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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Sep 17. 2022

[작가의 말] 흰머리 휘날리며

feat.딸이 그린 운전하는 엄마

한 번은 주말에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데 딸이 한껏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더군요.     


"엄마 여기 흰머리 있어, 하나 둘 셋넷다섯여섯일곱"

"..."     


흰머리가 생긴다는 자기 엄마가 늙어가고 있다는 말인데 뭐가 그리 좋을까 싶어 어이가 없었어요. 그런데 더 충격적인 건 흰머리의 주인인 저의 허락도 받지 않고 딸이 흰머리를 뽑기 시작한 것이죠.     


"아파~~"

"엄마 하나만 더 뽑을게 하나만 더!!"     


무슨 금광을 캐듯이 눈을 반짝거리는 딸을 보며 심술이 나서 엄포를 놓았어요.     


"너~! 검은 머리 뽑았다가는 엄마 삐질 거야"

"알았어~~"     


혹시나 딸이 검은 머리를 잘못본 건 아닐까 했던 기대는 금세 물거품이 되었어요. 평소에도 야무진 딸은 뿌리부터 끝까지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만 쏙쏙 뽑아냈거든요. 머리카락이 뽑히는 고통을 온몸으로 여실히 느끼며 생각했어요. 내 나이 아직 서른 중반이고, 나의 일상은 크게 달라진 게 없는데 갑자기 흰머리가 왜 이렇게 많이 생긴 걸까. 혹시 코로나 후유증이 머리카락으로 온건가. 하는 희한한 생각까지 들던 차에 제 머릿속에 번뜩! 하고 든 생각이 있었어요.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 엄청난 변화였음에도 변화로 인지하지 못했던 그것.     

바로 "운전"이었어요.


그 전에는 늘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해왔지만 지금의 근무지로 발령이 나면서 운전을 시작했던 것이죠. 그리고 실 경력으로 따지면 채 2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주행과 주차 그리고 주유에 이르기까지 남들은 밥을 먹고 잠을 자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것들이 저에게는 단 하나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단 하루도 같은 모습인적 없었던 도로는 늘 예측불가의 상황으로 저를 밀어 넣었고, 조심에 조심을 한다고 했는데도 정말 찰나의 순간에 큰일이 벌어질 뻔한 일도 다반사였어요. 그때마다 “다시 운전대를 놓아버리면 이제는 끝이다”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스리고 또 다스렸지만, 그럼에도 매 순간 처절하게 느꼈던 포기의 유혹과 좌절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카락으로 남은 듯한 기분이었어요.     

마음이 복잡해 한숨이 절로 나오는데 아직 엄마의 감정을 헤아리기에는 너무도 어린 딸이 또 방방 뜨며 말을 건넸어요.     


"엄마 나 세 개 더 찾았다! 일곱 개에 세 개를 더하면 열개다! 이것도 뽑아도 돼?"

"ㅡㅡ...."     


대답도 하기 전에 "뽁!" 하는 통증이 느껴졌어요. 아니, 어차피 뽑을 꺼면 왜 물어봤을까요. 그런데 딸의 행동보다도 흰머리 개수에 더 속상했어요. 이러다.. 마흔도 되기 전에 반 백발 되는 거 아니야!? 하..     

운전 괜히 시작했나 봐


아주 잠깐이었지만 후회가 되었어요. 평생 나와는 연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운전을 얼떨결에 시작해 나에게 남은 것이 흰머리뿐이라면, 굳이 내가 그 고생들을 왜 사서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어요. 십몇개월의 기간 동안 운전을 하며 겪었던 파란만장한 날들이 머릿속을 스쳐가며 불현 듯 그 속에서 느꼈던 희로애락의 감정과 도로에서 새삼 깨달았던 삶의 진리들이 줄줄이 떠올랐거든요. 

    

운전을 하지 않았더라면 보이지 않았을 도로 위의 세상과 쌓지 못했을 아이들과의 추억 또한 극복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을 나의 한계들까지, 얻은 게 더 많았음에도 당장 눈에 보이게 늘어가는 흰머리카락들에 홀랑 다 날려버릴 뻔했지 뭐예요.     

"아싸! 하나 더!"     


한참 생각에 빠져있는데 한껏 커진 딸의 목소리에 정신이 도로에서 다시 소파로 돌아왔어요. 끝끝내 열개를 채운 딸은 마치 어떤 목표에라도 도달한 듯 상기되어있었어요.     


"딸아, 이 흰머리들은 엄마가 운전을 하며 하나하나 받은 상장과도 같단다."

"...?"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 못 한 딸이 눈만 깜박깜박하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꼭 안아주며 다시 한번 생각했어요.     


운전자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앞으로 운전을 하면서 얼마나 더 많은 흰머리를 갖게 될까요. 아니 어쩌면 운전 때문이 아닐지도 몰라요. 흰머리가 급속도로 생길만한 나이는 아니지만 꼭 흰머리가 4-50대에 생기라는 법도 없을뿐더러, 제가 모르는 어떤 유전적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분명한 건 운전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한몫했을 거라는 거죠.     

그럼에도 저는 제 몸이 허락하는 동안은 쭉 운전자로 살 예정이에요. 운전으로 제 삶의 반경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지 앞으로가 더 기대되고, 지금까지는 기동성이 없어 갈 수 없었던 수많은 장소에서 아이들과 얼마나 더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을지 상상만해도 마음이 행복으로 차오르거든요. 가장 중요한 건 흰머리는 염색하면 되고 여자 저차 해서 염색할 시기를 놓쳤다 하더라도 "흰머리 휘날리며" 하는 운전도 매력이 있을 것 같아요. 하하하.     


이제는 여러분 차례예요. 서른 중반에 이르기까지 절대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겁쟁이 쫄보였던 제가 콩알만 한 간을 가지고 어떻게 그 파란만장했던 시간들을 극복했는지 읽고 나면 숨어있던 용기가 스멀스멀 고개를 들 거예요.     


여러분의 이미 시작된, 혹은 앞으로 시작될 운전자로서의 인생을 응원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날마다 이루어지는 제 도전을 응원해요. 도로야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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