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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Nov 26. 2019

내가 신문(기자)을 사랑하는 이유


엊그제 경향신문 1면을 보다가 눈물이 났다. 나랑 비슷한 사람이 많았다. 김훈 선생이 경향신문의 최근 기획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를 읽고 느낀바를 적은 기고였다. 김훈 선생의 아이고 한마디에 울컥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이 시간 어느 산업현장에선 안전사고가 났다. 사람이 죽고, 다치지만 달라지지 않는다. 일부가 정부의 부동산정책을 비판하며 집값 떨어진다고 걱정할 때, 그 집을 짓는 인부들은 공사일자에 맞추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 뛰다가 죽는다. 학교 시절 괴담같은 이야기지만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팩트다. 경향신문의 기획 기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여러 오피니언 리더들이 경향의 기사와 김훈 선생의 기고를 봤다. 큰 변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루하루 살기 바빠 주변을 돌아볼 수 없는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끌고 위정자들에게 '이런 문제도 있구나'하는 자각을 주는 것, 그것이 신문의 역할이라 본다. 많은 시간과 노력과 공을 들인 좋은 기사다.



나는 이런 기사들을 목도할 때마다 신문기자가 되길 너무 잘했다고 생각한다. 방송이나 통신, 인터넷과 영상 기자를 폄하하는 게 아니다. 나에게 맞는 매체가 신문인 거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냥 글이 아니고 사회와 관련된 글을 쓰는 직업이 하고 싶었다. 너도나도 신문이 망해간다고 한다. 부모님도 "언제 신문이 사라질지 모르는데 방송기자쪽은 어떻겠느냐"고 권하기도 했다. 이제 7년간 신문기자로 일해보니 확신이 생겼다. 신문은 향후 20년 이상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수익구조 다변화와 참신한 기사 발굴 등이 이어져야겠지만 신문이 사라지면 우리사회의 이슈 메이킹도 상당수 없어질 것이다. 


신문 1면이 주는 울림과 비중이 아직도 크고 공고하다. 통신, 방송기자들도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조간을 체크한다. 조선일보와 한겨레가 어떤 걸 1면에 썼는지 궁금해한다. 빳빳한 종이가 주는 안정감과 넘기며 읽는 맛, '왜 이 신문은 이걸 1면에 넣었을까' 따져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 오피니언리더들은 아직도 신문을 본다. 모든 신문을 꼼꼼히 읽진 못하겠지만 하다못해 밑의 직원들이 스크랩해준 신문기사를 꼼꼼히 본다. 공직자, 국회의원, CEO 등도 마찬가지다. 아마 일부 신문이 일궈냈던 민주주의와 비리 폭로, 사회를 바꾼 기사를 곱씹으며 신문이 아직도 힘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팔불출이지만, 그래도 이런 정신승리라도 있어야 신문기자로 버티며 살수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난 신문이 좋다.


대학생때도 난 생각이 비슷했다. 방송과 통신기자는 아예 생각이 없었다. 언론진흥재단이 주최한 제1회 신문논술대회에 참가했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설파했다. 한번 남겨본다.





누구나 어릴 적 ‘아기돼지 삼형제’라는 동화를 들어본 경험이 있을 터다. 첫째와 둘째는 게 으름을 부리다 부실한 재료로 집을 만든다. 반면 셋째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벽돌로 튼튼한 집을 짓는다. 어느 날 늑대가 그들을 습격했을 때, 첫째 와 둘째의 보금자리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셋째의 벽돌집만 무사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간단해 보이 는 이 우화 속에는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자세, 견고한 내공쌓기가 생 존을 보장한다는 기본적 진리가 바로 그것이다. 


미디어 2.0의 시대, 양질의 정보를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소유하는지가 성공과 생존으로 직결되는 사회가 되었다. 빠르게 발전하는 세계 정세에 적응 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는 정보의 전쟁터에서 하루하루 숨가쁜 전투를 치 르고 있는 셈이다. TV를 보며 비주얼적인 영상정보 를 얻고, 인터넷으로 실시간 뉴스와 단편적 정보를 획득하며, 신문을 공부함으로써 보다 깊고 체계적 인 지식을 습득한다. 정보의 통로이자 사회적 젖줄 인 이 세 가지 매체는 개인에게 ‘정보 공황’의 늑대 와 싸울 힘을 준다는 점에서 ‘미디어 삼형제’라 부 를 수 있을 것이다. 


