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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윤 Jun 20. 2020

탐향과 식탐

마음과 몸의 채워지지 않는 공동(空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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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으로 미국에 와서 결혼을 하고 이어진 이민의 삶이 17년째 접어들고 있네요. 전염병의 충격으로 시작된 그 열일곱 번째 해는 일상의 모라토리엄 속에서 벌써 중반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동안 공용 공간들은 공동화되고 사유 공간만 빼곡히 채운 채 밖으로 운신할 수 없는 사람들의 도시의 모습은 생소하고 또 공포스럽기도 했었죠. 그리고 그 공간 체증의 해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최근의 시위와 폭동을 계기로 사람들은 막혔던 혈관이 터진 것처럼 분출되어 거리로 나오고, 공용 공간은 순식간에 다시 채워지게 된 거죠.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공간을 채울 수 없는 욕구불만이란 생각보다 우리 삶에서 비중이 큰 문제일 수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세계에서 바이러스로 인한 사상자가 가장 많은 도시의 근교에 살고 있지만 다행히 교외 지역이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조금 더 허용된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지내 왔습니다. 그러나 실은 격리 기간을 계기로 저희 집 내부적으로도 변화가 조금 있었습니다. 평소 저는 냉장고 가득 음식을 채워 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당장 필요한 재료들만,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도록 비슷한 형태의 용기에 열 맞춰 정돈돼 있는 걸 좋아하는데, 이런 성향은 모계 유전자가 고스란히 전해진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팬데믹 불안 심리가 그런 타고난 성향을 넘어섰던지, 격리가 시작되면서 식료품과 공산품을 좀 많이 넉넉히 사서 쟁여 놓았습니다. 구입해 놓은 음식들이 혹 상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잘 안 사던 통조림들을 종류별로 모조리 사다 놓아서 평소 안 하던 요리도 자주 만들게 되고, 또 하루 종일 집에 있다 보니 입이 자주 심심해져서 간식을 많이 먹게 됐죠. 그러면서 지난 세 달 사이 저와 딸은 눈에 보이게 체중이 늘었습니다. 남편은 본디 신체 질량이 상당한 분이기 때문인지 이번을 계기로 유의미한 몸무게 변화는 다행히 없었습니다.


자택 격리로 사실상 대부분의 국민이 이른바 삼식이가 되었고 주부들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삼시세끼 준비가 일상 최대의 난제였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닌지라 특히 식사를 끝내고 다음 끼를 걱정하게 되는 그 시점이 되면 어김없이 엄마 생각이 나는 거예요. 다음 식사에는 또 뭘 차려야 하는지 그 고민의 끝에는 엄마가 매 끼 만드시던 음식들이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그 수고가 얼마나 큰 거였는지도 새삼 깨달으면서. 문제는 아무리, 어떤 음식을 해도 '그 맛'이 안 난다는 겁니다. 엄마가 된 지 8년인데도 그 '엄마 맛'이 안 나는 거죠.


딸 아들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7, 80년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 남매와 할아버지까지 확대가족의 전형인 대가족에서 자란 저는 다른 이십 대들 보다 조금 더 강한 자취에 대한 로망이 있었습니다. 조금은 이기적인 그 장녀의 로망은 유학을 오게 되면서 실현됐어요. 자취 생활의 가장 큰 부분이라면 혼자만의 공간 꾸미기와 요리 등이었을 테고, 처음 내 주방이란 것을 갖게 되니 스스로 어느 정도 음식 맛을 낼 줄 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부분 역시 엄마에게서 전달된 얼마 안 되는 유전자 중 하나 때문일 거라고 믿고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막내아들인데도 할아버지를 모시기로 했던 아빠 덕에 집은 종가와 같은 분위기였고, 항상 사람으로 북적였습니다. 바쁘신 아빠가 실질적으로 육아에 도움을 주실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 사 남매를 키워낸다는 것만도 힘든 일이셨을 텐데, 엄마는 시아버지까지 모시며 그야말로 네 아이의 독박 육아, 일곱 식구의 독박 살림을 하셨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보다 더 존경스러운 점은 매 끼를 여성 잡지 요리 섹션이나 요즘 인스타그램에 올릴 법한 스타일링으로 정갈하게 차려내셨다는 거예요. 지금처럼 요리마다, 상차림마다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눈으로만, 기억으로만 담아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쉽습니다. 대신 그 맛과 미학에 대한 경험은 제 개인 성장사에 고스란히 쌓여있겠죠.


