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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May 27. 2021

종로에서뺨 맞고행정실에눈 흘긴다.

민원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가 다 알듯이 원인은 그곳에 있지 않은데 엄한 곳에 가서 화풀이한다는 의미이다. 가끔 나는 행정실이 한강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신규 시절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에서 학생들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그로 인해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한 공식적인 위원회가 열렸고,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가해자의 어머니로부터 정보공개 청구가 들어왔다. 위원회의 회의록을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하필) 나는 정보공개 청구 담당이었다. 


그래서 담당 선생님에게 회의록을 받아,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인물을 특정 지을 수 있는 모든 개인정보를 마스킹 처리한 후 서류봉투에 고이고이 넣어 보내드렸다. 그런데 며칠 뒤, 행정실 문을 열고 한 고상한 여자분이 들어왔다. 그런데 반전은 여기서 일어났다. 


옷만 고상했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어머니. 


"아니 내가 이런 거 받으려면 번거롭게 정보공개 청구를 왜 하겠어요!" 지금의 나라면 그분이 하실 말씀 다 할 때까지 그냥 가만히 듣고 있다가 조용해지면 내 할 말을 차근차근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당시의 나는 신규였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소리부터 지르는 민원인을 처음 대한 것이었다. 발끝에서부터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바로 그런 것일까. 정말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내 모습에 더 기세 등등해진 어머니는 더 불같이 소리를 지르고 자신이 받은 온통 마스킹 처리가 된 회의록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정도 되니 모든 행정실 직원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뭐 벌써 첫마디에서부터 모두가 쳐다보고 있었지만, 서류를 내려치는 순간 실장님, 부장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장님이 말씀하셨다. 


"어머님, 저희는 정보공개 청구와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원하시는 자료에서 개인정보를 삭제한 후 보내드렸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나요?"


"아니! 내가 우리 애가 너무 억울해서, 대체 어떤 말이 오갔는지 보려고 청구를 한 건데, 이거 봐봐, 뭐 읽히는 게 있어? 죄다 화이트로 지워버리면 내가 도대체 뭘 볼 수 있는 거야? 어? 여기 와서 좀 보라고!"


사실 담당자인 내가 지우면서도 이렇게 지우다 보면 회의록의 반은 지우겠다.. 싶었는데 실제로 반 이상을 지운 것 같다. 사건의 특성상 회의하면서 관련 학생들과 선생님 이름이 자주 언급되기도 했고, 관련자들의 말에서도 정말 수맍은 개인정보가 포재되어있었기에 나는 다 지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 같은 명품 문외한이 봐도 번쩍번쩍한 투피스에, 진짜 잘못 건드렸다가 흠집이라도 나면 수리비만 몇백십만 원 물어줘야 할 것 같은 가방을 들고 소리치는 민원인이라. 너무 충격을 먹어서인지, 시간이 흘러인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추측해보건대 나는 뒤로 빠지고 실장님 부장님이 그분을 어르고 구슬려서 돌려보내신 것 같다. 추후에 회의록에 대한 어떤 추가조치는 없었다. 


그리고 며칠이나 흘렀을까. 이런 얘기가 들려왔다. 


"그 ***엄마가 교무실에 와서는 그렇게 세상 공손하고 예의 차려서 얘기하더니 행정실에 가서 완전 난리를 피웠다며? 주무관님 괜찮았어?"

"네?"

"그 엄마 진짜 아무도 예상 못했잖아, 그렇게 행정실 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난리난리를 피울 줄"

"..."


그랬다. 교무실에서는 예의도 있고, 공손할 줄도 아셨던 분이 행정실에 와서는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서류를 내리치는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대체 왜 그랬을까. 우리가 본인 자녀가 관련된 그 사건에 무슨 상관이 있다고. 우리가 뭘 했다고. 왜 우리한테 그랬을까. 황당하고 어이없고 그리고 억울해서 말을 잃은 나를 대신하기라도 하듯이 이런 말도 들려왔다. 


"사실 선생님도 사람이잖아, 그리고 그런 일 있었다고 자기 자식 학교에 안 보낼 거야? 학교는 계속 보내야겠고 울화통은 터지니 교무실에서는 지 성질 못 드러내고 괜한 행정실 와서 그 소란을 피운 거지, 안 그래?"

