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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Aug 10. 2022

반짝반짝 라이트 라이트!

빗길 운전




아침에 정신이 들면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비 오는 날씨는 기가 막히게 알 수 있어요. 온몸으로 느껴지거든요. 불편한 통증들이. 보통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분들이 비 오면 삭신이 쑤신다고 하시는데 저는 철도 씹어먹을 나이라는 20대부터 비가 오면 그렇게 몸 전체가 아팠어요. 그리고 오늘 이야기해 볼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어요. 눈을 뜨기도 전에 꺾이는 관절 마디마디에서 살을 짓누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죠.   

   

"하.. 비 오네.."    

 

여기저기 쑤시는 몸을 겨우 추슬러 일어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출근이 걱정돼요. 빗길 운전은 언제나 무섭거든요. 비가 내린다는 자체만으로도 초보운전자에게는 엄청난 강적을 만난 것이지만 그 보다 더 걱정되었던 건 바로 국지성 호우(특정 지역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는 현상)였어요. 벌써 한 3-4번은 겪어봤는데도 여전히 적응이 안 돼요. 

     

갑자기 쏟아지는 비
차를 사정없이 때리는 소리
급격히 도로로 차오르는 물
와이퍼를 최고속도로 돌려도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시야     


국지성 호우를 실제 만난 시간을 따져보면 잠깐의 시간이지만 체감하기로는 결코 짧지 않게 느껴지는 시간 동안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입술이 바짝 말라오는 것이 느껴지죠. 한두 번째 국지성 호우를 만났을 때였던 것 같아요. 국지성 호우 때문에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로 운전하다가 눈앞에 믿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던 날이. 그 얘기를 해보려 해요.     


사무실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데 갑자기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깜짝 놀라서 제 자리 뒤에 있는 창문을 열어보았죠. 그랬더니 엄청난 비가 쏟아지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다행히 건물이 무너질 만큼의 호우는 아니었지만 그 기세가 워낙 세서 학교 통행로 캐노피(건축에서 기둥으로 받치거나 매달아 놓은 덮개 - 네이버)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소리가 마치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처럼 들렸던 거예요.      


갑자기 일에 집중이 안되었어요. 퇴근 후 집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 너무너무 걱정이 되었거든요. 그렇게 반쯤 정신이 날씨에 팔린 채로 일하다 보니 어느새 퇴근시간! 심호흡 깊게 하고 천천히 주행을 시작했어요. 다행히 전용도로 진입하기 전까지는 비가 살살 내리더라고요. 그리고 드디어 들어간 전용도로. 처음에는 괜찮았어요. 여전히 비는 살살 내렸거든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차들은 제 앞을 보란 듯이 추월해갔죠. 아무리 비가 적게 내려도 빗길인데 무섭지도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남생 각이 아닌 나에게 집중하자 싶어서 운전에만 몰두했어요.     


그런데 그때!     


우당탕탕탕탕탕탕탕탕탕탕탕탕탕     


엄청난 국지성 호우가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하늘에 구멍이 뚫려도 제대로 뚫린 듯이 비가 내리치기 시작하는데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죠. 와이퍼를 최고속도로 움직이게끔 한 후 속도를 조금씩 줄였어요. 전용도로가 고속도로인 양 속도전을 펼치던 차들도 차츰차츰 느려지는 게 눈에 보이더군요. 정말 여기서 액셀이나 브레이크 한 번만 잘못 밟으면 진짜 100% 사고가 일어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엄청난 습기에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예진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차에 바람이 아랫방향으로 들어오도록 한 후 전방주시에 최선을 다했어요. 그런데 그때, 앞에서 무언가 반짝거리기 시작했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그것이 돌발 깜박이라는 것을 한 번에 알 수 있었어요. 일정 박자로 깜박 깜박이는 불빛은 회전 깜빡이 아니면 돌발 깜빡이뿐인데, 양쪽 깜빡이가 다 깜박거렸으니까요.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어요.     

