로 백화점으로 쏘다닌 날이 있다. 자꾸 엄마 생각이 나서 렉스털 목도리와 18k 금귀걸이를 사 드렸더니 엄마는 그렇게 많이 아팠냐고 눈물을 글썽이셨다. 이런 거 안 사줘도 되니 아프지만 마라고, 차라리 당신이 아팠으면 좋겠다며 내 양볼을 감싸 쥐던 엄마의 손길에 내가 건강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큰 불효인지 새삼 깨달았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니의 마음' 노랫말처럼 하늘 아래 어머니의 마음만큼 큰 것이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크고 따뜻해서 차마 헤아릴 수도 없고 내 안에 담기에도 벅찬 그 사랑.


5

이 길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러나 조금만 돌아보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방향만 잃지 않는다면.


6

나는 우리말이 참 좋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국어였고 고3 때도 영어보다 국어를 더 열심히 했다. 단지 좋아서였다.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유가 없듯이 국어가 좋은데도 이유는 없다. 그래서인지 괜히 민감할 때가 많은데 요즘은 '다르다'와 '틀리다'를 분간 못하는 주변인들 때문에 피곤하다. '같다'의 반대말은 '다르다'인데 분명 다른 것을 자꾸 틀리다고 하니 속이 상할 지경이다. 참다 참다 그게 아니고 이럴 땐 '다르다'가 맞는 말이라고 이야기해주면, 뜻만 통하면 되지 뭘 그렇게 따지냐며 돌아오는 건 핀잔뿐이다. 말도 마음도 한번 잘못 쓰기 시작하면 습관이 되어 잘못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법이다. 말은 뜻이라도 통하니 서로 알아서 들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정말로 다른 것을 틀리다고 할 때가 많으니 이것이야말로 답답한 노릇 아닌가. 나와 같지 않을 뿐 잘못되거나 틀린 것이 아닌데,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틀린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의 잣대로 상대방을 판단하기 일쑤니까 말이다. 말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서 나온다고들 한다. 모를 땐 모르더라도 알았다면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생각하며 서로 오해의 깊이가 깊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7

산에 올랐다가 파릇파릇 촉촉하게 피어오른 이끼를 보았다.

어떠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온몸으로 물기를 머금고 광합성을 하며 오랜 세월 번식해 온 굉장한 생명력을 지닌 식물이다. 수억 년 전부터 해조류로 존재했었다고 하고 우주에서도 번식할 수 있다고 한다.

잠깐 피어나는 꽃보다, 다양한 꽃만큼이나 가지각색 다른 모양과 색을 지닌 잎사귀들이 더 예쁘다고 생각한 건 사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끼 역시 그렇다. 스스로 살아가지 못하고 나무, 바위 등 습하고 그늘진 곳에 기대어 살아간다고 해서 안 좋은 의미ㅡ예를 들면 기회주의자ㅡ로 비유하는 걸 많이 봐왔고, 나 역시 눈앞에 이끼가 있어도 예쁘다거나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영화 <이끼>가 먼저 떠오르기도 했고. 하지만 조금만 바꿔 생각하면 이끼에게서도 배울 점이 많다. 그는 다른 이에게 기대어 있는 걸 부끄러워하거나 자존심 상해하지 않는다. 자신의 특질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욕심도 없이 조급함도 없이 오래 참고 견디며 그렇게. 그래서일까. 이끼의 꽃말이 모성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어떠한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

나이가 들면서 화려하고 외적으로 예쁜 것보다 잔잔하고 눈에 띄지 않지만 내적으로 예쁜 것에 더 눈이 간다. 모든 존재는 그만의 존재 가치가 있고 그만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곱씹어 보면, 그동안 내가 생각해온 것들이 얼마나 단편적이었는지 새삼 느낀다. 마음의 눈을 조금씩 조금씩 넓혀 십 년 뒤, 이십 년 뒤엔 좀 더 넓고 푸근한 사람이 되어있길, 내 옆에도 그런 아름다움을 품고 내가 가진 아름다움을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봐주는 이가 있길.