그랬던 것이다. 자기 자녀에게 내려진 그 어떤 처분에 대해(나는 사실 정보공개 청구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떤 사건이었는지도 몰랐고, 처분이 어떻게 내려졌는지는 더더욱 몰랐다.) 너무너무 억울해서 그 화풀이를 하긴 해야 하는데, 선생님한테 하자니 그랬다가 자기 자식에게 어떤 불리한 일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 만만한 행정실에 그 화풀이를 해댄 것이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모든 기억이 그렇듯 그날의 기억은 희미해졌고, 잊혀갔다. 그런데 최근에 한통의 전화로 모든 기억이 선명해졌다. 마치 신규 때로 돌아간 것처럼.


평온한 아침, 전화가 왔다. 익숙한 번호다. 익숙한 번호일 때 전화를 받기 전 드는 감정은 두 개이다. 반갑거나 불안하거나. 그날 아침의 기분은 불안함이었다. 왜냐면 익숙하지만 발신자가 누구인지 모르겠는 번호였기 때문이다. 전화를 받았다. 최대한 공손하고 민원 대응 매뉴얼에 맞춰 또박또박하게.


"안녕하세요. **학교 행정실 ***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안녕하세요. 실장님, ***에요."


아뿔싸. 정말 준비할 새도 없이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화의 주인공은 우리 학교를 민원으로 들었다 놨다 하는 학부모였기 때문이다. 사실 학교로 민원이 들어와도 보통은 학생 관련 민원이기 때문에 내가 직접 개입할 일은 적다. 하지만 이분만은 달랐다. 이분은 자신의 자녀, 혹은 다른 학부모의 자녀를 떠나 교무실과 행정실을 두루두루 자기 손바닥 안에 넣고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사람이자, 이미 그런 전력으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며, 나 또한 그녀의 태풍에 휩쓸려 한바탕 소란을 겪은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망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망. 했. 다. (그녀가 나에게 보낸 태풍과도 같은 사건은 나중에 기록하도록 하겠다. 그 태풍에는 그녀의 버튼으로 인해 나와 어느 업자와의 충돌이 주된 내용이기 때문에 실장으로서 업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주제를 잡고 글을 쓸 때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겠다.)


"아 안녕하세요."

"제가 실장님 할 얘기가 있는데, 두 가지가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그녀의 이야기는 15분 정도 이어졌다. 엄청 공손하게 장황하게 자세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은 민원이었고, 그것도 한 가지가 아니고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학부모로서 제기할 수 있는 민원이었고 한 가지는 학부모로서 제기할 수 있는 민원이지만 본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이야기 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제가 실장님께 전화드린 이유는 교장, 교감선생님께 전화드리면 일이 커지고 하니까 실장님께 연락드린 거예요."



황당했다. 그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인이 제기한 민원에 나 또한 관련이 있긴 하지만 행정보다는 교무 쪽이 중심이 되어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한테 연락을 한 것일까? 진짜 내가 아무도 모르게 내 선에서 조용히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전화를 끊고 생각에 빠져있는데 직원분이 이런 말을 꺼냈다. 


"누구예요? ***엄마예요?"

"네"

"그 엄마가 그 사건(앞에서 언급한 태풍을 말한다.) 이후에 어떻게 해결됐는지 교무실에 몇 번을 찾아와서 설명 들었잖아요. 그것 때문에 교감선생님하고 교무 선생님하고 진짜 엄청 고생했어요. 실장님도 진짜 괜히 욕이란 욕은 다 먹고. 그런데 그 엄마는 실장님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학교에 불만은 계속 있는데 교무실은 너무 들락날락했으니 민망해서 이제 행정실에 전화한 거예요."

"..."



묘하게 닮아있는 이 두 상황을 도대체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결국 불만은(뺨은) 교무실 쪽에 있으면서 (종로에서 맞고) 눈은 왜 대체 행정실에 흘기는 걸까. 도대체 어쩌다가 행정실은 이런 위치가 되어버린 걸까. 


여담이지만 내가 교육행정직을 선택했을 때 중요시 생각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불특정 다수를 민원인으로서 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세상천지 진짜 별의별 민원이 학교에도 다 있다. (물론 학교에 있으니 거의 학부모와 학생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정말 주민센터에서 군청에서 시청에서 도청에서 정말 다수의 민원인을 상대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받았던 가장 황당한 민원은 바로 이거였다. 


