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인류는 지구와 인류의 정보를 담은 레코드를 실은 보이저1호를 우주로 쏘아 보냈다. 인류와 비슷하거나 인류보다 고등한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보이저1호를 발견한다면, 우리은하의 한 귀퉁이에 태양라는 작은 항성이있고, 그 둘레에 인간과 수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는 지구라는 작은 오두막이 있다는 것이 알려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망망한 우주에 지구 하나만 생명의 행운을 얻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셀 수도 없는 항성계의 어느 행성에는 우리와 같은 지성체가 또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아직 만나지도 못한 그들을 우리는 외계인이라고 부른다. 류츠신의 [삼체]를 읽으면서 내내 드는 생각은.. 이미 보내버린 45년 전의 보이저1호를 어떻게 제거하나.. 하는 걱정이었다. 외계에 인간과 같은 지성체가 존재한다면 그들이 지구 문명에 호의적일 것이라는 기대는 어떤 근거에서 나오는가. 만일 외계 문명이 우리를 생존의 경쟁자나 위협자로 인식한다면 그 자체로 인류 문명은, 아니 태양계 전체가 멸망의 기로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 소설 삼체의 주요한 아이디어다.
삼체는 SF소설을 표방하는 듯 하지만 나는 심리학 소설로 읽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개인과 집단의 심리 형성과 변화를 인간과 우주 속 세계, 인간과 외계인, 외계인과 외계인의 사이에 있는 우주공간과 암흑 물질을 상징으로 하여 흥미진진하게 엮었다. (사실은 소설에서 다루는 물리학과 천문학 요소들이 나에게는 너무 수준 높아 때때로 따라가지 못한 이유도 있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고통이 채 가시지 않은 시대 '예원제'라는 물리학자가 있었다. 그녀는 문화대혁명에서 광기에 휩쓸린 홍위병들에게 물리학자인 아버지를 잃었고 살아남기 위해 남편을 버린 어머니 때문에 충격을 받는다. 예원제의 어머니는 상대성 이론과 빅뱅을 '반동' 이론으로 간주하는 홍위병들의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내면화한다. 인지부조화가 일어난 것이 분명하지만 그녀는 홍위병의 사상이 원래 자기 사상인 것처럼 입장을 결정하고 '반동' 이론을 가르친 남편을 고발한다. 아버지를 버리지 않은 예원제는 반동 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그곳에서 중국 정부가 비밀리에 추진하던 외계 지성체와 접촉하려는 프로젝트 '홍안 공정'에 투입된다. 문화대혁명 와중에 수많은 지식인이 반동의 누명을 쓰고 숙청되었으므로 - 실제로도 많은 지식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때문에 중국의 문화와 학문의 발전이 상당히 도태되었을 것이다. - 예원제는 귀중한 기초과학 학자였다. 그래서 반동이라는 낙인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에 영입된다. 그러나 예원제는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배신 때문에 자아에 큰 상처를 안고 살았다. 그 상처는 결국 아물어지지 않았고, 그 한은 인류에 대한 원한으로 확대된다. 수용소에서 벌목 노동에 동원되던 시절 예원제는 우연히 살충제가 자연에 미친 해악을 고발하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는다.
"레이첼 카슨이 쓴 인간의 행위 즉 살충제 사용은 예원제가 보기에 정당하고 정상적이며 적어도 중립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대자연의 시각에서 보면 이 행위는 문화대혁명과 별 차이가 없었다. 우리 세계에 미치는 폐해는 마찬가지로 심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보기에 정상이거나 심지어 정의라고 생각되는 인간의 행위 중 사악한 것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그런 추론이 그녀를 두렵게 했고 공포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했다."(삼체1편 중에서) 급기야 예원제는 지구 문명의 주축이 인간이라는 사실 그 자체를 죄악시 하기에 이른다.
홍안 프로젝트의 거대한 안테나를 관리하던 그녀는 어느 날 잔잔한 우주배경복사에 섞인 잡음을 수신한다. 외계인의 메시지였다. 지구 문명과 함께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삼체 문명이었다. 태양계에서 약 4.3광년 떨어진 알파 센타우리 항성계의 행성에 지성을 가진 외계인이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삼체 문명에서 보낸 메시지는 '연락하지 말자.'라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너희가 대답하지 않으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너희 메시지를 수신한 나는 다행히 이 문명의 평화주의자다. "대답하지 마라! 대답하지 마라! 대답하지 마라!" 섬뜩한 뉘앙스의 메시지에 예원제는 당황하지만 결국 삼체 문명에 지구인을 멸망시켜 달라는 대답을 송신하고 만다. 지구인은 지구를 지배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삼체인들은 지구 정복의 원정을 결정하고 압도적인 무력과 과학기술로 지구에 선전포고한다.