8

어제오늘 날씨가 추워 땅이 꽁꽁 얼어 있을까 봐 또 한 번 고민에 빠졌다가 결국 산에 갔다. 막상 산속은 그리 춥지 않아 오길 잘했다며 신나게 내려오는 길이었다.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다. 어느 순간 난 끙끙대고 있었고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가 누워있는 날 발견하고 일으켜 주었다. 매번 내려오는 그 길. 조금 가파르긴 해도 미끄럽다거나 발 디디기 어렵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그 무난한 길에서, 나는 내려오던 리듬에 몸을 싣고 온 몸으로 땅에 드러누운 것이다.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일어나긴 했지만 한참을 꼼짝 못 하고 멍하니 나무를 붙잡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니 눈앞엔 알 수 없는 검은 점들이 왔다 갔다 하고 머릿속엔 딩딩 종이 울렸다. 눈앞에 별이 반짝인다는 건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걸까. 다시 앞을 보고 목을 움직여보고 어깨를 들어 올려봤다. 목과 어깨가 늘 아파 산을 오르기 시작했으니 여길 또 다치면 큰일이었다. 다행히 괜찮았다. 그리고 약간의 안심을 하며 발걸음을 뗐는데 맙소사. 고통은 꼬리뼈에서 올라와 두개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나도 모르게 괴성을 지르다 신음소리를 내며 겨우 집에 왔다. 장갑을 벗으니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피가 흐르다 맺혀 있었고 그걸 보니 오른손에 힘이 빠졌다. 푹 주저앉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었다. 앉고 일어설 때, 몸을 숙일 때, 걸음을 걸을 때 꼬리뼈에 힘이 이렇게 들어갈 줄이야. 나의 꼬리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당연히 할 수 있었던 일들을 갑자기 할 수 없을 때에야 그 자리에 늘 있었던 내 몸의 구성원들을 돌아보게 되는 법이다. 만약 산에서 아주머니를 만나지 못했다면 차가운 흙바닥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한참을 더 누워있었을 것이다. 만약 더 심하게 자빠져 목이나 머리를 다쳤다면 인적 드문 산속에서 젊은 나이에 개죽음을 당했을 수도 있다.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지만, 너무 당황스럽고 기가 막힐 때 극한 만약의 상황들을 생각하고 나면 지금 내 상황이 썩 나쁘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마음이 좀 편해진다. 혼자 걷는 산길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때쯤,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아파서 당분간은 산에 제대로 갈 수 없게 생겼다. 휴. 산이랑 좀 친해졌다 싶었는데, 역시 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자만하고 마음을 놓으면 안 되는가 보다. 제일 우스운 것은 고통스럽게 집으로 돌아오면서 오늘 쓸거리가 생긴 것에 대해 반가워하며 머릿속으로 문장들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곱씹어 쓴 것이 고작 이 정도지만... 어쨌든 이 나이에 산에서 넘어질 거라고 미처 예상하지 못한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9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닐까.

긴긴 고민 끝에 나 스스로 택한 길인데도 끝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때가 있다.

돌아갈 곳도 없으면서 괜히 한번 뒤를 돌아본다.


10

또다시 밤.

아침이면 오늘은 다른 날이 되리라 설레는 마음

밤이면 내일은 다른 날이 되리라 애써 위로하는 마음

나만 그런가?


11

오늘의 해는 저물었지만 내일은 내일의 해가 떠오른다.

지나간 오늘 하루에 대해 아쉬워할망정 지는 해를 보며 아쉬워하지 않는 이유.


12

고등학교 3학년 새 학기 첫날, 그러니까 딱 십 년 전 오늘

부산엔 그 해의 첫눈이 내렸다.

늘 그렇듯 삼일절 다음날은 개학식 그다음 날은 내 생일.

미처 내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친구의 문자가 왔다.

생일 축하해. 지금 내리는 눈이 내 선물이야. 어마어마하지?

오글거리기도 하고 뻔뻔하기도 해서 웃어넘겼지만 진심으로 고마웠고 아직도 고맙다.

어제도 삼월 파이팅이라는 짧은 문자를 보내준 친구.

예나 지금이나 나만큼 말수 적고 표현을 잘 안 하는, 그래서 더 고맙고 와닿을 때가 많은...


13

3월 3일 내 생일을 앞두고 평일엔 모두 바쁘니 주말 동안 먹자파티를 하기로 했다.

저녁엔 내가 요즘 먹고 싶었던 짬뽕을 먹고, 맥주와 케이크를 산다. 집에 와 치킨을 시켜 치맥을 먹는다.

내일 낮에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를 먹고, 생일 아침엔 엄마가 끓여주시는 미역국을 먹는다.

이상 아빠, 엄마, 나 셋이서 치밀하게 세운 먹자파티 계획이었다.

