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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우지렁이 Aug 25. 2024

똑똑, 두드려는 보자

['지렁이 죽'을 준비하기] 구직급여 (4/4)

시기의 문제일까, 욕심이 문제일까. 길고 길었던 숲해설가 수업이 끝나도록 구직이 되지 않고 있다. 구직급여도 벌써 절반이나 지났다.


'내가 너무 범위를 작게 잡았었나?'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번 구직은 여태까지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하고 있었다. '후회 없는 삶을 살 것'이라는 목표의식이 있기 때문이고 구직급여라는 보험 덕분이었다.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구하지 않을 것이다. 돈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구할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창업이건 경영이건 여튼 컨설팅을 하고 싶었다. '대신 공부해서 남을 돕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진 지 오래다. 고생해서 딴 경영지도사 자격증을 제대로 써먹어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뿐이다.


여태 창업 및 경영 컨설팅은 오랜 경력과 노하우가 있으신 분들만 하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없는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에 면접을 다녀보니 20대 중후반의 창업 보육매니저들도 창업 및 경영 컨설팅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보다 나이도, 경력도 어리신 분들도 컨설팅을 한다는데 무려 경영지도사까지 딴 내가 못할 이유가 없다.


역시 가장 관심도 있고 기존에 하던 업무인 창업 지원 및 컨설팅 관련으로 부산 전역에서 일을 알아보고 있다. 하지만 작년에 거의 모든 창업지원기관에 서류를 넣었던 탓일까. 구직이 쉽지 않다. 구직급여 기간도 절반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구직 중인 6월 말, 슬슬 구직을 포기하게 되었다.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창업하고 말지!'




생각만 거창하지 역시 콩알만 한 간의 소유자인 나는 실행에 옮길 수 없다.


'업종은 뭐로 하려구?'


그렇게도 염원하던 경영지도사업을 하자니 전문직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나라에서 해주는 창업 지원은 해당이 없을 것 같고 심지어 처음부터 다 잘 해야 할 것 같다. 역시 자신이 없다.


'그럼 경영컨설팅 말고 창업지원 대상업종 중에 하고 싶은 일이 뭐가 있지?'


아직은 경영 컨설팅을 제외하고는 하고 싶은 일이 없다. 하긴, 돈도 안 쓰고 반 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33년이나 모르고 살던,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낼 수 있을 리는 없지.


'내 관심사가 뭘까?'


관심사를 찾아보려 하니 자연스럽게 서평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이제는 어느 정도 레퍼런스가 쌓였다. 단시간 내에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던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5월부터 한 대형서점의 스타 블로거가 되어 있기도 했다.


'그래, 여태 했던 서평 분류를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렇게 여태 서평 했던 도서들의 카테고리를 분류 및 분석했다. 하지만 관심사를 특정할 수는 없었다. 너무 중구난방 퍼져있는데다가 치우친 것도 없어 종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카테고리가 너무 다양하다. 추리소설, 그림책, 그림/사진 에세이 등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물론,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탓인지 심리학 일반, 인간관계, 대화/협상, 성공/처세, 자기능력계발에다가 교양 인문, 교양 철학과 서양사/문화까지 읽었더라. 거기에 좋아하는 경제 사상/이론, 경제전망을 거쳐 요즘 관심사인 부동산 사기와 부동산 구매 관련으로 재테크 일반과 부동산/경매를 넘나든다. 마지막으로 정말 의외인 과학, 프로그래밍 언어, 디자인까지.


'도대체 주력 관심사가 뭐지?'


주력 관심사를 알 수 없으니 창업도 할 수 없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돈을 벌려면 취직을 하거나 하다못해 창업이라도 해야 한다. 취직이 안 되니 그나마 자의지만 있으면 시작이라도 가능한 창업 쪽도 생각을 해봐야 한다.


'좋아. 그럼 뒤집어서 내가 줄 수 있는 가치가 뭐가 있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치가 뭐가 있을까?'


이 부분도 역시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요 근래 나의 몇몇 경험들이 다른 사람들의 우울 관리에도 조금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일종의 노하우는 생겼는데 이론적 기반이 없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옆 동의 행정복지센터에서 우울 예방의 일환으로 캘리그래피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홍보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우울 예방, 배우는 것, 표현하는 것. 모두 나의 관심사에 부합한다. 수업 일시를 보니 평일 낮 수업이지만 당장 취업이 될 것 같지도 않다. 더군다나 수업에 수료증 같은 개념도 없어 중간에 그만두더라도 아까울 일도 없다.


'취업 전까지만 다녀볼까?'


관심이 생겼다. 수강신청을 하려고 포스터를 조금 더 자세히 보다가 대상 요건에서 걸렸다.


'수강 대상 : XX동 거주, 만 34세 이상 65세 미만 여성'


XX동이 아니라 옆 동에 거주한다. 나이도 한 살 차이로 수강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캘리도 배워보고 싶고 무엇보다 정신건강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다.




원래의 나였다면 그냥 포기했을 것이다. 전화를 하는 것부터가 무서운데 심지어 당연히 안 될 요구를 해봐야 하니까 거절당한다는 공포까지 추가다. 하지만 공모전과 이벤트, 체험단 신청 경험으로 이제는 안다. '해보고 안 되면 말지 뭐.'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도하지 않으면 확률은 0%지만 시도하는 순간 1%의 확률이라도 생긴다. 용기를 내야 한다.


전화하는 것은 돈이 드는 일도 아니고 금방 끝난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해보자. 전화로 문의할 스크립트를 만들고 전화번호도 눌렀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용기를 내면 된다. 심호흡 한 번하고 숨 딱 참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친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고 스크립트를 읽었다.


"안녕하세요. 캘리그래피 수업 홍보 포스터 보고 전화드렸는데요. 혹시 XX동 거주하고 만 33세인데 저도 수업 신청 가능할까요?"


또르르르르.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 나의 할 일을 다 했다. 나는 질문했고 이제 바톤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1분 같은 1초가 흐르고 상대방이 대답했다.


"아, 아시다시피 저희가 XX동 주민들을 위한 수업이다 보니 다른 동네 분들은 조금 힘드실 것 같네요."


수화기 너머에서 조금은 곤란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부정적인 대답에 그럼 그렇지. 포기하려던 그때, 상대방이 말을 이었다.


"지금도 신청자가 많긴 한데요. 바로 옆 동이시니 혹시 모집 다 해보고 자리 비면 연락드려볼게요."


됐다! 가능성이라는 티켓이라도 얻었다. 그걸로 되었다. 비록 당장 참여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만족한다. 안 될 것 같은 것이라도 원하는 것을 물어볼 수는 있게 되었고, 가능성이라는 수확도 생겼다. 그렇게 한 뼘 더 성장했다.




며칠 후,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전에 캘리그래피 수업 문의하셨던 전우정님 맞으시지요? 수업 기간이 8주로 좀 긴데 다 나오실 수 있어요?"


순간 여태 구직이 안 됐는데 설마 8주 안에 구직이 되겠나 싶어 그렇다고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다음 주 수요일부터 수업 시작인데요. 10시까지 XX동 행정복지센터 4층 대회의실로 오세요."


그렇게 나는 캘리그래피와 연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 담당 공무원 선생님께서도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한 분이셨는데 같이 수업을 들으시는 분들도 모두 달콤한 솜사탕같으신 분들이셨다. 덕분에 어딘가 뻣뻣하고 어색한 나도 수업에 편하게 참여할 수 있었다.


비록 수업이 끝나도록 구직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 좋은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을 수 있는 시간 덕에 조금은 덜 우울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시도해 보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소중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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