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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Feb 13. 2024

퇴사와 식욕의 상관관계

치앙마이 한달살기. 정확히 35일 살기 하러 와서 벌써 19일 차가 되었다.

그동안 몇 번 글을 써보려 했으나 빈 페이지에서 깜박거리는 커서를 보면서 내일부터 해야지를 열몇 번 정도 반복하다 보니 19일 차가 되어버렸다. 한달살기가 별거냐만은 얼마전 회사 다니던 시절로 되돌아가보면 한달살기는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로망. 그토록 별거였던 일이다. 나는 지금 그 '별것'을 하고 있으니 이곳에서의 순간순간이 소중하고 기록으로 남겨놓아야겠다는 욕심이 자꾸만 생긴다.


한 달 살기 하러 오면서 내가 누구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답을 찾고 싶었었다. 뭔가 한 달 살기도 그냥 하면 안 되고 '나를 찾아서'와 같은 명분을 가져야 할 것만 같은 강박을 그 순간에도 느꼈던 것 같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 질문이 너무 광범위하고 추상적이기도 하고 내 마음대로, 생각대로 정의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 내가 맞는 것인가 싶다.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더 어지러워지는 느낌이다.


다만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것이 힘들었으며 지금이 내 인생의 어떤 단계인지. 새로운 단계라면 어떤 변화를 추구하고 싶은지를 생각하고 있다. 그동안 살아온 삶에 방향을 바꾼다는 것에는 저항이 따를 테니 굳은 마음을 가지는 것. 나를 좀 더 믿으면서 용기를 내보는 것이 필요하기에 좋은 책을 읽고 느린 생각들을 하면서 에너지를 얻고 있는 중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질문과 답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한달살기가 이 정도면 됐지 그 이상 바랄 거면 일년살기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 외에 여기 와서 달라진 것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니 식욕이다. 최근 2-3년간 몸무게가 무려 8kg이 늘었다. 3kg 정도 늘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거 금방 뺄 수 있어.. 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최근 1년간 5kg 정도가 더 늘어난 것이다. 밥먹듯이 야근을 했지만 야식을 많이 먹은 것도 아니었었다. 그냥 꾸준히 뭔가를 먹어댔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쿠팡로켓으로 전날 주문한 핫도그, 주먹밥 같은 것을 전자레인지로 데워 우걱우걱 먹으며 운전했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샌드위치 같은 간단한 아침 식사를 받아와서는 오전 업무 중에 또 먹었다. 점심을 먹고 정확히 3시간 후면 배가 고파졌다. 군것질거리를 찾거나 뭐에 홀린 듯 나가서 라면한 그릇을 먹고 들어오기도 했다.


내 나이 40대 중반인데, 돌도 씹어먹을 나이인 10대처럼 왕성한 식욕을 보이는 내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나는 중, 고등학교 시절 엄청나게 불어난 체중 때문에 설움도 겪어봤고 눈물 나는 다이어트를 통해서 감량을 해봤기 때문에 살찌는 것에 민감했다. 그때 그 체중을 20년 넘게 유지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시도 때도 없이 허기를 느끼고, 주체하지 못하고 뭔가를 자꾸 먹고 살이 찌는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내 몸이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언젠가부터는 매일 올라가던 체중계에도 올라가지 않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희망을 가지고 회충약까지 먹어봤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늘 배가 고픈 것은 회충 때문이 아니었다.


결국, 치앙마이 오기 전 헬스장에서 측정해 본 인바디에서.. 8kg이 증가한 낯선 숫자와 과체중 1단계라는... 내 것이 아닌 남의 성적표를 잘못 전달받은 것 같은 진단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달살기의 목표 중 하나는 꾸준한 운동 및 식사량 조절을 통한 체중 감량과 체력 증진이 되었다.


그동안 위가 많이 늘어났을 텐데 이게 조절이 될까? 더군다나 맛있는 음식을 말도 안 되게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태국으로 한달살기를 하러 간다면서 말이다.


18일 동안 지내면서 신기하게도 배가 더 이상 쓸데없이 고프지 않았다. 공복에 활동한다는 것 자체를 상상할 수 없었던 내가 공복으로 헬스장에 가서 1시간 정도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고, 아침으로 과일과 요거트를 먹는다. 11시(회사 점심시간)가 되면 요동을 치며 난리가 났던 배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고 12시가 넘어도 고요했다. 그리고 느지막이 2시쯤 점심을 먹어도 큰일 나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왜 그렇게 항상 배가 고팠었는지. 그건 식욕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의 허기였다.


더 이상 일에 대해서 재미와 성취감을 못 느꼈고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그냥 흐르던 대로 흘러가는 삶 속에서 내 마음이 점점 텅 비어만 갔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허기짐을 채우려고 자꾸 애꿎은 음식들을 밀어 넣었던 것이었다.


체중 확인을 아직은 못했지만 몸이 약간씩 가벼워지고 있는 느낌이고 가벼워지는 몸처럼 마음도 다행히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다.

머리를 비우고 쉬러 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왜 부담이 없었을까. 한달살기에서조차 뭔가 해야만한다는 강박도 내 체중과 함께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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