몇몇 블로그들을 살펴본 결과 세밀한 과학적 고증에 문제가 있는듯 하지만 물리학과 천문학적 지식이 부족한 나에게는 굉장히 재미있고 짜릿한 여행이었다. 언젠가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나에게는 좌절감을 줄만큼 해박한 저자의 과학지식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성에 차지 않았나보다. 어쨌거나 더 재미있게 읽으려면 모르는 과학이론이나 용어가 나오면 검색하고 공부하면서 읽는 것이 더 낫다.
우주에 인간 외의 문명이 있다면 인간보다 월등한 지능과 지식과 기술을 가진 존재들 일수도 있고 인간보다 기술적 진보가 덜 된 존재들이 있을 수도 있다. 인류가 문명이라 할만한 것을 만든 지 겨우 1~2만 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지구인의 문명은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티끌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주의 나이, 아니 지구의 나이와 비교해도 인류는 존재한 시간 자체가 아직 찰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주에 수많은 문명세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확률적으로 지구인의 문명은 갓난 아기 수준일 가능성이 높다. 지구에서 관측할 수 있는 우주는 지구에 도달한 빛에 의한 것들이다. 아직 지구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빛보다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외계는 지구에서 영원히 관측 조차 할 수 없는 우주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은 항성계인데 지구에서 관측할 수도 없는 우주는 그보다 더 클 것이다. 우주는 인간이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캄캄하다. 우주에서 태양계는 정말 작은 존재다. 태양계에서 지구는 정말 작은 존재다. 지구에서 인간은 정말 작은 존재다.
우리 뇌는 아름다운 우주를 동경하고 별에 대한 낭만을 갖고 있지만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우리 뇌가 원시인의 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의 진화 단계이기 때문이다. 의미있는 진화가 일어나는데 최소 2만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2만 년 전 인류는 이제 막 문명이라고 할 만한 사회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현대인의 뇌는 그 당시 인류의 뇌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지구인보다 월등한 지능의 외계 문명이 있다면 반짝이는 별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지구인은 나방이 불빛에 홀려 날아드는 것과 비슷해 보일지도 모른다. 삼체 문명이 지구에 보낸 선전포고는 "너희는 벌레다!"이다. 1권에서는 이것이 단순히 기술의 격차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권, 3권을 읽으면서 좀 더 심리적이고 계급적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반드시 타인과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내가 지구라면 타인은 각자 자신의 항성계에 살고 있는 행성들이다. 나는 우주의 한 점이지만 내 인식은 항상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착각을 하게한다. 내가 인식한 세상은 순수한 세상이 아니다. 내가 인식한 타인은 순수한 타인이 아니다. 좋은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거나 잘생긴 사람이거나 못생긴 사람으로 판단한 대상이다. 아주 작은 가치 판단도 없이 순수하게 그 자체로 보겠다고 안간힘을 써 보아도 안된다. 불가능하다. 우리의 타고난 인식의 구조가 그렇게 생겼다.
우리에게 타인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죽고 약 2200년 뒤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외쳤다. 인간에게 타인은 중요하지만 우리 각자는 타인의 본심을 완전히 알 수 없고 타인도 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바로 옆에 있는 이웃과도 수십 광 년 떨어진 별처럼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수많은 외계 존재들을 가정한다면 그들 가운데 무서운 공격성을 가진 존재들이 없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 있을까. 지구의 나이가 46억 년이라고 하는데 만일 지구의 나이가 47억 년이었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1억 년 미래를 살고 있을 수도 있었다. (인류가 1억 년 뒤의 지구에서도 계속 존재할 수 있을지는 생각하지 말자.) 아니 딱 1만 년 만 더 오래되었다고 한다해도 아득하다. 지금보다 1만 년 더 진보한 인류의 과학기술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렵다. 외계에 우리가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지성체가 과연 존재할까? 소설 삼체에서처럼 태양계에서 4.3광년 떨어진 곳에 외계인이 살고 있을 수도 있다. 그 행성에 적응한 고도의 지성체가 어떤 방식으로든 문명을 이루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지구인이 상상도 못 할 수준의 높은 지능을 가진 존재들이 외계에 있다면 과연 그들이 항상 호의적일 것이냐는 것이다. 그 행성의 나이가 47억 년이고 지구와 유사한 형성과정을 거쳤다면? 인간보다 1억 년이나 더 긴 문명을 형성하였다면? 우주에 반짝이는 별들을 낭만적인 감정으로 사랑하는 인간의 그 모습이 벌레의 수준으로 보인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인간은 흔히 타인을 경멸하거나 내가 더 우월하다고 느끼지 않는가! 우리의 다름은 그 차이가 수만 수억 년의 문명적 차이처럼 이해 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우리 각자는 모두가 지구다. 타인은 거리도 시간도 가늠할 수 없는 멀고 먼 별이지만 나의 기준으로 그들도 이러할 것이라고 단정한다. 내 마음 속 그 판단이 관계를 '천국'과 '지옥'으로 만든다. 타인에 대해 나는 결코 알 수 없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생각일 뿐이고 그것은 이해라기보다 믿음에 가깝다. 작가는 거대하면서도 구체적인 우주 문명 간의 갈등을 그려 내면서도 단 한 번도 문명끼리 서로 직접 대면하는 장면을 만들지는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을 만나지도 않고 내 상상으로만 사랑하기도 하고 갈등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동경하기도 한다.