대가족 살림을 하셔야 하는 엄마가 손이 크지 않고 부지런하셔서 매 끼에 가족들 식사량에 딱 맞춰서 음식을 만드셨고, 남겨지는 법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니 다음 식사는 새로 갓 지은 밥과 요리와 국이나 찌개가 깔끔하게 조리돼서 정갈하게 식탁에 올라와 있었죠. 네 아이를 키우셔야 했는데도 집은 늘 깨끗하게 정돈해 놓으셨고요. 그렇게 당신은 평생을 일을 하시느라 살찔 겨를이 없이 마르신 게 안쓰럽다는 생각을 저는 아이를 낳고 나서야 했네요. 다행히 환갑 즈음부터 홈쇼핑 완조리 식품들의 유혹에 무너지고 마신 엄마는 본인 말씀으로 이전에 비하면 9할은 집안일을 안 하는 것 같다고 하시지만 그 부지런한 성정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죠.


엄마는 항상 조기나 갈치 같은 생선이나 나물 등 할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음식을 신경 써서 준비하셨고, 포기김치를 매주 담아서 제일 적당히 익은 상태로 김치 냉장고 광고에 나올 법한 모양으로 썰어서 내셨습니다. 아빠는 생태찌개를 좋아하셔서 자주 식탁에 올라왔는데, 덕분에 칼칼하고 시원한 맛을 어릴 때부터 알게 됐습니다. 한 밤중에라도 만두가 먹고 싶다고 하시는 날이면 지금처럼 냉동 만두가 많던 시절이 아니니 만두피를 밀고 고기 야채 두부 김치를 넣은 소로 만두를 빚어야 했는데, 언제건 훌륭한 만둣국을 금방 완성해 야식상을 차리기도 하셨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또 간식으로 팥빵, 팥 아이스크림 같은 팥종류를 좋아하셔서 여름이면 얼음 기계를 돌려서 얼음 슬러시를 만들고 팥과 떡, 젤리 같은 고명을 올려서 팥빙수를 자주 만들어먹던 생각도 나고요. 요즘도 여름이면 아빠가 좋아하시는 열무김치는 빼놓지 않고 매주 담그십니다. 두 주만 지나도 신선한 맛이 덜하다는 이유로 김치들은 항상 일 주 일 단을 고수하시는 거죠.


미인이신 데다가 차분하고 선한 성품에 부지런하고 살림까지 완벽에 가까운 엄마를 일컬어 지인분들은 "신사임당"이라고들 하셨어요. 사 남매를 키우면서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시는 걸 본 적이 없다면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혼 43주년이 지난 어느 날 아빠는 “나는 완벽한 여자하고 결혼했다”라고 하시더군요. 저희 남편 입장에서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얘기가 되겠습니다.


기독교 집안이어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 저희 집은 조부모님들의 기일에 추도식을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려본 적은 없지만 아마 제상보다도 다양한 음식들이 차려졌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중에서도 붉은 실채 고명을 올린 부드러운 도미 조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할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명절이면 친척들이 저희 집에 모였고, 하루 전에 종일 동그랑땡이며 전을 한 상 만들어 놓으시면 우리 남매 넷이 밤에 보자기를 들춰내고 하나 둘 집어먹다가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광주리 반은 비어 있었죠. 그래도 미리 해 놓은 음식에 손을 댔다고 혼내시는 법이 없고, 다시 조용히 반죽을 만들고 전을 부치시고 갈비찜을 끓이셨습니다. 설이면 사골 국물을 내고 직접 만든 만두와 고기, 계란, 김 고명으로 예쁘게 모양을 내서 만들어 주시던 떡만둣국을 매 년 나이와 함께 먹었고요. 저는 한국 사람들도 땡스기빙이나 크리스마스를 주로 가족 연휴로 쇠는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한국 명절 날짜만 되면 추석과 설에 먹던 고사리, 도라지나물, 토란국, 전, 갈비찜, 떡만둣국이 늘 떠오릅니다.


중고등학생 때는 특이하게도 톡 쏘는 새콤함과 꼬들한 식감 때문에 해파리냉채를 좋아했는데, 오이, 맛살 넣고 직접 고추냉이 소스를 만들어서 이삼일에 한 번은 꼭 냉채를 만들어 주셨던 기억도 나네요. 오이소박이, 꼬막 무침, 깻잎 김치 같은 손이 많이 가는 반찬도 늘 정갈하게 만들어 내시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그 모든 음식 중에서도 제게 타향살이 중 엄마가 가장 생각나게 하는 음식을 고르라면 바로 '나박김치'입니다. 요구르트 같은 상큼함, 잘 익은 칼칼한 국물 향, 시원한 무와 배추, 향과 색을 내는 꽃무늬 당근과 미나리. 너무 세련된 조합 아닌가요. 세련됐는데 뭔가 매우 고향스러운 맛. 저한테는 나박김치가 그런 느낌입니다. 엄마는 그 나박김치를 미관(美觀)상 아름답게, 또 미각(味覺)상으로 너무나 맛있게 담그십니다. 이틀을 익힌 엄마 나박김치만 있으면 그 한 가지로 몇 달은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제가 담으면 절대 그 맛이 안 난다는 게 함정이죠. 작년 여름 엄마가 저희 집에 오셨다가 한국에 들어가시기 전에 여러가지 김치를 담아서 냉장고 가득 채워놓고 가셨습니다. 공항에 배웅해 드리고 집으로 와서 담아 놓으신 나박김치 통을 열어 놓고는 먹지는 못하고 보면서 한참을 울었던 적이 있네요.


