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소소한 시련들이 창밖에 조용히 쌓이는 눈처럼 나를 덮는 겨울이다. 그 전에는 알지 못했다. 시련이 소소할 수 있는지. 내가 바란 것과 다르게 나타나는 모든 일과 사람의 모습 하나하나에 얇은 마음을 데었다.
캐나다에 다시 돌아와서 자가격리를 하고있다. 얼굴을 보고 얘기를 나누는 것 만으로 나의 존재와 그 소속을 벅차게 느끼게 해주는 가족들이 16시간의 시차와 기적같이 하늘을 가르는 기계덩어리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물리적 거리 너머에 있다. 집은 고요하고 문을 두드려 나를 찾아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지난 2주간 하루하루 물처럼 고였다. 안 그래도 외로움에 취약한데 말야.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실제 사람과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다른 모든 것이 풍족한 환경에 있는 나를 꽤나 빠르게 절망 앞으로 갖다놓곤 했다. 인간이 불행할 때에 가장 괴로운 것 중 하나는 내 불행과 상관없이 이전과 동일하게 흘러가는 타인의 삶과 감정과 세계를 보는 일이다. 내가 한국에서 새벽 네시에 일어나 어버버 거리고 있든, 기껏 힘들여 온 캐나다에서 집에 갇혀 우울해하고 있든 영상통화로 보는 랩 멤버들이 이전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표정과 말투로 이야길 이어나갔다. 그들도 물론 그들 나름의 삶과 사정이 있을테지만, 내 불행을 조금 더 이해받아도 나쁘지 않았을테지.
대학원 지원서를 낸 지 꽤 시간이 흘렀고,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 둘 인터뷰 초청을 받는 동안 내 메일함은 아직까지 고요하다. 쉬지 않고 경력을 쌓아서 학점과 연구경험과 장학금을 지원서에 꾸역꾸역 이겨넣으며 버틴 일년 반이었다. 외국인이라는 신분과 아너스 디그리의 부재가 큰 걸림돌이 될 거란걸 알았지만, 막상 결과를 마주하고 보니 입맛이 참 쓰다. 다 발표가 난게 아니라서 오바하는 것도 맞고, 다른 대학원 지원서를 심지어 작성하는 중이라 지금 쓴맛을 느끼면 안되는 것도 맞다. 근데 마음이 아픈걸 어떡하나? ㅎㅎ 서른 넘어 깨달은건 나이가 실망과 좌절에 면역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 그 앞에서 모두가 똑같이 여린 아이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나도 갖고 싶고, 나도 인정 받고 싶다. 내가 열심히 살아온 지난 날들에 대한 인정, 그리고 그 인정에 대한 증거로서의 몇몇 서류쪼가리들.
먹을 만큼 먹어버린 나이와, 내가 지나야 했던 상실 등이 내게 준 것은 아파도 괜찮았다는 경험적인 지식이다. 지금 화들짝 아파도 언젠가 기필코 괜찮아진다. 완벽히 행복해질 순 없지만, 반드시 지금보다는 나아질 거라는 걸 안다. 소소한 좌절과 시련의 경우에는 이걸 아는 것 자체가 의외로 금방 나를 괜찮게 만들어준다. 아 너무 뜨거워서 데었네, 하고나서 그 근처에만 가도 아프고 쓰라릴까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라, 곧 낫겟지 하면서 그 근처에 어슬렁거리며 아 봐라 안 아프네. 할 줄 안다. 그러다보니 금방 낫는 느낌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 정도는 시련이긴 하지만 소소한 시련이라는 것을 안다.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므로. 내 삶이 당장 내일 위협받을 재앙이 닥친 것이 아니므로. 그러니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어도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눈이 쌓이다 말겠지. 조금 올 줄 알았는데 살짝 소복하게 오네. 그런 정도로 시련이 쌓였다가 조금씩 녹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시련들은 내가 가진 소중한 것들을 눈이 부시게 비춰주기도 한다. 이렇게까지 보고 싶은 가족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내가 깨닫지 못했던 그들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하루가 멀다하고 연락해주는 그들의 사랑은 또 어떤 것인지. 이렇게까지 하고싶고 원하는 일이 있다는 게, 그걸 갖고싶고 원하는 이 마음이 온전히 내가 누구인지와 맞닿아 있다는게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일인지. 내가 살아온 날들 동안 원했던 인정과 보상이, 남의 평가와 기준에 꼭 맞춰진 것들이었다는걸 돌아보면 정말 남들이 관심이라곤 가지지 않을 이것과 저것에 내가 마음을 쓰고 있다는게 참 기적같은 일이다.
날은 어둡고, 소복하게 흰 눈은 쌓이고, 그런데 주변이 반짝거리는, 평범한 겨울 밤이다. 따수운 날에 눈이 녹기 시작하면 언젠가 이 고요하고 반짝이는 밤이 그리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