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죽'을 준비하기] 구직급여 (2/4)
본격적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고 있는 4월 30일.
나는 고양이로 분장하고 폐공터에서 또 다른 고양이와 춤을 추고 있는 중이다. 이번에는 자신감이 붙어서인지 기분이 좋아서인지 혹은 감독님이 편해져서인지 지난번보다 훨씬 연기가 편하다. 그렇다. 지금 나는 내 생에 두 번째 독립영화를 찍고 있다. 나도 내가 영화에 두 번이나 출연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작년에 했던 거지 연기가 감독님의 마음에 퍽 드셨던 모양이다. 잘 알지도 못하고 그저 감독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움직였을 뿐이었는데, 거지 촬영이 끝난 후 감독님께서 나를 주연으로 작품을 더 해보고 싶다고 말씀 주셨었다. 심지어 나의 이야기로 새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으시다고도 하셨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와 온라인 기획전의 '곰인형과 우산'을 모티브로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이런 나라도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을 수도 있다니'.
내가 아주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고, 이런 나도 쓸모가 있다고 판단해 주신 감독님께 감사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지렁이도 꿈틀하는 재주가 있었나 보다. 그리고 재능이라는 놈도 일단 뭐라도 시도해 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어도 해보지 않으면 결코 알 길이 없다.
5월의 어느 날, 오직 짱구 푸딩을 영접하기 위해 팝업스토어에 방문했다. 푸딩은 금방 먹어버리고 아쉬움에 빈 용기를 돌려보며 중얼거렸다.
'푸딩 비싸기는 엄청 비싼데 너무 작고 잘 팔지도 않어. 차라리 만들어 먹는 게 언제든지 먹을 수도 있고 배 터지게 먹을 수도 있을 거 같구만.'
팝업스토어를 다녀온 어느 날 아침, 나는 침대에 누워 인터넷에서 제일 재료도 적게 들어가고 조리법도 간단한 푸딩 레시피를 찾았다.
'생각보다 쉽구만! 할만하겠는데?'
바보 같은 나는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장장 13시간 동안 '다채로운 대형사고 치기 대작전'에 돌입했다. 가장 먼저 시럽을 만든다고 휘젓다가 시럽이 옷에 튀어 옷을 하나 버렸다. 그다음 전자레인지 전용 용기와 체반이 없어 새 냄비를 전자레인지에 돌리다가 손잡이를 구워 먹고 계란물을 채반에 거르지 않고 냅다 부었다가 못 먹을 비주얼을 보며 순식간에 두 가지 사고를 추가로 쳤다.
징그러워서 비명을 질렀는데 얼마나 놀랐던지 소리도 안 나오더라. 정말이지 레시피는 필요하니까 있는 것이고, 고생하기 싫으면 최소한의 준비는 하고 작업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포기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재료비가 아까워 포기할 수 없다. 대안으로 숟가락과 국자를 이용해 살살 걷어내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놈들, 잡히면 버려질 운명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미끄덩한 몸(?)을 이용해 요리조리 피하는 것이 아닌가! 동동 떠서 나를 약 올리는 알끈들과 한참 밀당만 하고 하나도 건져내지 못하니 너무 화가 난다.
"아니 왜 안 떠지냐고오오오!!"
혼자 소리를 지르며 정체불명의 액체에 국자를 푹푹 담갔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그때, 알끈들이 국자에 담기기 시작했다.
'?!!!'
국자를 푹 담갔다가 빼니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알끈들이 국자에 담겼다. 물론 먹을 부분도 함께 담기긴 했지만 전체를 버리느니 일부를 희생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국자로 알끈을 걷어내며 '잃을 것을 겁내면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일부 손실도 감내할 줄 알아야 일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과 '뭐든 정말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깊게 담겨봐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고생 끝! 조금만 기다리면 맛있는 푸딩을 먹을 수 있겠지!'
이제 거의 다 왔다. 중탕 후 냉장고에서 식히면 완성이다. 푸딩들을 준비해둔 두꺼운 잔들에 옮겨 담은 후 중탕을 시작했다. 두 개는 예쁜 비주얼을 보기 위해 카페 유리잔에, 두 개는 그냥 머그잔에.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몰려드는 피로감에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중탕 중인 푸딩 재료들을 흐뭇하게 감상하기 위해 돌아온 그때…. 유리잔이 조금 이상하다.
