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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일용할 고단함

by JA

좀 오래되었다. 남모를 자괴감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한 게. 그래도 잘 버텨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우울감이 갑자기 덮쳐왔다. 그래서 이 우울감이 분노로 변해 아이들에게 또 뻗치기 전에 책을 집어 들었다. 당분간은 책을 많이 읽을 것 같다. 이 우울감이 해소될 때까지.


사실 일하면서 짬짬이 읽는 책이랑 집에서 틈틈이 읽는 책 두 권을 항상 병행하는 편인데, 요새는 좀 머리와 마음이 둘 다 편안해지는 책을 선호하다 보니 결국 집에서 읽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녹나무의 파수꾼"은 계속 방치된 상태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책을 또 시작하기에는 부담스러워 결국 일하면서 읽던 이 책을 집으로 가져와 버렸다.


오늘도 일용할 고단함. 제목이 마음을 움직여 선택한 책이다. 일용하다는 표현과 고단 함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몇 번 입으로 중얼거려보니, 묘하게 섞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책장을 넘겼다. 프롤로그를 읽고 목차의 첫 번째 챕터를 다 읽고 나서 딱 느낀 점은. "아! 다행이다" 편안하게 읽혔기 때문이다. 어렵지 않지만 가볍지 않은 그 애매한 무게감이 이 책의 최대 매력인 것 같다.


책의 끝부분에 나오는 추천 사들을 보면 왠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림들을 일상으로 가져와 독자에게 삶의 위로를 전한다고 하는데, 사실 그림들을 일상으로 가져와 작가만의 시선과 이야기로 풀어낸 건 맞지만 딱히 독자들에게 위로가 될까 싶은 게 내 생각이다. 결국 내가 위로를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대체로 구질구질하다" - 67p


내가 솔직하지 못한 걸까, 작가가 대담한 걸까. 이 문장을 보고 살짝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도 맞는 말이지만 그대로 받아들이면 내 속을 받쳐주고 있던 주축 대가 무너져 정말 내가 없어져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하필 그동안 잘 감추고 눌러왔던 우울감이 볼품없이 질질 새고 있는 이 시점에 이 문장을 만나서 마음이 휘청거렸다.


"그립고 푸근하고 안쓰럽고 걱정되고 고맙고 답답하고 맘에 걸리고 기대고 싶고 미안하고 보고 싶고 그러면서도 어떨 땐 슬쩍 모르는 척하고 싶기도 한 존재. 엄마" - 82p


모든 수식어가 다 공감이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어떨 땐 슬쩍 모르는 척하고 싶기도 한 존재"라는 표현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차마 엄마에게 미안해서 표현하지 못했던 내 마음을 작가가 너무 담담하게 책에 써놓았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우리 엄마가 내 마음이 이렇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서운할까, 하는 생각과 하지만 엄마도 외할머니를 이렇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교차한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얼굴 보면서 던질 수 없는 질문이기에 글로나마 묻고 싶다. 정말 나만 그런 건지..


아마 나의 마음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말 온 맘 다해 엄마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주고 존경하고 존중하는 자녀분들도 많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살아온 환경이 남들과는 약간 달랐기에 그럴 수도 있고, 타고난 마음의 넓이와 깊이가 이 정도밖에 안되기에 그럴 수도 있고 이유를 대자면 구구절절이 하소연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결국 변하지 않는 건 내 마음이 그렇다는 사실인데.


그리고 다온이 라온이가 나에게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면 어떨까도 생각해본다. 당연히 서운하겠지.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서운한 건 나의 마음이고 슬쩍 모른 척하고 싶은 것은 아이들 마음이니까. 이미 그런 마음을 가졌을 때에는 나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별개의 인격체일 텐데 내가 너희들한테 뭘 어떻게 했길래 그런 마음을 가지는 거냐고 조목조목 따진다고 아이들의 마음이 변할리 만무하니 결국엔 내가 포기하게 될 것만 같다.


그저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의 이런 마음을 우리 엄마에게 들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는 것과, 우리 아이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아이들이 자랄수록 적당한 거리를 잘 지키는 엄마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

력하는것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겨본다.



"죽음은 추상적인 비극이 아니라, 누가 상가 집에 가야 할지 정하는 인간관계의 정산이고, 죽음 뒤에 남겨진 가족에 대한 호구조사이자 그가 남긴 부채와 부동산에 대한 감정평가 과정이며, 나한테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습격의 공포로 다가온다. 거기에 하나 더.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부의금 봉투에 얼마를 넣을지 따져 보는 회계의 과정이라는 거." - 94p


이 단락을 읽으면서 아이러니하게 나는 "결혼식"을 떠올렸다. 아마 "인간관계의 정산"이라는 표현과 "회계의 과정"이라는 표현이 유난히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인사발령이 있었다. 정년퇴직 명단에 내가 아는 분들도 꽤 있어서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구나, 하고 느끼는 동시에 한 이름에서 "자녀분들 결혼은 다 시키셨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많은 분들이 퇴직 전에 자녀의 결혼을 성사시키고자 한다는 말이다. 이유는 내가 뿌린 만큼 거두기 위해서. 물론 예외적으로 정말 축하를 해주기 위해 축의금을 내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 자녀의 혼사에는 축의금을 아예 안 받거나, 자신의 퇴직과 자녀의 결혼을 아예 연결 짓지 않는 분들도 있지만 이런 분들은 정말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현직에 있어야 퇴직했을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사에 더 많이 오고, 사람들이 많이 오는 만큼 돈이 많이 모인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실천하고자 노력(?)을 많이 한다.


