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일차 이자 마지막
2017. 1. 26.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난 4월부터 제주에 가겠다고 마음 먹었다. 학교도, 일도 끝이 나는 8월이 지나면 난 그때 꼭 제주에 있을 거라고 주위에 얘기를 하고 다녔다. 나는 불편할 게 없는 집을 두고 떠나는 여행을 좋아하지도 않고, 특별히 용감하고 자유로운 영혼도 아니지만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라 왜 제주에 가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살러."
그러면 몇몇은 좋겠다, 부럽다는 말 끝에 '아 나도 그러고 싶다.'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나에겐 그 말이 '아 나도 정말 가고 싶은데 가면 안 될 것 같아.'라는 말로 들렸다. 이전까지는 나도 그 생각 때문에 제주에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을 접어뒀던 것 같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라는 근거도 없는 불안감 때문에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도 않은 선택들 앞에서 있지도 않은 부담을 만들어내는 내 모습이 한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안쓰럽기도 해서 가면 안 될 것 같지만 가야 한다는 상황을 만들어봤다. 사실은 나의 선택이지만 선택이 아닌 것처럼, 내 의지는 전혀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에 따른 내 책임은 없는 것처럼 이름을 붙여봤다. 유배!
위인전에 나오는 인간들은 유배지에 가서 성장을 하고 돌아온다. "썩다 와라!!" 하고 일부러 산골짜기에 처박아놨더니 오히려 레벨업을 하고 돌아오는 케이스가 많다보니 위인의 필수코스는 유배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나도 이왕 유배에 온 거 위인은 못 될지라도 한 뼘의 성장은 하고 싶었다. 평소와 다르게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싶었으나 삼시세끼 챙겨먹기 바빴고, 하늘보고 누워있기 바빴고, 몇 시간씩 산책을 하느라 바빴고, 아무것도 안 하느라 바빴다. 얼핏보면 한량 같아 보일 수 있으나 바쁘게 해낸 것들 모두 평소에는 잘 못 하던 것들이라서 분명 더 나은 내가 됐을 거라고 정신승리 하고... 싶었으나 마음처럼 잘 안 된다. 말 그대로 그냥 살다가 돌아간다.
비행기 창 밖으로 뿌연 서울 하늘이 보인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익숙했을 하늘인데 되게 낯설다. 아무래도 이곳이 진짜 유배지인 것 같다.
* 탐라유배일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