'원래 저 자리에 이음새가 있었던가?'
긴가민가 하는 마음에 잠시 중탕 중이던 뚜껑을 열고 유리잔에 씌운 랩을 고정하던 고무줄을 벗겨냈다.
'쩍'
고무줄이 벗겨지자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유리잔이 정확히 반으로 쪼개졌다. 예쁜 유리잔 하나가 운명하셨다. 두 동강이 난 유리잔을 보며 내 마음도 두 동강이 나버렸다.
'안돼!! 안돼에에에… 흐어어어엉….'
그 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거다. 망연자실해서 쪼개진 유리잔을 보고 있는데 그래도 약간이지만 푸딩이 되어 있다. 유리가루가 걱정되긴 하지만 궁금하기도 하고 아까운 마음에 바로 숟가락을 가져와 걷어 먹었다. 념념념념념.
'오, 맛있다! 맛있어!'
맛이라도 보니까 기분이 좋다. 쪼개지지만 않으면 잘 되고 있는 것 같아 마음도 놓인다. 아니 안 될게 뭐가 있나. 쪼개질 수도 있지. 정말이지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내 행동 하나뿐이다. 그 외에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하나도 없다. 그럴 수 있다.
그리고 푸딩은 아직 3개나 남아있는걸? 조금만 기다리면 맛있는 푸딩을 3개나 먹을 수 있다. 그렇게 나머지 잔들을 다시 중탕시키고 침대에 누웠다. 잠시 후 중간 점검을 위해 다시 냄비로 다가갔다.
'?????'
이번에는 중탕 물이 노란색이다. 불길함을 직감하고 뚜껑 열었더니 나머지 유리잔 하나가 맥없이 쪼개져버렸다. 5번째 사고. 예쁜 유리잔이 모두 못 쓰게 되었다.
"띠링! '유리잔의 파괴자'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실성한 와중에 농담이 나왔다. 이번에도 깨진 유리잔에 약간의 푸딩이 만들어져 있다. 와신상담하듯 유리잔에 달라붙은 푸딩들을 살살 긁어먹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아직 2개 남았다고. 남은 두 개라도 잘 하면 된다고.
어찌어찌 중탕을 완료하고 남은 머그잔들을 냉장고에 넣었다. 이제 식히면 정말 끝이다. 남은 2개라도 맛있는 푸딩을 먹을 수는 있겠지.
또 몇 시간 후. 냉장고에 있는 푸딩들을 흔들어보니 찰랑찰랑하던 것들이 이제 움직이지 않는다. 단단하게 잘 굳은 모양이다. 드디어 짱구에서 본 띠용띠용 푸딩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컵을 접시 위에 뒤집었다. 푸딩이 나오질 않는다. 너무 잘 굳은 건가? 한참을 나오지 않아 손으로 컵 바닥을 퍽퍽 쳤더니 '퍽!!' 곤죽이 테이블에 쏟아졌다.
'아, 아아아아앜…!!'
밤이라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테이블에 쏟긴 곤죽을 쫍쫍 빨아먹었다. 맛은 있지만 인간성을 버리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 양도 생각보다 적다. 이러려고 하루 종일 걸려서 그 개고생을 하고 옷도 버리고 냄비도 태워먹고 유리잔도 2개나 깨버린 건가. 너무 속상하다.
멘탈이 다 터진 상태로 약 한 시간을 더 기다렸다가 마지막 푸딩을 꺼냈다. 이번에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국그릇에 뒤집었다. '푸악' 뒤집자마자 푸딩이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 사고를 보고 있자니 진이 다 빠져서 이제는 눈물도 나지 않는다. 심지어 이번에는 건더기조차 없이 아예 액체가 바닥까지 흘러버렸다.
접시와 테이블은 물론이고 바닥까지 망설임 없이 핥아먹었다. 아무리 보는 눈이 없다지만 정말이지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옆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너 지금 뭐 하고 있냥?' 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보는 눈이 없지도 않은데 정말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싶다.