작가 러셀 T. 데이비스는 "작품에서 좋은 대화는 두 독백의 충돌이다. 누구나 언제나 항상 자기만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삼체의 우주 문명 간 충돌 스토리는 인류 역사 속에서 일어난 문명 충돌과 각 국가에서 일어난 세력과 사상의 충돌을 비유하는 슬프고 두려운 서사를그린 훌륭한 작품이다. 내가 소속된 집단과 내가 소속되지 않은 집단 사이의 갈등, 그리고 개인과 개인 간의 갈등이 역사에 남은 저 상처들과 어떻게 다른 지 고민해 본다. 인간은 타인을 지옥이라고 여기면서도 타인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나 애정 때문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시 타인을 내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지금도 우주를 향해 화성 정복이니 달 정복이니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않나. 그곳에 생명체가 존재하는지 탐사하면서 말이다. 만일 언젠가 인류가 빛의 속도로 우주를 비행하여 다른 항성계에 도달할 능력을 가진다면, 그리고 그곳에 인류보다 뒤떨어지는 문명이 존재한다면 그 별과 그 생명을 사랑하여 공존하려고 할 것인가, 식민지화하려고 할 것인가. 원시인의 뇌에서 아주아주 미미하게 발전한 뇌를 가진 인류의 권력과 집단 의식은 정복을 선택할 것이다!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와 아프리카가 인류 문명사 속에서 어떤 끔찍한 역사를 겪었는지 기억해보자.같은 인간 조차 노예로 삼은 종족이 인간이다. 현대인은 의식이 진보하여 다를까. 여전히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서 고통을 만든다. 내가 겪는 고통일수도 있고 나 때문에 타인이 겪는 고통일수도 있다. 우리는 여전히 나를 위해 타인과 세상을 존재하게 하려는 욕망의 본성에 더 강한 지배를 받는다.
다만 고도로 진화한다는 우주적 의미가 상호 존중과 협력과 사랑이기를 바랄 뿐이다. 사랑이 우주의 존재를 관통하는 진화의 법칙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주의 각 문명은 소설에서처럼 암흑 속의 서로를 두려워하는 감정적 경계심에 꽁꽁 묶여, 서로 만나는 즉시 전쟁과 파괴로 대응할 것이다.그렇다면인류의 뇌가 궁극적 사랑으로 진화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 원시인의 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의 중요성을 알고있다. 호모 사피엔스의 원시적 육신과 뇌를 가지고도 진화의 끝에 도달한 거룩한 성인들도 배출했다. 인류는 원시 뇌를 제어할 수 있는 이성의 뇌를 가지고 있다. 그것도 역시 원시인일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생물학적 '진화'는 아닐지라도 문자를 발명하고 글을 쓰고 읽으면서 폭발적으로 '진보'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삼체 문명의 공격에 속절없이 당하는 지구 문명에 대한 상상이 같은 지구인으로서 안타까울 것이다. 공존을 선택하지 않고 공격을 선택한 삼체인이 원망스럽고 적개심이 들 것이다. 뜻밖의 지구의 반격이 통쾌할 것이고 그러다가 또 지구인들의 어리석은 선택에 분통이 터질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그것은 사실 우리의 인생이다. 누구도 완전하지 않고 나와 타인의 불완전은 극복될 수 없다. 공존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그것이 완벽한 정답이다. 그러나 모두가 이 완벽한 정답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자기 중심성은 남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공감능력이 되기도 하고 남을 내 기준에 맞추려는 폭력성이 되기도 한다. 그리스 신화의 강도 프로크루스테스는 납치한 나그네를 자기 침대에 눕혀놓고 키가 침대보다 크면 그만큼 잘라버리고 키가 작으면 침대에 맞춰 늘였다지. 나에게 그러한 폭력성이 없다는 자만을 갖지 말자.
인류의 존재가 우주의 존재 앞에서 얼마나 작은지. 소설 삼체는 겸손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초대한다. 인류의 눈에 압도적이고 거대한 삼체 문명도 끝없는 우주에서 아주 미미한 점에 불과했다. 인간들이 무엇 때문에 다투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반성하자는 초대다. 우주에 다녀온 사람들은 지구가 하나이고 인류 모두의 하나뿐인 고향이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한다. 권력과 이익을 다투는 인간 세계가 불행하고 어리석어 보인 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같이 인류애와 지구애에 불타는 삶에 투신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삼체를 읽고 우주에서 우리의 고향인 지구를 바라보는 상상을 해보기를 강력히 권한다.본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지구와 우주 앞에서 겸손하고 사랑이 충만해지는 경험을 하기를 권한다.
단, 보이저1호가 운석이나 소행성과 충돌하여 얼른 파괴되길 기도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음에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