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중개사 -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공인중개사.
내가 막 자격증을 받았을 무렵, 아빠가 ‘좋은 자리’를 찾아오셨다.
그곳은 경쟁이 치열한 동네였다. 아파트 단지가 아닌, 개발을 앞둔 흔히 말하는 ‘빌라촌’.
처음 시작하는 내겐 쉽지 않은 자리였다.
부모님 사무실과 멀지는 않았지만,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시작 전부터 아빠의 도움을 받기 어려울 것 같아 걱정됐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나보다 조금 먼저 자격증을 땄던 막내 이모와 함께 시작했다는 점. 하지만 이모 역시 초보였다.
지금은 젊은 공인중개사들도 흔하지만, 그때만 해도 드물었다.
동네 사십여 개 부동산 중 우리는 가장 어린 사장님들이었다.
아파트는 건당 중개료가 크고 공동중개를 해도 이윤이 남지만, 빌라는 달랐다.
매매가 자체가 낮고 전·월세 비중이 높아 수수료도 적었다.
그래서 단독중개를 고집하는 사무소가 많았다.
새로 들어온 부동산은 계약을 따내기 어렵다는 말이 많았다.
우리는 공동중개를 하기 위해 개업 인사를 다니며 눈도장을 찍었다.
그러다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가 들어간 자리는 원래 동네 1등 자리였다고 했다.
능력 있는 욕심쟁이가 들어왔다면 단독중개를 했을 테지만, 우리는 공동중개를 선호했다.
욕심도 없고 경험 없는 신참들이라는 걸 알자, 다른 사장님들은 오히려 안도하는 눈치였다.
친목을 쌓기 위해 지방 야유회까지 따라가며 어울렸고,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이모와 나는 공인중개사 일과는 잘 맞지 않았다.
개인의 이득보다는 손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말 그대로 모범 공인중개사였으니까.
한 번은 미혼모 손님이 월세를 찾으러 왔다.
사정을 듣고 결국 저렴하지만 깨끗한 전셋집을 구해드렸다.
월세 계약만 해도 충분했지만, 굳이 돌아다니며 사서 고생을 한 셈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뿌듯했다.
사무소는 우리에게 직장이 아닌 아지트 같았다.
아빠가 가끔 들러 “너희는 안 되겠다, 자리가 아깝다”라고 하실 정도였다.
말 그대로 늘 적자였다.
개업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부모님의 부동산에서 사건이 하나 터졌다.
외할머니가 입원해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손님의 요청으로 아빠가 대신 계약서에 특약을 적어 준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아빠는 한 번도 계약서에 손을 댄 적이 없었는데, 하필 딱 한 번 남긴 글씨가 단속에 걸려 버렸다.
그 일로 엄마는 자격증을 빼앗겼다.
마침 그 무렵 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일정이 예상보다 빨라지면서, 이제 막 1년 된 사무소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어차피 신혼집이 멀어 출퇴근이 불가능했기에, 결혼 전까지만 이모와 하던 사무소에서 나와 엄마 대신 사무소를 맡기로 했다.
우리 동네였고, 아빠도 가까이 있었으니 든든했다.
이모는 혼자 운영하기 힘들었는지 곧 사무소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새로 들어온 사장님은 능력자였고, 다시 그 동네에서 1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결혼 후 멀어진 나를 대신해 이모가 내 자리를 지켜주었다.
부모님의 부동산 사무소는 몇 달 사이 간판에 이름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일 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자신감을 잃었다.
처음엔 공인중개사의 일이 계약서를 내미는 게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집’은 인생에서 가장 큰 거래였다.
그 무게를 견디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다.
서류만 믿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혹시 문제가 숨어 있지는 않을까 늘 의심이 앞섰다.
꼼꼼하게 챙기다 보니 계약 당사자들만큼이나 스트레스를 받았다.
동안이라는 말이 좋을 때도 있었지만, 중개사로서는 오히려 불신의 시선으로 다가왔다.
물론 계약이 끝난 뒤에는 “어린 사장님인데 꼼꼼하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지만, 그 과정을 버티는 게 늘 힘들었다.
결국 공인중개사라는 직업은 결혼과 함께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더 단단해진 내가 다시 꺼내 들 수 있기를 바랐다.
가끔은 생각한다.
처음부터 법인 사무소에서 경험을 쌓았다면 어땠을까.
결국, 또 남은 건 아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