TV는 현란하다. 영남지방의 홍수피해 현장에서 부터 2+2 외교·국방장관 회담을 위해 방한한 클린 턴 미 국무장관까지, 세계 도처의 풍경과 인물들을 시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TV는 2차적 지 식을 전달하지는 못한다.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영상들은 시청자에게 현장감과 생동감을 전해줄 뿐이다. 6·2 지방선거를 통해 변화될 한국의 미래상보다 는 선거결과 보도에만 급급하다. 전문가들의 깊이 있는 논평도 찾아보기 힘들다. 현상 자체를 다루는 황홀경인 TV에게 ‘바보상자’라는 불명예스러운 호 칭이 붙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터넷은 쉽고 편하다. 산골벽지에도 LAN선이 보급되어 어디에서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 지 하철에서 무선 인터넷으로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관람하는 것이 가능하다. 포 털사이트에는 최신 뉴스가 즉각 올라오고, 누리꾼 들도 바로바로 댓글을 통해 의견을 개진한다. 속보 성과 편리함이 인터넷의 최대 장점인 셈이다. 신문이 인터넷과 TV의 단점 보완 그러나 인터넷은 동시에 정보의 홍수를 초래하기도 한다. 너무나 많은 정보가 넘치는 곳이 사이버공간 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필요 없는 유해 정보들, 하루 가 멀다 하고 쌓이는 스팸메일들 속에서 양질의 정 보 선별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여과의 과정에 필요한 시간적, 정신적 낭비는 인터넷이 넘어야할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신문은 TV와 인터넷의 단점을 보완하는 매체다. 기자와 데스크를 통해 걸러진 믿을 수 있는 정보가 실리고, 현상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와 토론, 인 터뷰가 이루어진다. TV만큼은 아니지만 사진을 통 해 현장감을 부여하고, 거의 매일 발행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새로운 뉴스도 포함하고 있다. 신문을 통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도 접 할 수 있고, 여과된 지식들은 자기 계발에도 큰 도 움이 된다. 신문은 공부하고 체화하는 미디어 신문은 TV처럼 보거나 인터넷처럼 읽는 것이라기 보다, 공부하고 체화하는 미디어다. 정독하는 데 시 간이 비교적 오래 걸리고, 찾아서 봐야 한다는 점에 서 개인의 수고가 필요하다. 최근 신문이 위기라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까닭도 대중이 사유와 반추의 수고를 피해 수동적인 수용자의 자세를 견지하기 때문일 터다. 


사회가 더욱더 발전할수록 개인을 공격하는 정보의 늑대들은 늘어날 것이다. 조금 수고스럽더라 도 주체적인 자세로 신문을 공부하면서 세상의 흐 름과 최근 사회의 화두들을 짚어가야 한다. 차분한 세상읽기로 탄탄한 정보내공을 쌓아가야 한다. 또 한 첫째와 둘째가 셋째의 집으로 피신 와서 함께했 던 것처럼 신문의 미약한 부분을 TV와 인터넷을 통 해 보완하려는 포용성이 절실하다. 신문 공부를 통 한 개인의 사회적 자리 찾기와 이에 더해진 TV와 인 터넷, 즉 ‘미디어 삼형제’의 효과적 조합이야말로 개 인의 발전을 넘어 정보 사회에서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어린 치기에 쓴 글이라 오바가 없지 않다. 특히 안주하려는 기자들의 무능함을 꼽지 않고, 공부안하는 대중을 책망한 것은 비약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모전에 글을 낼때와 지금이나 생각은 똑같다.


매일 발제한 기사가 갑자기 1면에 잡혔다고 데스크에게서 지시가 오면 긴장하게 된다. 신문의 1면은 신문의 얼굴이다. 우리는 오늘 이 기사로 내일 장사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니 1면에는 대개 단독 기사나 의미있는 기획기사가 올라간다. 8매짜리 기사 쓰는데 몇시간이 걸린다. 팩트는 틀린것이 없나, 문장과 표현에는 비약과 비문이 없는지 다시 보게된다. 성완종 사태 때는 모든 신문이 각자 취재한 내용을 1면에 배치했다. 그러니 싸움이 된다. 누가 맞고 누가 틀리는지, 누가 더 얘기되는 기사를 썼는지가 신문 1면을 통해 바로바로 드러난다. 


