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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꿀 Mar 17. 2020

(19) 엄마는 어쩌다 문구 덕후가 됐을까

결핍이 소유욕을 불러오다

아이를 키우며 의도치 않게 어릴 적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몇 달 전부터 꿀순이는 모든 물건을 가리키며 "꿀순이 꺼야"라고 말한다.  '소유욕'이 생긴 거다.


소유욕은 3세 아기의 발달 과정에 있는 자연스러운 욕구이다. 26개월이 된 꿀순이에게 '자기의 것'이라는 감정은 매우 소중하고 중요한 모양이다.


남편이 장난스럽게 꿀순이에게 말한다.


"꿀순이는 아빠 꺼야."


그러면 꿀순이는 눈에 힘을 팍 주고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야! 꿀순이는 꿀순이 꺼야!"

 모습이 기막히고 귀여워서 웃고 만다.


#

꿀순이를 보면 어릴 적 내 모습이 생각난다.

유달리 '내 것'에 대한 소유 욕구가 강했던 나.


3세 아이의 특성 중 하나인 '소유욕'. 이 시기를 보내며 아이는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이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게 "내 거야"하며 쥐는 물건을 강제로 뺏거나 '욕심쟁이'라고 혼내며 무안 주는 일.

소유욕을 풀지 못한 아이는 삐뚤어진 소유욕을 갖게 될 위험이 있다. 자기 물건에 대한 지나친 집착 같은 게 아닐까.


어릴 적 내 모습을 생각해보면 나는 너무나도 강한 소유욕을 가진 아이였다. 그 이면에는 필시 '욕구불만'이 있을 것이다. 우리 집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갖고 싶어도 갖지 못는 게 많았다.


언니, 오빠가 '알아서 포기하는' 착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면 나는 정반대였다. 지나가다 언니 오빠들이 가방을 메고 소풍을 가거나 삑삑이 신발을 신고 있으면 그 자리에 바로 드러누워 "사줘! 사줘!" 뒹구는 아이.


그 시기에 장사를 했던 엄마는 너무 바빴다. 처음엔 떼쓰는 엉덩이에 맴매하기도 했지만 결국 날 감당하지 못해 원하는 물건을 사다 안기곤 했단다. 지금 꿀순이 나이와 비슷한 3살 무렵의 일로 추정된다.

(맙소사,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였어)


어린 나는 '떼쓰기'라는 요령을 배웠고, 그게 먹히는 바람에 언니 오빠에 비해 많은 것을 갖고 누렸다. 그런데도 근본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사랑이었을 것이다. 부모가 날 사랑하지 않았단 뜻이 아니다. 다만, 먹고 사느라 바빠 자녀에게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줄 여력이 없었을 뿐.


자식에게 밥 세끼 먹이는 게 사랑의 표현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나 역시 부모님이 어려운 형편에도 우릴 떠나지 않고 먹이고 입혀주었다는 것에 감사한다. (실제로 열심히 사는 부모 덕에 마음을 허투루 먹지 않았다)


이렇게 쓰다 보니 좀 재밌는 구석이 있다. 나는 80년대 태어났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언니, 오빠와 같은 70년대의 감성을 나눠갖고 있다. 아마 제주의 시골 마을에서, 어렵게 자라서 그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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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한 시절을 나는 할머니와 살았다. 6살에서 초등 저학년까지의 이다. 이런 이별은 우리 집에서 몇 해 터울로 한 번씩 해프닝처럼 일어. 매일 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우는 내게 할머니는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년"이라 혼냈다.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면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느낌이다. 슬픔과 외로움 같은 게 꽉 들어찬 아이. 


어린 나는 자주 외로웠고 심심했다.(심지어 유치원도 안 다녀서 더 그랬을 것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유치원 마당서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 떼를 썼단다)


결국, 가구가 몇 안 되는 용한 시골 동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랬다. 학교에 간 언니 오빠를 기다리며 경운기에 올라동화책을 '읽는 척'하거나 동네를 하릴없이 돌아다니거나 바닷가에서 보말을 잡거나. (아,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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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마음에 채워 넣을 게 필요해서였을까. 어릴 적의 나는 갖고 싶은 게 무척 많았다. 그래서 뭐든 기회가 되면 손에 꼭 쥐고 놓지 않았다.


유독 문구에 대한 소유욕이 강했다. 시험에서 100점 받으면 부모가 문구 세트라던가 연필깎이, 예쁜 가방을 사준다고 했다던 친구들이 가장 부러웠다.


어느 날은 친구 생일파티에 갔다가 친구가 몇 장 낙서하고 버리려던 공책을 '득템'하기도 했다. 집에 가져가 낙서한 앞장을 칼로 반듯하게 잘라 일기장으로 썼다.


'공책을 찢어 쓰는 건 나쁜 행동이에요.'


기 아래 적힌 선생님의 글에 나는 몹시도 억울했다. 잘못 쓴 글을 지우개로 지우는 게 귀찮아서, 낙서 흔적을 지우려고 공책을 찢은 게 아니란 말이다. 누가 버리려던 멀쩡한 공책을 '아. 나. 바. 다'해서 쓰고 있는 건데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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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가 되어서는 내방이 몹시도 갖고 싶었다. 간절한 소원이었지만 동시에 이룰 수 없는 꿈이기도 했다. 당시 할머니 집은 단칸방이었고, 부모님 댁 역시 방이 딱 두 개뿐이었으니까(방 하나는 오빠 몫).