짬뽕을 신나게 먹고 나오니 이미 길바닥이 흥건했고 비가 꽤 많이 오고 있었다. 계획을 수정해야겠다며 택시를 잡아타려는데 옆에 편의점이 보여 맥주를 사고 건너편에 파리바게트가 있어 케이크를 샀다.

셋이서 줄지어 첨벙거리고 뛰어다니자니 열일곱 여고생이 된 기분이었다.

이왕 젖었으니 마음 놓고 비를 맞으며 집에 걸어왔다. 비에 흠뻑 젖고 추워서 이가 딱딱거리는데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니. 빗길에 반짝이는 자동차 불빛처럼 오랫동안 가슴속에서 빛날 추억 하나. 앞으로 생일이 다가올 때마다 오늘을 꺼내 보겠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심심하게 지났을 오늘. 비가 고맙고 사랑스러운 밤이다.


14

지난밤, 내 몸이 아파 끙끙 앓다가 잠이 들었는데, 엄마가 아파 어쩔 줄 모르며 간호하는 꿈을 꿨다.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깼는데 정말 내가 아파서 다행이었다.

왜 밤엔 더 아픈지, 왜 아플 땐 밤이 더 긴지.


15

집집마다 높지 않은 담으로 이어지고 이어진 골목길은 아무런 꾸밈없이 아름다웠다.

아직 매화가 만개하기 전, 신기루처럼 닿을 듯 닿이지 않는 홍매화를 찾아가던 시간.

책을 펼치면 그 세계로 빠지듯, 문득 꺼낸 사진을 보며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그런 면에서 책과 사진은 닮았고 난 그런 현실도피성 매력에 빠졌고.


16

서른을 바라보며 나이가 든 걸 체감할 때가 셀 수 없이 많지만, (지극히 개인적으로) 그것이 특히 온몸으로 와닿는 경우는 하루가 다르게 급격히 떨어지는 체력과, 자꾸 신경과 관심을 쏟을 무언가ㅡ이를테면 취미라는 명목 하에ㅡ를 찾는 것, 그리고 얼마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돈을 쓰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17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참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 친구는 우리 학교 고학년 담임 선생님의 딸이었고 우리 동네에서 제일 최신식인 아파트에 살았다. 내가 살던 곳은 파란 슬레이트 지붕 아래 여러 집이 붙어 있는 곳, 여덟 가구가 바깥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함께 쓰는 그런 집.

어느 날 그녀는 우리 집을 보고 그 길로 날 모른 척했다. 이유도 모르고 당하다가 이유를 알았을 때, 아마 난 가난의 의미를 처음으로 체감한 것 같다. 그녀를 미워하고 나쁜 애 빨리 잘 끊었다 생각했다면 속 편히 잊고 살았을까. 어린 나는 친구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내 잘못 같았다.

그 일은 하나의 트라우마처럼 마음에 깊은 칼자국을 남겼고, 나의 타고난 성향인지 꼭 그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집에 살게 된 이후로도 집에 누군가를 데려오는 것이 달갑지 않다. 또 하나, 정말 내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아니면 속내를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한마디로 사람을 못 믿는 것이다.

sns를 시작할 때 연락처와 이메일 동기화를 안 하고 익명으로 혼자 시작한 이유도 그렇다. 사람이 좋은데 사람이 싫고 얘기는 하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공간에서 떠들고 싶었다. 현실과 정반대로 지나친 솔직함으로.

도로에서 고개를 약간만 숙이면 보이는 집에 살아 봤으니까. 구경꾼들의 어쩜 저런 곳에 사람이 사냐는 말도 들어봤고 잘 보이는 집 때문에 친구도 잃어봤으니까. 난 절대 남의 집을 보지 않았는데 필름 사진을 찍으며 종종 남의 집을 보게 되었다. 담 너머 강아지가 보일 때도 있고 지붕 위에 고양이가 앉아있을 때도 있다. 이제야 좀 무뎌진 건가. 약 2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마음에 남아있던 흉터도 희미해진 걸까.

그런 집에 사는 아이들은 대부분 가정환경도 좋지 않다. 그래, 난 가난해서 불행한 건 아니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을 뿐. 내가 불행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써서 내뱉는 요즘이다. 근데 참 웃기는 것은 엄청 고단하고 슬픈 시절이었던 것 같은데 막상 글로 옮기자니 별일이 아니어서 오히려 서운하다는 것.

내가 제일 불우하고 아픈 것 같아도 돌아보면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천지다. 그러니 살아가는 거겠지. 모두들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겨내고 아파하며.