저의 한국에 대한 향수와 맞물리는 의외의 음식이 또 있습니다. 조용하고 정적이신 엄마와 달리 외할머니는 목소리로 주변 공기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화통한 성격의 소유자이신데, 음식 솜씨 역시 엄마와 정반대이십니다. 조용한 성격에 선비 같은 철도 공무원이셨던 외할아버지 대신 소를 몰고 장에 내다 파는 것 같은 집안 중대사 외조는 꼭 할머님이 하셨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그런데 요리에는 바깥일만큼 솜씨가 없으셔서 성품 인자하신 할아버지도 매 번 맛이 없다고 타박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외할머니가 외가에 놀러 가면 해 주시던 음식 중에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이 바로 당신께서 총떡이라고 부르시는 메밀전병입니다. 메밀로 반죽해서 거무스름한 전병을 얇게 부치고 안에 익은 김치, 무채, 고기를 넣고 접어 부쳐 주시던 그 투박한 맛이 왜 그렇게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맛집에서 곱창 구이를 먹으며 아빠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거 먹으러 다시 이민 와야겠다." 저를 너무 잘 아시는 아빠는 '혹시나 실행에 옮기지 않을까' 속생각을 하시는 듯 난감한 표정이셨죠. 저는 구운 곱창이든, 곱창전골이든, 소든 돼지든 곱창 음식은 뭐든 좋아합니다. 곱창전골은 소곱창 속 곱이 전골 국물과 어우러져서 독특한 국물 맛을 내잖아요. 또 그 국물을 묘하게 칼칼하게 잘 만드는 식당들이 있죠. 마지막에 쑥갓을 올려서 끓이면 기가 막힌 맛이 완성됩니다. 또 반드시 우동 사리를 넣어야 하는데, 이 곳 한인타운의 한식집에서 곱창전골을 시켰다가 라면 사리를 넣어 나와서 속이 상했던 적이 있네요. 곱창 구이 역시 안타깝게도 한국처럼 통통하고 곱이 많은 싱싱한 곱창을 파는 곳이 거의 없어서 아쉽기도 합니다.


곱창만큼이나 설렁탕, 육개장, 선지 해장국, 콩나물 해장국, 우거지 갈비탕, 뼈다귀 감자탕, 해물탕, 지리 같은 탕 종류도 너무나 좋아합니다. 어렸을 적 큰 고모부가 운영하시던 음식점에 놀러 가면 항상 “설렁탕 먹을 줄 알아?” "곱창전골 먹을 줄 알아?"라고 놀림 반으로 물어보시는 게 취미셨어요. 그럼 대여섯 살 배기 곱슬머리 여자 아이는 벌겋고 큼직한 깍두기에 뜨거운 설렁탕이나 얼큰한 곱창전골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먹는 거죠. 숟가락 젓가락으로 먹으면 되는 거지 왜 먹을 줄 아냐고 물어보실까 의아해하면서. 사실 그 질문은 “니가 탕 맛을 알어?”로 해석해야 되는 은유적인 심화 질문이었던 거죠. 저는 그 탕맛을 아는 아이였던 겁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이역만리 외지에 살아도 가을 찬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얼큰한 국물을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어떤 개인적인 불문율 같은 게 있으니까요.  