멀고 긴 등하교 시간, 지루함을 달래는 건 '예쁜 집'을 상상하는 거였다. 침대, 책상이 들어찬 내 방. 냉장고엔 먹을거리가 가득 넘치는 풍요로운 집.


현실적 여건 탓에 내방을 가질 수는 없었지만 나는 어느 곳에서든 내 공간을 만들었다. 방 한구석 작은 밥상 위, 방과 부엌으로 가는 작은 길목. 그리고 집 밖에 삼촌 방으로 썼던, 지금은 창고처럼 버려진 곰팡이 가득한  방.


나는 끝끝내 어엿한 방을 갖지 못하고 어른이 됐만 어디서든 내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됐다.


#

그러나 문구에 대한 욕심은 여전하다.

우리 집엔 서랍장이 여러 개 있는데 그 안에 각종 문구가 가득 들어차 있다. 노트, 펜, 수첩, 스티커 등 목록별로 서랍이 다르다.


가장 많은 칸을 차지한 건 '노트'다. 여행을 하거나 문구점에 갈 때마다 예쁜 노트가 보이면 망설이지 않고 구매했다. 그  정도 구매할 경제력은 갖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된 것이, 경제력을 갖게 된 것이 몹시도 좋았고 지금도 그러하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참 많은 것을 열성적으로 모아 왔다. 지금은 사라진 비디오테이프(영화광이었던 한때의 취미다. 머지않은 근미래에 DVD가 나올지 시골뜨기 애송이가 어찌 알았겠는가.), 약봉지나 예쁜 포장지(왜 그랬는지 이해불가), 예쁜 문구들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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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생각한다. 내가 죽은 후 남겨진 이것들의 운명을.


그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친할머니다.


18살 때, 친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기 전, 동네 할머니들이 짐 정리를 도우러 오셨다. 그런데 자꾸만 옷을 정리하며 우리 할머니 흉을 봤다.


무슨 할머니가 옷이 이렇게 많냐는 거였다. 식솔은 많고, 고정적인 돈벌이는 없는 주제에 뭔 옷을 이리 샀냐는 거다. 생각해보니 우리 할머니는 멋쟁이였다.


듣다 보니 화가 났다. 아니, 돈 없으면 옷도 거지처럼 입어야 하나? 해봤자 오일장이나 시장에서 샀을 옷들인데.


듣다 못한 나는 언짢은 기색을 담아 할머니들에게 싫은 소리를 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작은 엄마가 나더러 "아까 그렇게 얘기하니 내 속이 다 시원하더라"라고 말한 것만 기억난다.


#

나 역시 죽고 나면 사람들은 내가 쌓아놓은 물건들을 보며 혀를 찰지 모른다. 책방을 하는 것도 문구점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이런 많은 물건을 쟁여둔 거냐고. 결국 아끼다 똥 되지 않았냐고.


"나중에 꿀순이가 크면 물려줘야지"


이렇게 소비를 합리화하지만 잘 알고 있다. 꿀순이의 취향이 아니라면 이것들은 도루묵이 되고 말 것라는 걸.


또, 나부터가 누군가가 내 것을 손대는 걸 받아들일 준비가 안됐다는 것도 잘 안다.


요즘 부쩍 키가 큰 꿀순이는 자꾸만 까칠 발로 높이 올려둔 나의 '잇템'들을 건든다. 마스킹 테이프, 수첩, 펜 등등.


"안 돼! 그거 엄마 야'"

"아니야! 우주 야!"


맙소사, 서른 후반의 내가 세 살 딸이랑 싸우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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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소유욕, 그 안을 들여다보면 어린 시절 '결핍의 구멍'이 깊다.


아이를 보며 생각한다. 결핍 없이 성장할 수 있도록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주어야 할까?


정답은 노(NO)


결핍 없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물질적인 풍요가 사람을 완벽하게 만들어준다면 재벌 2세들이 목숨을 버리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결핍은 목적을 쟁취하기 위한 동기부여가 되고, 정도의 삶을 깨닫게 하는 가늠자가 된다.


나는 꿀순이가 결핍을 아는 아이로 컸으면 좋겠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마음 아프고 때론 미안하고 걱정스러울 것이다. 그래도 삶이 그런 것을 어쩌겠는가. 갖는다고 채워지는 게 아닌 것을.


결핍에 대한 기준은 있다. 물질적 결핍이 아닌 정서적 결핍은 덜 겪도록 사랑을 듬뿍 주려고 한다. 사랑이 가득한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완벽할 순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의 나는 자주 공허하고 외로웠다. 그러나 그 덕분에 작가가 됐다. 날 작가로 만든 90%의 질료가 어린 시절의 결핍이라 나는 믿는다. 나를 치유하고 보듬기 위해 동화를 쓰기 시작했으니까.


그나저나 죽기 전에 덕질한 문구들, 열심히 써야겠다. 또, 주변에 선물도 많이 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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