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집 청소를 하다 책장에서 빨간 표지의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7년 전 기자 시험을 준비하며 써 내려간 논술 모음집이다. ‘공직자에게 능력과 도덕성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류의 주제를 두고 내 설익은 상념이 가득했다. 웃으며 넘기다 한 페이지에서 멈춰 섰다. ‘정말, 기자가 되고 싶다’는 아홉 음절의 다짐이 새까맣게 적혀 있었다. A신문 최종면접에서 떨어진 날 꾹꾹 눌러 쓴 거다. 지금 보면 부끄럽지만, 당시에는 진심이었다.
내 꿈은 기자였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평소 좋아하는 글쓰기로 생계가 가능하고,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 공부하는 직업. 딱, 기자였다. 내 기사로 부조리가 사라지고, 악법이 바뀌어 조금이나마 세상이 달라진다면 단순히 월급 받아 먹고사는 이상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뿌듯했다. 형편이 어려워 치료를 받지 못하던 희귀병 학생의 사례가 지면에 소개된 이후 ‘적은 돈이라도 돕고 싶다’는 온정이 쏟아졌다. 기사가 나가자 관행으로만 존재하던 ‘상가 권리금’이 명문화됐고, 상인들이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게 됐다. 선배들은 항상 책임감을 갖고 일하라 가르쳤다. 내가 손에 쥔 펜이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했다. 우리 미래에 대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이 직업이 퍽 자랑스러웠다.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세월호 참사 때다. 팽목항을 바라보며 슬픔에 빠진 유족에게 ‘얼마나 마음이 아프세요. 근데 아드님은 어떤 분이었나요’라고 묻는 게 2년차 병아리 기자의 임무였다. 하기 싫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비치기 싫었다.
그러나 현장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분위기를 전달하고, 유족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으며, 정부의 무능이 도를 넘었다는 내용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면서도 버틴 건 내 짧은 기사가 상처받은 이에게 힘이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당시 현장을 누비던 젊은 기자 모두 똑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진도 체육관에서 육성으로 들었던 ‘기레기’란 말은 그래서 더 충격이었다. 세월호 이후 일상 곳곳에서 기레기란 용어가 터져 나왔다. 택시기사부터 취재하다 만난 초등학생까지 내게 물었다. “요즘 기자들은 다 기레기 아니에요?” 대답을 피했다. 여론은 성났고, 동료와 선배들은 하나둘씩 업계를 떠났다. 한 타사 선배의 말은 가슴을 쳤다. “낮은 연봉이나 밥 먹듯 하는 주말 근무도 난 괜찮아. 근데 기자로서의 진심이 부정당하는 건 못 참겠더라고.” 그들을 설득할 수 없었고, 나는 남았다. 대통령 방중 이후에는 맞아도 싼, 나라 망치는 존재로까지 전락했다. 내가 그렸던 기자는 결코 이런 게 아니었다.
독자의 분노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 소수의 매체로 구성된 카르텔이 낳은 ‘갑질’ 문화 때문일 수 있다. 대기업 사장에게 자녀의 취업을 청탁할 만큼 만연한 기업 혹은 권력과의 유착도 문제다. 대중을 무시하고, 가르치려 드는 오만한 태도는 ‘기자 양반’이라는 조롱을 낳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얄팍한 옛날 지식에 사로잡혀 안주하는 모습도 여전하다.
선배들의 탓으로만 돌리고 싶진 않다. 아무리 초짜라도 업계에 발을 들인 이상 반성할 사안이다. 너무나 간절했던 기자라는 직업을 계속하면서 살고 싶은 내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명색이 기자인데 이래도 되느냐’는 비판에 담긴 사회적 요구와 기대가 무엇인지, 어떤 기사가 사회를 위해 필요한 기사인지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다만 아무리 도덕성으로 무장한 정부라 해도 칭찬만 늘어놓는 게 좋은 언론은 아닐 터다. 여론의 지적을 살피면서도 중심을 잡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보수 정권 때는 조용하다 현 정권에서만 난리냐’는 비이성적 비판까지 수용할 수는 없다. 최순실 사태 관련해 특종을 했던 언론이 현 정부 관련 의혹을 보도하자 바로 언론적폐로 지탄받는 현실까지 싸잡아 반성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문빠’와 ‘적폐세력’이라는 날선 언어 사이에서 사실에 근거한 기사로 균형감을 유지하는 게 언론의 역할일 게다.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 기술 발달로 신문을 포함한 올드 미디어의 존폐가 오르내리는 지금, 언론혐오가 겹쳐 기자와 매체가 설 자리가 더 좁아지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언론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때일지도…. 성찰하되, 사실 앞에 겸손할 것. 수습 시절 귀가 따갑게 들었던 그 말을 다시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