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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Mar 23. 2020

n번방과 올드미디어의 오만


n번방의 존재를 최초로 알린건 기성언론이 아니다. '추적단 불꽃'이란 이름의 대학생 2명이 발굴했다. 수많은 시간을 투자해가며 직접 부딪쳤고, 역겨운 이들의 만행을 수면위로 끄집어냈다. 도제식 교육의 결과가 아니고, '이러면 안되는 것 아닌가'하는 근본적 문제 의식에서 시작된 취재였다.


추적단 불꽃의 대학생 A씨와 B씨는 지난해 7월 텔레그램 N번방 취재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은 한 달 동안 취재한 결과물을 뉴스통신진흥회 '제1회 탐사 심층 르포취재물 공모 시상식'에 출품해 최고상을 받았다. 이들 기사는 지난해 9월 2일 공개됐다. C 언론은 이 기사를 지난해 말 보도했고, D 언론은 최근 4차례에 걸쳐 n번방 추적기를 연재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경찰을 넘어 대통령까지 엄단 지시를 내렸다. 올드미디어가 사안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증폭시키긴 했으나 제일 먼저 사건을 발굴한 것은 대학생 2명이 맞다. 그러니 기성언론이 '우리가 최초 보도했다'고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적어도 추적단 불꽃을 먼저 언급하는게 예의다.


추적단 불꽃의 취재기는 눈물겹다. 끈기와 인내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들은 뉴스통신진흥회 공모전이 뜨자 디지털 성범죄로 아이템을 잡고 자료를 수집했다. 그 도중에 한 AV 사이트에서 텔레그램 링크를 발견했다. 경찰에 신고했고 증거수집을 하며 계속 취재를 했다. 매일 5시간 이상 텔레그램을 보면서 지옥같은 영상과 조롱, 쓰레기들의 만행을 모았다. 추적단은 공모전 기사를 출품하고 나서도 계속 탤레그램에 접속했다. 이들을 발본색원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이렇게 적극적이고 끈질기게 취재할 수 있었던 것은 '남의 일 같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n번방 피해자들이 꼭 자신들의 지인같았고, 남의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고 한다. 취재를 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같은 여성으로서 있어서는 안될 일을 끝까지 파내고 싶었단다. 이들은 언론사에 합격해 수습교육을 받은 정식 기자는 아니다. 그러나 사회를 위한 사명감, 확신, 공감 등 좋은 기자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어쩌면 나도 그렇겠지만 놀고 먹는 기자가 넘쳐나고 언론같지 않은 언론이 팽배하는 이때 때묻지 않은 열정의 대학생들이 많은 기성 기자들보다 훨씬 더 사회를 위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꽃은 기사에 쓴 단어 하나하나까지 고민했다. 음란물이 아니고 성착취물이라는 단어를 써야 했다며 아쉽다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기사를 그냥 쓰는게 아니고 그 영향까지 고민하는 모습, 우리 대부분의 기성 기자들은 이렇게 기사를 쓰고 있는가. 


덧. 추적단 불꽃이 오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잘못된 n번방 관련 정보를 바로잡는 영상을 게재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CaMQxfjQg 많이 들러서 응원해주시라.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모토의 오마이뉴스가 창간되고, 인터넷의 발달로 언론보다 시민들이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게 사안을 파악할 수 있는 지금이건만 우리 올드미디어는 아직도 이상한 우월감과 오만에 빠져있다. 대학생 시절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논술대회에서 상을 탔는데 뒷풀이 자리에서 당시 한국일보 논설위원실 아저씨가 이렇게 말했다. "글을 좋은데 대학생이 쓴 걸 신문에 싣기에는 좀 그래서.. 지면은 엄숙해야 하거든." 이후 그분의 글을 유심히 보았는데 너무나 재미가 없었다. 큰 담론을 다루는데 당췌 와닿지가 않았다. 한 언론사에서 인턴을 할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너희에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을 수차례 들었다.  


수습교육을 받고, 숙련된 기자만이 좋은 기사를 발굴하고 써낼 수 있다는 오만은 90년때까지나 통했다. 출입처 인원이 제한되고, 일부 메이저 언론들이 서로 호형호제하며 정보를 독식하던 시절이다. 기자들이 경찰서에 들어가 잡혀온 범죄자의 죄목을 듣고 머리통을 때렸다는 둥의 얘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그 꼰대 마인드가 아직도 내려오고 있어서, 조그마한 매체의 기사 혹은 정식 기자가 아닌 인턴이나 대학생 기자가 쓴 기사라고 하면 일단은 무시하고 본다. 핵심 정보에 도달하지 못했을 거라는 과도한 확신 탓이다. 기성 언론이 틀릴 수 있다, 올드미디어가 세상을 잘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꾸 대다수 국민이 별 관심이 없는 그들만의 시각에 매몰되고 국민정서와 괴리된 요상한 기사들이 쏟아지는 것이다. 조금만 문턱을 낮추고 코를 내린다면 기자보다 더 기자스러운 이들과의 훌륭한 콜라보가 가능할 터인데도.


디지털로의 변화라는 물리적 요소 말고도 올드미디어는 아예 그 생태계를 바꿔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첫걸음은 내가 기자다, 나만이 세상을 꿰뚫어 볼수 있다는 오만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 그 오만은 기자로서의 자존심, 언론 종사자로서의 자긍심과는 또 결이 다른 얘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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