모 방송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을때 거절한 이유도 신문이 좋아서였다. 연봉이 1.5배 넘게 뛰는 자리였지만 별로 탐나지가 않았다. 방송은 방송대로 그림 구하고 자막 치고, 기사 읽느라 너무나 바쁘고 힘들다. 내가 할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다. 통신기자도 하루가 고되다. 출입처의 모든 기사를 다 써야하고, 빠르게 출고해야 되기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신문은 통신보다는 느리다. 방송보다도 느리다(전날 저녁에 방송이 이미 나가기 때문에). 그러니 깊이 있게 써야한다. 


스트레이트를 빨리 보내는 통신 뿐 아니라 그림으로 시선을 끌고 영향력이 높은 방송과 싸우려면 남들과 다르게, 남들이 안쓰는 방식으로 써야한다. 그러려면 전화라도 한번 더 돌리게 되고 뻗치기(취재원 사무실앞에서 기다리는 방식)도 해야한다. 방송처럼 1분 30초 분량이 아니고 통신처럼 분량 제한이 없는 것도 아니다. 원고지 8매 안에 내가 주장하는 바를 뒷받침하는 논거를 넣고, 반론까지 박아야 한다. 정제된 문체와 정확한 필력이 절실하다. 마감을 딱 끝냈을 때의 성취감과 해소감이 하루하루를 살게 하는 비결이다. 


사설과 논설도 그렇다. 신문 사설은 그날의 이슈 3개에 대한 신문의 생각을 보여주는 창이다. 칼럼도 현안에 대한 교수나 전문가 등 오피니언 리더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오히려 정치권도 일반 기사보다 칼럼을 많이 본다고 들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우리 후배들 혹은 미래의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다. 신문기자 곧 망하는 직업 절대 아니다. 기자로 들어와서 배운 정보획득법은 향후 기업이나 공직, 학계로 가더라도 매우 유용히 쓰인다. 또 단시간안에 정보를 정리하고 축약하는 법, 가장 효과적으로 컨텐츠를 상대 혹은 대중에게 전달하는 기법은 기자가 아니면 배우기 힘든 덕목이다. 특히 넘치는 정보를 매일 정해진 분량으로 써야하는 신문기자는 21세기 정보의 시대에도 물론 좋은 직업이다. 고작 몇십만부지만 우리 신문을 보는 독자가 있고, 내 기사에 대한 피드백이 온다는 것도 참 황홀한 일이다. 지면에 쓴 기사는 인터넷으로 올려져 매일 출근시간 독자들이 클릭해서 본다. '요즘 신문 누가 봐'하는 사람이 있을 지언정 내가 써서 네이버 1위를 찍은 기사는 대부분이 한번씩들 봤다. 원소스 멀티유즈 시대에 신문 가지고 공격하는 사람은 뭘 잘 모르는 사람이다. 신문은 그렇게 형체를 달리하며 확대 재생산된다. 어차피 부수는 계속 떨어지고 광고료도 마찬가지지만..


작은 결혼식과 주폭을 막읍시다, 나트륨을 적게 먹자는 캠페인은 신문에서나 가능하다. 조선일보의 노쇼 기획이나 우리 회사의 입양아를 줄이자는 캠페인도 괜찮았다. 기자가 위정자가 아니기에 정책 자체를 입안할 수 없지만 이런 문제가 있다고 공론화시키고 악법을 고치고 낡은 제도를 바꾸는 사례가 많았다. 여러 신문이 일군 성과다. 유튜브 시대에 적응해야 되니 신문사들도 이것저것 영상도 만들고 하고 있지만 그 뚝심있는 취재력과 곤조, 정보를 찾고 뽑아내는 시각은 매체 홍수 시대에서도 중요성이 변함없을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신문업계가 전통은 이어가되 빠르게 변화에 적응해 계속 사회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 대중이 지적하는 문제점도 하나하나 고쳐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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