18

비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없는데 왜 비가 오면 그 사람이 생각나는지.

사실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서 비는 핑계일 뿐이지만, 그래도 비가 오면 더 많이 떠오른다.

스무 살, 너무나도 어렸던 나의 첫사랑.

그는 참 어른스러웠고 나는 참 제멋대로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 끔찍이도 닮고 싶지 않은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고 말하며 스스로에게 적잖이 놀랐었지.

너무 서툴렀다. 서툴고 급한 마음에 그를 내 것 인양 소유하고 이기적으로 지배하려고 했던 행동들이 십 년이 되어가도록 떠올라서 여전히 괴롭다.

예쁘고 참한 여자분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은 그를 솔직히 아직도 사랑한다. 그를 만나는 동안 느꼈던 사랑의 감정과 존경심은 세월을 이겨내고, 나날이 아름답고 굳건하게 내 마음에 뿌리내려 버렸다. 마치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내 몸 한구석에 지니고 태어난 것처럼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이상한 일이다. 그와 헤어지고 만난 이들은 억지로 추억을 끄집어내 봐도 별 것 없고, 미안한 말이지만 이름과 나이도 가물가물한데.

헤어짐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었지만 내가 조금만 더 성숙했다면,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앞을 내다볼 수 있었다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인생은 단 한 번이고, 인생은 타이밍이지.

그와 헤어지고, 그와 만나는 동안 느꼈던 나의 못난 구석들을 고치려 부단히 애써왔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줄 몰라서, 그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었던 지난날을 후회하면서. 다시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놓치지 않으리라, 결심하면서.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나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내가 된다면 좋겠다... 위로하면서.


19

미완성도 충분하다.

완성이 되어야만 예쁘고 완벽한 것은 아니지.


20

고장 난 채로 장식이나 할까.

헐값에 다른 주인 만나라고 보낼까.

고민하며 방치해뒀던 canonet g3 ql17, 일명 큐엘이를 고치고 일반 필름의 두배 이상 가격인 흑백 필름을 넣어 사진을 찍었다.

용두산 공원 벤치에서 조심스레 필름을 넣고 있을 때 다가왔던 거리의 사진사 아저씨.

청년 시절 쓰던 카메라라고 추억하길래 날 찍어달라고 막 장전한 카메라를 건넸는데 현상해보니 하얗게 타버린 첫 장.

그 속에 담긴 내 모습은 어땠을지 참 많이 궁금했는데.

슬프다. 사진사의 추억을 담아 아련하게 찍었을 한 장의 사진이.

남는 건 사진뿐이라지만 현상된 빛의 기록은 없어도 용두산공원과 함께 내 마음엔 오래오래 남겠지.

새하얗게.


21

작디작은 뷰파인더.

초점은 맞는 건지 노출은 제대로 되는 건지 도통 보이질 않는다.

여자는 처음 써보는 카메라를 이리저리 살피며 한참을 씨름했다.

오가는 사람이 마주치면, 한 명이 지나가는 사이 다른 한 명이 서서 기다리거나 둘이 게걸음을 걸어야 지날 수 있는 골목길, 장을 보고 여자 쪽으로 오던 할머니는 가뜩이나 좁은 길에서 웬 여자가 쪼그려 앉아 온 얼굴을 찌푸리고 있으니 특별한 것이라도 있나 싶어 여자 뒤에 바짝 붙어 섰다.

"저걸 뭐하러 찍는교? 참 할 일도 없는갑다."

여자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봤을 뿐인데 덩달아 한심해진 기분이 든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가던 길을 갔다.

할머니가 지나가자 문득 저 아래에서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여자는 고개를 내렸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쥐? 새?'

죽은 지 사나흘은 되어 보였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치 않았다.

사진 한 장 찍으려다 모르는 노인네에게 할 일 없는 사람 취급을 받고 악취까지 맡았다니. 분명 혼자 뷰파인더를 들여다볼 때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할머니로 인해 일이 틀어진 것 같았다. 여자는 어깨가 축 늘어져 집을 향하다가 게임에서 진 것처럼 화가 났다. 발걸음을 돌려 아까의 골목으로 가 보았다. 그 사이 누가 치운 건지 쥐도 새도 없이 길은 깨끗했다.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일 수도.

여자는 쪼그려 앉아 뷰파인더를 바라보았다.

다시 내 세상.