사실 5년 전쯤 아이와 한국에 오래 머문 시기가 있었는데, 위험한 고비를 넘던 우울증으로 미감이 상실됐던 때였습니다. 호르몬 질환과 함께 찾아와 오래 앓던 우울증이 출산 이후로 심해졌고, 치료로도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요양차 부모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였어요. 부정적 감정을 조절할 수 없게 되고 어느 날부터 말이 떠오르지 않고 조금씩 더듬기도 하고, 방금 들었던 말, 방금 전에 했던 행동들이 까맣게 기억이 안 나기 시작했고,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낄 수 없고 무감했습니다. 저에게는 향수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엄마의 음식인데, 처음에는 너무 먹고 싶었던 엄마 밥이 먹으면 무미로 느껴지는 거예요. 너무 좋은데 그 맛을 잘 느낄 수 없었죠. 그런데 맛을 못 느끼겠는데도 해 주시는 음식을 자꾸 입에 넣고 과하게 먹게 되는 거예요. 미국으로 다시 가기 전에 엄마가 해주시는 음식을 조금이라도 더 저장해 넣고 싶어 욱여넣었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지만, 그렇게 몸에 담아놓기라도 하면, 다시 살아갈 힘이 소진되었을 때 찾아 쓸 힘을 얻을 수 있겠다는 황당한 믿음이 발로한 어떤 상징적인 행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아픈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를 위해서는 어떻게든 최선의 상황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치료로 나아지지 않던 증상들은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긴 시간 동안 조금씩 정상의 모습을 회복했습니다. 그때의 회복의 힘으로, 부서진 나머지 부분은 다시 먼 곳에서 풀을 개고 빚고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물 위에 부유하는 집을 짓고 사는 것 같은 오랜 이민 생활에서 많은 것에 지쳐있던 저에게 그 시간은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내 집'에 있다는 안도감을 줬던 것 같아요. 어제 장나라 씨가 주인공인 드라마를 보는데 '돌아갈 곳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버틸 수 있다.'라는 대사가 나오더군요. 그리워할 곳이 있어서, 그 돌아갈 곳을 바닥으로 딛고 다시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딸을 안쓰러워하는 마음과,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사랑으로 손녀를 돌봐주셨던 부모님 덕분에 저는 다시 일상을 이어가고, 더 나은 삶에 대한 바람을 가져보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네요. 무엇보다 미각이 회복됐고, 더불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맛볼 수 있는데 대한 감사도 회복하게 됐습니다.  


환경이 바뀌게 되면 사람의 성향 중 입맛이 가장 늦게 바뀐다는 연구결과가 있다고 합니다. 제가 이민생활 십 수년이 지나도 한국 음식을 주로 먹게 되는 완고한 입맛을 간직한 이유를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비슷하게 흉내를 낸 것 같은 맛을 계속 먹다 보니 진짜 한국에서 먹던 맛을 자꾸 더 그리워하게 되는가 봅니다. 미국에도 웬만한 한식 식재료가 구비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한국에서가 아니면 먹을 수 없는 것들이 많고, 한국 음식점에서 사 먹더라도 제대로 맛을 내는 곳도 드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방문할 계획이 잡히면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를 생각날 때마다 적어 놓기도 했습니다.


족발 매운 갈비찜 양념갈비 평양냉면 함흥냉면 숯불 닭갈비 수육 떡갈비 해물찜 아귀찜 해물탕 아귀탕 회 물회 산 낙지 호롱구이 탕탕이 연포탕 꼬막 비빔밥 짜장면 차돌박이 짬뽕 차돌박이 된장찌개 청국장 제육볶음 불닭 찜닭 갈치회 갈치구이 손두부 메밀전병 곱창구이 곱창전골 칼국수 김치말이 국수 막국수 만둣국 뼈다귀 해장국 선지 해장국 콩나물 해장국 경양식집 돈가스 파전 떡볶이 납작 만두 길거리 어묵 튀김 김말이 피순대 오징어순대...


미국에 있는 한국 음식점에서는 여러 종류의 음식을 한 식당에서 다 같이 파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음식점 수가 아무래도 제한적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 한국처럼 주력 메뉴가 있는 전문 식당이나 맛집 같은 맛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식재료 역시 한국에서 사용하는 것과 원산지나 종류가 틀린 경우가 많으니 한국에서 먹던 그 맛을 기대하기 어렵겠죠. 하지만 한국 음식을 접할 수는 있는데도 기본적으로 항상 그리워하게 되는 진짜 이유는 어쩌면 음식이란 먹는 곳과 맛이 함께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인 듯합니다. 타국에서는 어떤 한식을 먹어도 100퍼센트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그 어떤 공동(空洞)의 부분이 늘 느껴지는 이유 말입니다.


요즘은 어떤 매체든 요리와 먹방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요리나 음식 사진, 동영상으로 한국에 대한 탐향과 한국 음식에 대한 탐심을 일정 부분 달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곳’과 ‘그 맛’을 동시에 함께 향유할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그래서 늘 그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을 어쩔 수 없이 간직한 채 살아야 하는 것은 거창하지만 이민자의 숙명이겠죠. 원래의 곳에서 진짜 맛을 경험할 수 없다는 욕구불만이 그리움이라는 마음의 허기로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겠고요.


언젠가 바이러스의 위험이 사라지고 편하게 여행할 수 있게 되어 한국을 방문할 때는 꼭 가족들과 함께 음식 기행을 떠나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제주에서 부산 광주 속초 서울 인천 맛집들까지 섭렵하는 맛집 여행. 그리고 그 마지막 코스는 엄마가 담아 주시는 나박김치와 집밥으로 마무리하면 금상첨화가 되겠네요. 그 '밥심'으로 다시 긴 타향의 삶을 살아내 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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