책에서는 죽음을 논했지만, 결국 경사든 애사든 본질적인 축하와 애도가 아닌 작가가 열거해 논 것들을 증명하는 일종의 의식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하다 못해 쓰다. 지금의 나는 어떤 애사나 경사에 가깝지 않은 위치에 서있기에 현실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지만 조금씩 나이가 먹어가며 나의 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때가 되면 보고 겪은 대로 나 또한 똑같이 행동하게 될까? 쉽사리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상어는 태생적으로 직진을 즐깁니다." 중략 "하지만 수족관은 상어가 계속 직진을 즐기기엔 턱없이 공간이 부족하죠. 할 수 없이 상어는 몸을 돌려가며 헤엄쳐야만 합니다" 중략 "갇힌 환경 때문에 몸을 휘며 헤엄치는 상어는 척추측만증에 걸리곤 합니다. 등이 휘고 굽는 증상은 전 세계 수족관의 상어한테서 나타나는 비극이죠"


"화면 속 상어의 모습은 처참했다. 등 윗부분이 보기 흉하게 굽어있었고 몸통은 온통 지저분하게 얼룩덜룩했다. 앓고 있는 상어는 더 이상 무섭지도 날렵하지도 않았다. 그저 서글픈 목숨 덩어리였다." -130p


나는 수족관에서 상어를 볼 때마다 늘 생각했다. "과연 상어에게도 초점이 있는 걸까?" 마치 인형 눈처럼 생긴 상어 눈이 신기하면서도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가슴 아프게 깨달았다. 수족관 안에서 우리가 상어라고 봐왔던 생명체는 이미 상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그런 생명체였다는 것을. 그랬기에 그 눈에 초점이나 생기 따위는 존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 잘 놀다가 갑자기 짜증을 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까지 보인 다온이를 안아주는데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아이의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려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작정 이 단락을 이야기해주는데, 다온이가 처음에는 시큰둥하더니 점점 눈물을 그치고 이야기에 집중해서 다 듣고 나서는 특유의 표정으로 침묵했다.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끔은 아이의 머리와 마음속에 들어가 보고 싶다.


앞으로 수족관에 가서 상어를 보게 되면 측은한 마음이 들 것 같다. 나이가 들고 어렸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면서 점점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곳이 없어지는 것만 같다. 동물원, 수족관, 승마장 등등.. 아예 안 가고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기에 늘 가는 발걸음과 돌아오는 거리에서 한 겹 한 겹 불편한 마음과 죄책감만 대책 없이 쌓인다. 환경을 생각한다고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연을 환경을 완전 등한시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이에게 이런 상황을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마음이 갑갑하다.



"보여주지 않는 걸 보는 나이가 되면 사는 게 좀 시시해진다. 즐기기보다는 자꾸 다른 걸 상상하게 되니, 가슴은 쉽게 뜨거워질 줄 모르고 액면보다는 이면을 생각한다. 가장 최악은 그걸 자녀한테 드러낼 때다"

"너 저 사람이 맨날 저렇게 신나게 살 것 같아? 저렇게 되려면 얼마나 험한 꼴을 많이 겪게 되는 줄 알아?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헛바람 들지 말고 공부나 해!"

"하지만 우습지 않나. 사람은 바람이 좀 들어야 자신을 불태우기도 하고 새로운 꿈도 꾸는데 말이다" - 137,138 p


언젠가 다온이가 "오 마이걸"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자기는 디자이너도 되고 싶고 가수도 되고 싶다고 했다. 평소에는 "다온이가 무얼 하든 그걸 하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해주다가 그날따라 갑자기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다온아 가수가 되려면 노래도 잘해야 하고 춤도 잘 춰야 하고, 무엇보다 살이 찌면 안돼서 먹고 싶은 것도 잘 못 먹어. 운동도 엄청 열심히 해야 해."


말하고 나서도 아차 싶었는데, 작가가 아주 쿡 찔렀다. 최악이다. 왜 그렇게 말했냐고 묻는다면 진짜 나도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기억에 딱 한번 저렇게 대놓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다행히 지금도 노래하고 춤추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다온이를 보면 딱히 내 말에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은데, 혹여나 좀 더 커서 문득 내 말이 떠오르는 일도 없기를 간절히 말해본다.




읽는 도중에는 몰랐는데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다 보니, 밝은 책은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그리고 새삼 작가가 그림 하나하나에 본인 이야기도 아닌 허구의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창작해냈다는 것이 놀랍다. 그것도 드라마나 영화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혹은 주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과 접하기 힘든 그림을 엮어 책 한 권을 다 채우다니, 또 한 번 작가라는 직업이 대단하다고 느낀다.


두 번째라고 나름 찾아보기표를 정성껏 붙였는데 역시나 다 읽고 나니 모양새가 딱히 예쁘지 않다. 그래도 사진이 아닌 기록으로 남기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방법을 바꾼 것이 참 잘했다는 생각도 든다.


마음이 복잡하거나 무겁지 않을 때 읽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책. 오늘도 일용할 고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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