"아니 도대체 학교 급식이 왜 이렇게 맛이 없어요?"

(보통 학교 식생활관=급식소 직통번호는 직원들끼리만 알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 관련, 수업 관련 민원이 아니면 다 행정실로 전화가 온다.)


맛이 없고 있고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기가 막혀서 전화를 끊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차라리 "학교급식에 왜 이렇게 고기가 안 나와요?"라던가 "학교급식이 왜 이렇게 짜요?"라고 한다면 시정하겠다는 답변과 함께 실천을 하면 되는데 다짜고짜 맛이 없다니. 다시 전화를 걸어 "어머님, 도대체 맛있다는 기준은 무엇인가요?"라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나는 공무원이다. 절차에 따라 영양사님께 전달을 하고 영양사님이 민원인인 그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 해명을 한다. 그런데 그 어머니도 참 대단했다. 다시 전화를 한 것이다. 이번에는 나에게 말을 안 하고 직접 영양사에게 말을 할 테니 전화를 돌려달란다. 시간을 보아하니 급식 배식이 시작된 시간. 상황설명을 하고 전화번호를 받은 후 영양사님께 전달을 했고, 기가 막혀 행정실로 달려오신 영양사님은 해명과 해명 끝에 이렇게 지르고 마셨다. 


"어머님, 드셔 보시지도 않고 왜 그렇게 말을 하세요? 그렇게 급식이 만족스럽지 않으시면 직접 와서 일단 드셔 보세요!"


브라보! 정말 속이 다 시원했다. 모두의 입맛을 다 맞출 수 없다. 나도 학교급식을 20년째 먹고 있지만(학창 시절 포함) 맛이 있을 때도 있고 맛이 없을 때도 있고, 메뉴가 마음에 들 때도 있고 안 들 때도 있다. 식단을 짜는 영양사님도 사람이고, 그에 따라 식재료를 구매계약을 하는 나 같은 사람도 사람이고, 우리는 다 신이 아니고 사람인데 어떻게 모든 이의 입맛을 맞출 수가 있을까. 도대체가 맛없다는 민원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제기하는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나는 이때도 지금과 같이 이 어머님이 급식이 문제가 아니라 학교에 불만이 있는데 그걸 가지고 문제 삼기는 자신이나 자신의 자녀에게 불리한 상황이 벌 어질 것 같아서, 괜히 행정실과 급식소를 붙잡고 늘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아니고 진짜 급식이 맛이 없어서 민원을 넣을 것이라면 나는 평생을 두고 그 어머님 사상을 이해 못할 것이다. 굳이 덧붙이자면 그 당시 그 학교는 급식 맛있기로 소문난 학교였다.)



행정실은 화풀이 대상으로 삼을 만한 곳이 아니다. 엄연히 교무실과 같이 학생들의 교육활동을 위해 애쓰고 있는 관리실이며, 법이 받쳐주는 체계적인 직급 서열이 확실한 공무원들의 근무지이다. 


교무실에 합리적으로 정당하게 민원 제기할 것이 있으면 교무실로 당당하게 찾아가 담당자를 찾고, 행정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행정실로 찾아와 담당자를 찾으라고 나는 모든 학교를 상대로 하는 민원인들에게 말하고 싶다. 또한 학교의 선생님들은 정당한 민원제기를 한다고 해서 당신의 자녀를 차별한다거나, 불쾌한 감정을 학생에게 드러낸다거나 할 만큼 사리판단이 안 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모두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겪어온 선생님들은 사적인 감정이 교육자로서의 사명감을 뛰어넘도록 방치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또 하나는 행정실에 화풀이를 하고자 전화를 하고 찾아온다고 해도 비합리적인 민원임에도 불구하고 민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절절매는 공무원을 기대한다면 그런 악한 마음은 제발 좀 버려달라고 하고 싶다. 민원인이 쌍욕을 한다고, 삿대질을 한다고 혹은 폭력을 휘두른다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면서 똑같이 욕을 하고 삿대질을 하고 폭력을 휘두르진 않겠지만 그걸 인내하는 공무원도 사람이다. 똑같은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해달라고 말하고 싶다. 교육의 중심인 학교에서 선생님과 직원들을 향한 막무가내식 민원이 과연 그 누구한테든 좋은 영향을 미칠까. 


더 큰 시야가, 생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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