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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Jul 11. 2021

숨겨진 히어로

올해 초, 1학년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 이곳저곳을 소개해주는 시간이 있었다.

행정실에 아이들이 들어서기 전부터 바로 옆에 붙어있는 교무실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와 이런저런 질문과 답이 오가는 걸 들으면서 머릿속이 갑자기 멍해졌다. 


하필, 모든 직원이 자리를 비우고 혼자 남아있었기에 더 막막했는지도 모른다.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었던 아이들과의 직면. 그리고 아이들의 씩씩한 인사 뒤에 찾아온 질문.


"행정실은 뭐하는 곳이에요?"

"행정실은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주시고, 의자나 사물함이 고장 나면 고쳐주시는 곳이야"


담임선생님의 답변이 나름 흡족했는지 더 이상 질문이 없었고 어색한 작별인사와 함께 아이들은 교장실로 향했다. 행정실을 향한 질문에 아무 답도 못한 나는 아이들이 떠나고 나서야 수많은 답들이 떠올랐다.


"행정실은 말이야, 학교가 너희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해주기 위해 필요한 돈을 총괄하는 곳이야. 그리고 너희 교실, 체육관, 도서실 등등 모든 시설을 안전하게 관리해주는 곳이고, 너희가 먹는 급식에 차질이 없도록 매달 입찰하고, 개찰하고, 나중에는 정산도 한단다. 그리고 너희 통학버스도 타지? 너희가 안전하게 등하교 할 수 있도록 통학버스 계약도 하고, 매달 정산도 하고, 스케줄 조정도 한단다. 그리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먹는 간식, 쓰는 학용품과 장난감도 다 구매한단다."


하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 앞에서 수업을 하는 선생님과는 달리 교실 반칸 정도 되는 행정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우리는 투명인간이 된 듯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매번 누구냐는 학생들의 질문을 받아도 묵묵히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할 뿐이다. 


또한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냐는 말이 무색하게 남모르게 느껴지는 소수를 향한 차별적 대우와 직종을 앞세운 어처구니없는 무시에 회의감이 폭풍처럼 몰아쳐도 누군가 건네는 "감사해요." "수고하셨어요." 한 마디에 다시 자리에 앉아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 우리다.



"어쩌다 실장" 매거진을 처음 만들었을 때에는 내가 처음 실장이 되어 모르는 업무를 대면했을 때 느꼈던 당혹감과 좌절감을 나와 같은 누군가는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업무적인 것을 주로 써 내려갔다. 하지만 업무는 그 가짓수가 아무리 많아도 끝이 있는 법이고, 또한 한 편의 글로 발행하기에는 그 중대성과는 별개로 절차가 아주 간단한 업무들도 있다. 그래서 글의 주제를 넓히기로 했다. 업무만큼이나 중요한 근무지에서의 위치, 직장동료들과의 관계, 마주할 수밖에 없는 부당함까지.  

 

"알고 맞는 매가 덜 아프다."라는 말이 있다. 나의 순수한 바람은 공무원으로, 그것도 교육행정직으로 진로를 정한 누군가가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현직자가 되었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상황들, 특히나 부당한 일들을 겪으면서 쌓이고 쌓이는 절망감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치열하게 공부해서 이루어낸 합격이라는 성과를 스스로 반납하는 일이 없도록 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 굳이 미리 알 필요 없는 일들을 너무 세세하게 적어놓아 교육행정직 공무원이 꿈이었을 누군가에게 좌절을 가져다 주진 않을까 하는 노파심도 든다. 


 


가장 중요한 대전제는 결국 모든 건 직장생활이라는 것이다. 각자 처한 상황이 조금씩 다를 뿐 어떤 상사를 만나느냐, 어떤 직장동료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근무시간이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으며 시즌에 따라 일이 많을 때도 있고 비교적 여유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이미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한 자리 당당하게 차지한 당신은 충분히 훌륭하다. 이 책을 읽어 앞으로의 공직생활에 마주해야 할 장애물들도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으니 건승을 빈다. 한 가지 더, 당신 옆에는 비록 소수일지라도 함께 걸어갈 선배들이 많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나 역시 당신의 "랜선 선배"가 될 준비가 되어있으니. 




"진짜 부자는 돈 많은 티를 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진짜 히어로는 그 정체를 함부로 나타내지 않는 법이다.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갖고, 내가 하는 일에 자신감이 있으면 그게 바로 직장생활의 히어로가 아닐까.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앞으로 창창히 펼쳐진 날들에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내 일에 최선을 다하는 숨겨진 히어로, 모든 교육행정직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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