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 에세이
책을 읽을 때 마음을 흔드는 문장이 있으면 사진을 찍는 습관이 있다.
그 전에는 손수 연필을 들어 가지고 다니던 다이어리에 필사를 했었는데
어느 순간 손으로 적는 것이 어색해졌고 다이어리도 안 들고 다니다 보니
늘 내 가방 속에 있는 태블릿이나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게 되었다.
그 사진들은 책 리뷰를 하는데 유용하게 쓰였었는데
한동안 리뷰를 안 하기로 결정하고 독서를 하는 동안
사진을 다 지워버려서 저번에 언급한 책들 중에는 오늘 쓸 이 책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드문드문 남아있던 책장들의 사진은 오늘로써 영원히 안녕이다.
"인생은 소설이다"도 그랬지만 이 책도 내가 구입한 건 아니다.
학교 도서관에 리모델링 공사 이후 오랜만에 갔는데 교직원용 새책이 눈에 들었고
그중에 이 책이 눈에 띄어서 집어 들었다.
허지웅 작가님의 책은 처음이 아니다. 그가 쓴 "버티는 삶에 대하여"라는 책을 그 옛날에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굉장히 실망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 내가 가끔 채널을 돌리다 보면
그의 모습이 자주 보였고 그가 하는 소신발언이나 보여주는 행동들이 꽤나 나의 호감을 불러일으켜서
일부러 동네 큰 도서관에 가서 빌려본 것인데,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정말 그저 그랬다.
하지만 끝까지 다 읽기는 했다. (정말 너무 어려운 책이 아니면 한번 편 책은 끝까지 읽는다.)
그런데 이 사실을 망각했다. 그 사실보다 그가 많이 아팠고 지금은 다행히도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방송에서 보았던 게 먼저 생각나서 망설임 없이 집어 들은 것이다. 결론은 이 책이 너무 좋았다.
삐딱하게 본다면 이 책에는 내가 모르는 사실이자 그가 다방면으로 아는 것들이 너무 넘치게 들어있어
그가 자아도취에 빠져 이 책을 쓴 게 아닌가, 혹은 잘난척하고 싶어 안달이 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냥 책을 정면으로 백지상태에서 본다면 아, 이런 작품도 있구나 이런 책도 있구나 이 배우가 이런 영화에도
나왔었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그랬다. 그가 언급한 영화들, 책들은 정말 내가 거의 다 모르는 것이었다.
그래도 재밌었다. 다양한 분야의 상식을 말 잘하는 선생님이 압축해서 강연해준 느낌이랄까.
너무 깊지도 않게,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중간중간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특히나 저 하얀 차 에피소드는 내가 초보운전이라 더 공감했다. 그래도 하얀색 차주인은 허지웅 작가를 만나 얼마나 다행인가. 웬만한 차주인 같으면 당장 뛰쳐나와 자기 차를 한 번 보고 하얀색 차주인에게 욕을 해도 했었을 텐데.
그리고 두 번째 사진을 찍은 이유는 내가 직장 생활하다가 들은 말들 중에 마음에 콕 박힌 말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직접 하신 말씀은 아니었지만 요지는 이랬다.
"일을 못하는 건 괜찮지만 싸가지가 없는 건 참을 수가 없다. 일은 가르치면 되지만 인성은 고치는 게 아주 어렵다"
그 인성에는 작가가 말한 인사성과 성실함이 분명 내포되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있다. 요새는 성실함보다는 유능함을 많이 추구하는 듯하다. 최근에 이런 말을 들었다.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하란 말이야." 정말 여러모로 살기 힘든 세상이다.
그리고 리뷰를 끝내도 지우지 않을 사진들. 이 책에서 내가 찾은 보석과도 같은 문장이다. 물론 구원이라는 단어가 너무 오글거렸지만(원래 글을 쓰다 보면 이상하게 나도 모르던 허세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허세가 대부분 멋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허세는 부끄러움으로 변하곤 한다. 내 경우가 그렇다. 글을 멋들어지게 쓰고 싶으니 허세가 발휘되지만 결국 나중에 남는 건 이불 킥이랄까.) 문장 자체가 내 마음을 제대로 흔들었다.
맞다. 정말 맞다. 기억나지도 않는 선행이 나를 구하고, 기억나지도 않는 악행이 나를 잡아먹는 세상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마 학폭 미투일 것이다. 가해자들은 대부분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다고 용서가 되진 않는다. 그래서 늘 기억해야 한다. 지금의 내 행동이 언젠가 부메랑처럼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초록색 글귀 역시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살다 보니 나에 대한 평가가 정말 다양하고, 대부분은 뒷담화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에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작가의 말대로 그것에서 나를 분리시켜야만 한다. 물론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이 책이 나에게 남겨준 또 다른 책이 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작가가 책에서 너무 장황하게 언급해서 기억에 남기도 하지만 한편 줄거리가 너무 황당해서 기억에 남기도 한다. 오죽하면 온라인에서 책을 고르다가 구입할 뻔했다. 하지만 작가가 언급했을 때는 쉽게 풀어놓은 것이고 실제로는 엄청나게 어려울 철학서일 것이 뻔하므로 사지 않았다. 작가는 삶의 회의가 들 때마다(힘들 때마다..라고 했던가.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저 책을 꺼내본다는데, 역시 남다르다.
굳이 구입해서 읽어보라고 하기에는 호불호가 많이 갈릴 것 같은 이 책. 도서관에서 한 번쯤은 빌려봐도 될듯하다.
내가 오늘내일 그리고 그다음 날을 넘어서 앞으로 계속 나를 구원해줄 기억나지도 않을 선행을 많이 이루어낼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