22

커다란 개가 거리를 활보할 때였다. 개를 피해 단 한 번도 지나가지 않았던 길로 우연히 들어섰다가 뼈대만 남아 스러지기 직전의 집 한 채를 만났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부터였으니까 적어도 십 년은 된 재개발구역. 바닥엔 이름 모를 잡초가 무성했고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의 시선을 피해, 또는 나이의 한계를 넘어 피우다 버렸을 담배꽁초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차마 보여주지 못한 마음, 또는 어린 날의 객기도.


23

앞 테이블에서 조용히 책을 보던 여자가 벌떡 일어난다.

저, 여기... 여기...!

빠른 걸음으로 카페 출입구로 향한다. 운동화를 슬리퍼처럼 질질 끌며 걷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여자가 자리로 돌아오고 양복 입은 멀끔한 남자 하나가 따라와 앉는다. 여자가 내뱉는 말의 절반이 어색한 웃음과 긴장이 섞인 대답이다.

예예. 아.. 그렇죠, 아 예..

면접이다. 남자는 면접관, 여자는 지원자. 자리에 앉은 지 오분도 안되어 남자는 일어선다. 어떤 결과든 꼭 연락해 달라고 연신 고개를 숙이는 여자를 뒤로 하고 뚜벅뚜벅 걸어간다. 여자도 금세 짐을 챙겨 떠난다. 오로지 면접을 위해 두 시간 전부터 이곳에 와 애써 아무 일 아닌 듯 책을 읽으며 기다린 걸까. 앞서 떠난 줄 알았던 남자의 목소리가 저 뒤에서 들려온다. 고개를 돌려보니 뒷모습이지만 그가 확실하다. 다른 젊은 남자와 한 테이블에 앉았는데 젊은 남자의 모습이 조금 전 여자의 그것과 닮았다. 'Mario의 Let me love you'가 흘러나온다. 한창 싸이월드를 내 공간으로 여길 때, 오랫동안 배경음악으로 지정해두었던.


24

부산은 어제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전에 흐려서 비가 오겠다 생각했는데 우산을 깜빡하고 챙겨가지 않았다. 종종 우산이 없을 때마다 편의점에서 제일 저렴한 비닐우산을 산다. 어제도 역시 그러했지만 그동안 샀던 비닐우산들과는 좀 달랐다. 불투명하고 단단한 재질에 좋아하는 민트색이라 무척 마음에 든 것이다.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산을 잘 쓰고 돌아와 현관문 앞에 말리느라 펼쳐놨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걷어 넣으려고 보니 천과 지지대를 연결하는 부분 한 곳이 뚝 떨어져 있었다.

다른 우산이었으면 싸구려가 그렇지 하고 버릴 생각부터 했을 텐데 이건 마음에 들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강력 접착제로 붙여보고 본드로 붙여봐도 그때뿐. 맥없이 떨어지기만 하는 광경에 속이 상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싼 대가를 치르기가 힘들어서 꿈을 뒤편으로 밀어 넣고 지금 당장을 위해 싼 값을 지불하며 살아간다면 나의 인생도 이렇지 않을까.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대안을 고르고 애를 써도 내 마음처럼 오래가지 못하고 끝없이 미련만 남지 않을까.

좋은 우산을 쓰기 위해 비를 맞는 일을 슬퍼하지 말아야지.

비를 맞는 동안 조금 춥고 나 자신이 초라해져도 기꺼이 받아들여야지.


25

비가 내린다. 비가 오는 시간만큼 여자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첫사랑의 기억. 따뜻하고 아련한 추억에 잠긴 가슴으로 창 밖을 바라보니 한 얼굴이 떠오른다. 여자는 외출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섰다. 한 달 전쯤 단 한 번 들른 카페. 원두를 사러 갔다가 핸드드립까지 배웠던 곳으로 들어가 주문을 하려고 서니 남자 직원이 서 있다. 눈동자를 굴리는 여자의 뒤에서 카페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다른 손님에게 원두를 언제 볶는지, 그러니 언제 오면 신선한 원두를 사 갈 수 있는지 얘기하고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느라 허공을 응시하고 있자 직원이 주문을 재촉했다. 아, 샤케 라또 한 잔 주세요. 사장의 핸드드립을 먹으러 왔던 여자는 입 밖으로 샤케 라또를 내뱉자마자 후회했지만 굳이 말을 바꾸지 않았다. 여자는 자리에 앉아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메뉴판을 보다가 힐끔, 지나가는 사람을 보다가 힐끔, 도둑질하듯 남자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괜히 온 것 같다.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다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괜히 혼자 좌불안석인 여자였다. 한참 동안 창 밖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차와 사람을 구경하던 여자는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남자를 찾아보는 것을 그만두고 빗줄기가 창문을 타고 내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마음이 텅 비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렌지 좀 드세요.

