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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Sep 28. 2023

부처스 크로싱 Butcher's Crossing

도살자의 건널목에서 산산히 부서진 조각을 줍다

알라딘 북펀딩에 참여해 존 윌리엄스의 <부처스 크로싱>을 받았다. 우연히 발견한 펀딩에 참여한 이유는 단연 <스토너>의 작가였기 때문이다. 단정하고 고요해 보이는 문장에 꽉꽉 들어찬 밀도와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던 책. 여기저기 선물도 많이 했다. 그런데 <스토너>.. 너무 유명해져서 어디서 인생 책이라고 말하기가 조금 멋쩍어져 버렸다..


한창 회사 일에 치여 정신없을 때 받은 터라, 한동안 책장에 깊숙이 박아두었다. 바쁜 일이 끝나고 연휴도 앞두고 있겠다, 가볍게 집어 든 <부처스 크로싱>. 약 2주에 걸쳐 오늘 완독 했다. 책을 읽는 내내, 마치 선명한 영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사실 몇몇 부분은 실제로 나 자신이 화자가 서 있는 공간에 그대로 서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세밀하고 구체적인 묘사가 탁월했다.


하버드대 대학생인 윌 앤드루스는 도시 생활에 대한 염증과 자연에 대한 동경으로 안락한 생활을 뒤로 하고 황량한 서부 도시 '부처스 크로싱'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사냥을 계획하고 있던 사냥꾼 밀러, 찰리, 그리고 들소 가죽을 벗기는 프레드 슈나이더를 만나 들소의 은신처로 떠난다.


일견 전형적인 영웅의 모험 서사처럼 보이는 줄거리지만, 화자인 윌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은 얼마나 나약하고 어리석은지, 동시에 자연은 얼마나 숭고하고 무심한 존재인지 느낄 수 있었다. 자연에 대한 열망과 매끈한 젊음으로 빛나던 윌은, 들소 사냥-학살을 죽을힘을 다해 마치고 부처스 크로싱으로 돌아와, 자신이 다시는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프랜신은 윌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돌아오겠죠. 하지만 그때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예요. 젊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졌겠죠.")


들소 떼의 은밀하고 평온한 은신처가 밀러의 규칙적인 총소리로 인해 들소의 무덤이 됐던 날. 윌은 슈나이더의 도움을 받아 들소의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제거하는 일을 맡는다. 그리고 까만 눈을 채 감지 못한 어린 들소의 내장과 피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뒷걸음질 친다.


들소에게서 도망친 이유는 피와 악취, 흘러나오는 내장에 욕지기를 느껴서가 아니었다. 겨우 조금 전만 해도 당당하고 고귀하며 생명의 위엄으로 가득했던 존재가 이제 속절없이 가죽이 완전히 벗겨진 채 죽은 고깃덩이가 되어, 존재 자체 또는 그 존재에 대한 앤드루스의 개념을 완전히 빼앗긴 채 기괴하게 조롱하듯 눈앞에 걸렸기 때문에 구역질이 나서 도망쳤다. 그것은 들소 자신도, 앤드루스가 상상했던 들소도 아니었다. 그 들소는 살해당했다. 앤드루스는 그 살해를 통해 자기 안에 있던 무언가가 파괴되는 걸 느꼈다. 그걸 마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그들이 죽인 수천 마리의 들소들이 둥그런 검은 무덤을 만들었고, 밀러는 학살에 완전히 매료된 독재자처럼 계곡을 누빈다. 떠날 때가 되었음에도 욕심을 부린 탓에 겨울과 눈보라가 그들에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아이러니하게도 혹독한 대자연의 겨울을 견디게 해준 것은 그들이 무참히 살해한 들소였다. 그들은 들소 가죽으로 대피소, 방한 옷, 침낭을 만들어 긴 추위를 버틴다. 자연은 심판하지 않는다. 살리지도, 죽이지도 않는다. 자연 안에서 욕심을 부리고 살생을 일삼는 것은 인간뿐이다.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싶은가? 그리고 이토록 모호했는데도 욕망은 그의 내부에 날카롭고 고통스럽게 남았다."


결국 그들은 동료도, 들소 가죽도, 혹은 윌이 원했던 "상상 속 불변의 자아"도 모두 잃은 채 부처스 크로싱으로 돌아온다. (윌, 밀러, 찰리, 슈나이더 네 사람 모두 생생히 살아있는 캐릭터로 느껴졌는데, 슈나이더가 강물에 빠져 죽을 때 정말 안타까웠다. 포악하고 퉁명스러운 캐릭터이긴 해도 네 사람 중에 가장 인간적으로 느껴졌는데.) 활기로 북적이던 마을은 뜨거운 태양 아래 겨우 숨만 붙어 있는 폐허가 되어 있었으며, 특상품으로 취급되었던 들소 가죽은 시장의 원리에 따라 가격이 폭락했다. 이미 부서질 대로 부서진 세 사람이었지만, 도살자의 건널목에서 그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완전히 황폐해진다. 산산조각 나버린다.


<스토너>가 고요히 침잠하는 명상록 같다면, <부처스 크로싱>은 곧 폭발할 것만 같은 다이너마이트 같다. 읽는 내내 긴장으로 두근거리고, 기대로 성급해지기도 했다. 오랜만에 멋진 소설을 읽었고, 이것이 존 윌리엄스라는 탁월한 작가, 그리고 장편 소설의 묵직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발췌 문장 출처: <부처스 크로싱>(구픽) 존 윌리엄스 작, 정세윤 옮김



덧붙임1 영화도 있네! 한국에 개봉 안하나..? 밀러 역의 니콜라스 케이지! 잘 어울린다. <레버넌트> 같으려나.

https://www.imdb.com/title/tt1462759/



덧붙임2 책 읽으며 들었던 음악들. BGM은 과몰입을 도와줍니다.

Foreign Tongue - Alela Diane

https://youtu.be/xcjJAZwBiN8?si=ApIGOR7O6pPe6cYT

The West Wind - Ryley Walker

https://youtu.be/aSdhyGVqWnY?si=99LbBAvvvgYgOiGB

Oak Path - Six Organs of Admittanc

https://youtu.be/0Wxm1c3hd_o?si=taMhqU7DJeAbCx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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