올 것이 왔구나     


저는 거의 확신에 차있었어요. 이 빗길에 결국 누군가 사고를 내고야 말았구나. 하고요. 그래서 속도를 더 천천히 줄여가며 서행했죠. 그런데 뭔가 이상했어요. 보통 사고가 나면 운전자들이 세우는 안전삼각대도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어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사고가 났나? 싶어서 더 슬금슬금 다가갔는데 그곳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뭐지? 왜 돌발 깜빡이를 켠 거야? 하고 짜증이 올라오려는 순간! 머릿속에 번쩍! 든 생각 하나!      


혹시 나를 위해서!?     


혹시나 했던 마음은 감사하게도 딱 들어맞았어요. 앞 운전자는 마치 들통으로 붓듯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제가 혹여나 제 때 정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차와 부딪힐까 봐 돌발 깜빡이를 일부러 켜준 것이었어요. 그리고 뒤이어 제가 목격한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죠. 사진 찍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잘 찍히지도 않았을 거고 그보다도 그 상황에서 사진을 찍겠다고 핸들에서 손을 놓는다는 건 너무도 무모한 행동이기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어요. 대신 말로 설명해볼게요.     


자. 상상해보세요. 비가 엄청 내리는 전용도로 한가운데 차가 일렬로 서있어요. 그런데 그 줄이 유난히 반짝거려요. 마치 불빛 퍼포먼스를 하는 듯 보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모든 차가 전방 라이트를 다 켜고 돌발 깜빡이도 다 켰기 때문이에요. 앞뒤가 반짝반짝한 차들의 행렬. 머릿속에 그려지시나요? 그 상태로 모든 차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천천히 서행하며 국지성 호우에 맞서고 있었어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그 지점을 벗어나자 빗줄기는 서서히 약해졌어요. 그리고 일부 차량은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죠. 저는 여전히 무서운 마음이 더 커서 계속 서행했어요.      


서행하면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나는 초보운전이라 나만 이렇게 무섭고 두려운 줄 알았는데 운전경력을 떠나 이런 자연재해(?)에는 너도 나도 다 같은 심정이구나 하는 동질감이 몽글몽글 피어났죠. 더불어 이런 상황에서는 역시 모두가 힘을 합쳐야 사고 없이 지나갈 수 있구나, 하는 당연한 사실조차 생경하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뒤에 오는 차량을 위해 돌발 깜빡이를 일부러 켜준 운전자의 마음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죠. 사실 그 순간에 돌발 깜빡이를 안 켠다고 누가 그 운전자를 비난할 수 있겠어요? 의무사항이 아닌걸요.     


그리고 제가 이런 배려가 담긴 돌발 깜빡이를 마주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도 동시에 깨달았죠. 제 앞에서 급정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차량의 운전자분들 중 일부는 자신의 급정거를 알리려 돌발 깜빡이를 켜준 분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조금 멀리서도 그 깜빡이를 보고 서서히 속도를 줄일 수 있었죠.     


이밖에도 사실 알게 모르게 제가 운전하며 받은 배려가 많을 거예요. 운전 하나만으로도 벅찬 초보운전자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을 뿐. 그런데 사람 심리가 참 간사한 게 고마웠던 일은 금세 잊어버리면서 상처받았다거나 속상했던 일은 오래오래 기억한다는 거죠. 저도 지금 당장 운전하면서 속상했던 일을 말해보라면 최소 세 가지는 거뜬히 말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저 상처받은 상태로 있으면 저만 손해 아닐까요. 그래서 생각의 전환을 해보기로 했어요.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운전을 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부정적인 기억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 애써보려고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얼굴도 모르는 저에게 베푸셨던 많은 운전자분들의 따뜻한 배려를 이제부터라도 잊지 않고 저 또한 그런 운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려고요. 할 수 있겠죠? 이렇게 초보운전자는 오늘도 원대한 목표를 세워봅니다. 도로 위의 모두를 응원해요.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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