사장의 목소리다. 멍하니 있던 여자의 눈이 커졌다.

오렌지가 새로 들어왔는데 엄청 맛있어요. 좀 드시라고 잘라 왔어요.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네, 고맙습니다.

무미건조하게 고맙다는 말로 끝내버리다니, 여자는 또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사장은 바로 옆 테이블에 가서도 상냥한 웃음과 오렌지를 건넸다. 비는 서서히 그치고 있었고, 줄곧 육아와 살림에 대해 얘기하던 젊은 여자 둘은 사장에 대한 칭찬으로 새로운 이야기 꽃을 피웠다. 친절하다. 올 때마다 이렇게 잘해주니 감동이다. 결혼은 했을까. 따위의 말이 오고 갔다.

결혼은 했을까. 여자는 이유 모를 초조함을 느끼며 오렌지를 쳐다봤다. 토막토막 잘려있지만 먹으려면 껍질을 떼어내야 했다. 손엔 오렌지 과즙이 흐를 테고 입으로 베어 먹다가 남자와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상큼한 향기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오렌지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고맙게도 오렌지만 쏙 빠진다. 남자의 섬세함에 여자의 텅 비었던 마음이 다시 차올랐다. 얼굴도 봤고 목소리도 들었기에 여자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카페에서 읽으려고 가져온 <안나 카레니나>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조용한 발걸음이 느껴지더니 테이블에 커피 한 잔이 조심스레 내려오고 있다. 고개를 돌리니 소리 나지 않게 잔을 놓느라 남자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샤케 라또 다 드신 것 같아서 책 읽으시는 동안 드시라고 드립 커피 가져왔어요. 손님이 좋아하는 예가체프 종류인데 마시면 입 안에 딸기향이 퍼질 거예요.

적잖이 놀란 여자는 고맙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달아오른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떨구었다가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친 줄 알았던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26

뭐 해?

.. 사랑하는 대상 없이 상사병을 앓고 있어.


27

어렸을 때 아무 날도 아니었던 5월의 어느 날, 노란 장미꽃 한 송이를 꺾어다가 엄마께 내민 적이 있다.

누구에게도 그런 꽃을 받아본 적 없었던ㅡ나만큼 감성적이고 낭만을 좋아하는ㅡ엄마는 아직도 가끔 그 이야기를 하며 행복한 기분에 잠긴다고 했다.

꽃을 꺾은 건 물론 잘못한 일이지만,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가끔 장미 한 송이를 꽃집에서 사 엄마께 불쑥 드리곤 하는데 그때마다 장미꽃보다 화사하게 피어나는 엄마의 미소가 좋다.

오랜만에 한송이 사 가야지.


28

남자에게 예쁘다는 말을 들은 건 너무 오랜만이었다. 어쩌면 처음인지도.

미인이시네요. 특히 웃는 모습이 참 예뻐요.

세상에 웃는 모습이 예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세아의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웃는 얼굴이 예쁘다는 것은 그저 인사치레일 뿐이라고 여기면서도 세아는 거울을 보며 활짝 웃어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보았다.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으니 거울 속 웃는 얼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예쁘다는 말을 들은 건 너무 오랜만이었다.


29

A의 눈엔 항상 광기가 서려있고 입엔 칼이 물려 있다. 눈만 마주쳐도 몸의 모든 세포가 가라앉고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세아의 가슴속을 마구 찌른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지만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런 세아에게 친구 J는 언제든 뛰쳐나오게 된다면, 위험한 곳에 가지 말고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한다. 생각보다 살 방법은 한정되어 있지 않다고. 도와주겠다고.

주저앉아 일어날 줄 모르던 세아의 몸속 세포들이 하나둘씩 깨어나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용감해져야 한다. 그녀는 하늘을 한 번 보고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문득 웃는 모습이 예쁘다던 남자가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30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그리고 내가 가지 못한 길을 걷는 이에 대한 동경.

그때 ~할 걸.

후회가 많은 요즘이다.

나이가 들어가고 머리가 굳어지는 일종의 방증인가 보다.

후회하지 말고 해 보자.

마음먹고 저질러도 여전히.

'하는' 것에 대한 불확실함과 불안함이 한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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