그렇게 하루 종일 투자해서 얻은 것들은 7개의 사고 경와 그릇이 아닌 곳에 있는 푸딩이길 바랐던 것들 약간. 이렇게 고생고생해서 만들었으면 인간적으로 하나라도 살아남아서 잘 되던가. 기왕 배우는 거 제대로 배우기 위한 것인지 살아남은 것들도 처참히 실패해 버렸다.
나중에 보니까 전자레인지에 만들면 좀 잘 되는 듯싶기도 하고, 비빔면을 해먹기 위해 채반도 사 왔지만 두 번 다시는 푸딩 만들기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내가 해먹을 음식은 아닌 것 같다.
푸딩을 잘 팔지 않는 이유들 중 하나를 알았으니까 됐다. 푸딩은 보일 때마다 사 먹어야겠다. 그리고 내가 푸딩을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웠으니 됐다. 한 번 열심해 해봤고 못 하는 것도 알았으니 이제 두 번 다시는 안 하면 된다.
취직 전이지만 구직급여 덕분에 아직은 여유가 있던 6월 11일.
'그러고 보니 부케 돌려줄 때가 된 거 같은데?'
한참 미루고 있던 '부케 말리기'가 생각났다. D-DAY를 확인해 보니 만우절 결혼식 후 70일이나 지나있다. 약 한 달 안에 액자와 향초를 만들어야 한다. 꽃은 진작에 잘 말랐고 액자 재료도 미리 다 구비해뒀으며 디자인도 구상되어 있다. 마땅한 자리는 없어 바닥에 앉아 머릿속에 있는 액자 먼저 실현시키기 시작했다.
액자의 이빨을 뽑고 유리를 닦고 글루건을 쏘아 액자에 유리를 고정한다. 그 위에 말린 부케 재료들을 쌓아 올린다. 포장지를 정리해 반오픈 꽃다발 모양으로 만들고 부케에서 챙겨놨던 리본과 진주 침으로 꾸며준다. 마지막으로 유리에 묻어있는 지문을 다시 한번 알코올과 마른 손수건으로 닦아주면, 부케 액자 완성이다.
덕분에 오랜만에 미술 시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액자도 상상 이상으로 예쁘다. 그러고 보니 아직 내가 만든 방식으로 부케 액자를 만든 사람은 보지 못했다.
말린 부케를 돌려주는 또 하나의 방법을 공유하고 싶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어디에 글을 써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 역시 불특정 다수와 소통하기에는 커뮤니티가 최고라고 판단했다. 마침 최근 활동을 시작한 커뮤니티에 액자를 만들며 찍어뒀던 사진들과 함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쓴 바로 다음 날인 6월 12일, 나를 위한 마법이 또 한 번 시작되었다.
루틴한 생활이었다. 집안일을 하고 구직 사이트를 둘러본 후 커뮤니티를 연다. '지금 인기 있는 이야기'로 선정된 글들을 구경하기 위해 메인 화면의 스크롤을 내린다. 그리고 첫 페이지에서 낯익은 사진을 발견한다…?!
'아니 저게 뭐야.'
순간 당황했다. 사진은 분명 내 사진인데 제목이 다르다. 누가 내 사진을 베껴간 건가?! 깜짝 놀라 사진을 눌러보니 내가 쓴 글로 이동되었다. '뭐지….' 눈을 끔뻑이다 알게 됐다. 내 글이 '지금 인기 있는 이야기'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6월 16일에는 방송에 나오는 내 모습을 태블릿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4~5월에 촬영한 고양이 독립영화가 방영된 것이었다. 똑같은 장면일 뿐인데 유튜브로 볼 때에는 마냥 좋았던 영화를 방송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시청하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불특정 다수와 동시에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워서 악악 소리를 지르며 관람했다.
연이은 6월 17일 토요일에는 커뮤니티에서 특정 사람들을 초대한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서울을 다녀왔다. 정말이지 운이 좋아 셀럽 체험 제대로 하고 왔다. 먹고 마시고 타로, 공연 관람, 다양한 게임, 원데이클래스 등 다양하게 즐긴 후 커뮤니티의 개선점에 관한 논의도 하고 선물도 왕창 받아 왔다.
재주가 없는 줄 알았던 나에게도 작으나마 몇 가지 재주가 있었던 것이었다. 정말이지 지렁이도 꿈틀하는 재주는 있더라. 역시 이것저것 시도해 봐야 한다. 뭐든 해봐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