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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꿀 Apr 01. 2020

(21)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

'N번방 사건'에 대한 단상(1)


한동안 브런치 연재가 뜸했다. 그 시간에 열심히 동화를 썼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겠지만 실은 'N번방 사건' 때문에 깊은 좌절감과 의욕 부진을 겪는 중이었다.


"과연 이 땅에 아이를 내놓는 게 잘하는 일일까?"


둘째 출산을 2주일 남겨둔 '임산부'로서  하나마나한 말이란 걸 알면서 이렇게 반문해온 것이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살기 좋은 세상을 물려줄까?'라는 희망찬 생각과 계획은 뒷전이었다.




임신을 결심한 이유


 그동안 아이들이 가진 생명력과 힘을 믿어왔다. 부모들이 염려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살아갈 테니 그들을 격려하고 믿어주는 게 어른들의 몫이라 여겼. 그래서 '저출산 시대' 통계 기사에 으레 달려 있는 댓글들("아이들 키우는데 수십억이 들고, 부동산 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성범죄자들은 넘쳐나는 시대에 아이 낳은 사람들이 멍청하거나 미친거지")을 보고도 기꺼이 아이를 낳아 '멍청한 부모'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내가 그러했듯, 아이들도 저마다의 방법으로 삶을 꾸려갈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정글 같은 세상에 내놓으면서도 미안하지 않았다. 한때 아이였던 나도 사랑을 품고 베푸는 어른이 되었는데 우리 아이라고 못할까? 분명 나보단 잘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부모의 역할도 제법 자신 있었다. '돈 많은 부모'는 아니지만 '열심히 사는 부모'라 여겼고, '타워팰리스'에 살고 있진 않지만 층간 소음 걱정 없는 '튼튼한 집'에 살고 있으며, '최고'는 아녀도 '최선'을 주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출산이 두렵지 않았다. (아니, 두려움을 이겨냈단 표현이 맞으리라.)



그러다 최근 언론에서 떠들썩한 'N번방 사건'을 접하고 그만 좌절하고 말았다. 어른으로서 이 땅의 아이들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물질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정신은 빈곤하고 병들어가는 세상. 이 땅의 아이들, 청년들이토록 심하게 병들어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한 명의 사람을 성적으로 유린하면서도 천박한 자본주의에 물들어 '돈을 내었으니 마땅히 서비스를 제공받아야 한다'는 합리화. 마치 게임을 즐기듯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데 거리낌 없이 가담한 수 만 명의 악행에 그저 할 말을 잊고 말았다.(그리고 한동안 악몽과 불면증이 이어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글이 나오지 않았다. 틈틈이 자리에 앉아 장편동화의 얼거리를 짜면서도 자꾸만 N번방이 튀어나왔다. 이런 시대에 글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갑자기 노쇠해진 기분이었다. 첫째 딸 꿀순이, 곧 태어날 꿀꿀이에게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악마 같은 어른들이 넘치는 세상에 태어나게 한 죄'.



혐오 시대


'N번방 사건'을 지켜보며 '혐오'가 얼마나 만연한 사회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인터넷의 발달로 언제 어디서든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자기 PR이 가능한 시대. 더 나아가 여성인권 역시 우리 부모 세대와 비교해 월등히 높아졌다(고들 한다). 그러나 아직도 불안하고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 이면을 파고 들어갔더니 '혐오'가 보였다.


'혐오'란 어떠한 것을 증오, 불길함 등의 이유로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감정이다. 원어를 찾아봤더니 '역겹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미워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어째서 이렇게 서로를 구역질이 날 정도로 미워하게 된 것일까?


노인 혐오, 남녀 혐오, 난민 혐오, 정치 혐오 등등. 혐오의 대상을 찬찬히 살펴보자. 우선순위만 다를 뿐, 그곳엔 우리의 가족과 이웃, 혹은 내가 위치해 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양새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미운 것'이라면 성인군자가 아니고서야 노력할 여지가 없다. 그저 최대한 혐오의 대상과 멀리 떨어져 지내는 수밖에.


하지만 어디 그럴 수 있는 환경인가. 우리의 주변에는 노인과 청년, 남자와 여자가 항상 존재하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왜 저들을 혐오할까?


우리에겐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혐오의 감정이 어디에서 올라온 것인지, 어떤 문제에서 시작된 것인지, 혹시 누군가가 부추긴 감정이 아닌지, 해결해야 할 각자의 과제와 성찰의 주제를 혐오의 프레임에 가둬버린 것은 아닌지.


우리는 나 자신이 언제든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틀딱'이라 비난했던 노인은 젊은 나의 미래이고, 결혼해 아이를 낳는 순간 여성들은 '맘충'의 길로 접어들며, 우리나라가 파산하여 사라지는 순간 우린 '난민'이 될 수 있다. 이렇게 타인과 관계에 대한 상상력을 지닌다면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덜 미워할 수 있을 텐데. 너무나 낭만적인 생각이려나.


남녀 혐오의 결정체가 바로 N번방 사건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실제로 몇몇 남성들은 이 사건을 통해 한국의 모든 남성들을 범죄자 취급했다며 분노했고, 나아가 돈에 눈이 멀어 자신의 모습을 촬영해 넘긴 여성들의 행동과 처신이 문제라 지적했다. 몇몇 여성들은 '역시나 한남'이라는, 문제의 근본을 넘어선 비난을 위한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미러링'은 결국 같은 결과를 낳고, 혐오를 위한 혐오는 결국 더욱 심한 혐오를 낳는다.



도덕 수준이 높은 우리의 이면


대한민국 국민들의 도덕적 수준은 꽤 높은 편이라고 한다. 실제로 외국인들이 한국인을 높게 평가하는 대표적인 도덕성의 사례가 있다. 바로, 카페에 노트북과 가방을 두고 화장실에 가도 잃어버리지 않고, 문 앞에 택배를 두고 가도 분실되지 않으며, 길거리에서 핸드폰과 지갑을 잃어버려도 높은 확률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정규 교육 과정에서부터 도덕과 윤리가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끊임없이 배우고 자랐다. 심지어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자 유교가 국교였던 나라가 아니던가.(물론 이 유교가 많은 것을 망쳤다고 생각하지만.) 교과과정에 '윤리'나 '도덕' 과목이 빠지지 않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외국인들이 감탄하는 도덕성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의 이러한 특성이 도덕성이 특별히 높아서라기 보다는 남을 의식하는 문화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남들 앞에 나서지 않고 요령껏 딱 중간만 가는 것이 모범인 문화에서 자란 이상, 사람들이 많은 공공장소에서의 절도나 범죄는 절대 해서는 안될 위험한 일이자 체면 깎이는 일이 아닐까. 그렇기에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공간에 숨어 폭력을 휘두르고 억눌린 감정을 발산하는 것이다. N번방 사건처럼 나보다 약한 자를 희롱하고 괴롭히며.



당신의 성인지 감수성은 어떤가요?


얼마 전 지인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나보다 어린 엄마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아파트 단지에 한부모 가정의 오누이가 있는데 누나가 남동생을 잘 돌봐요. 놀이터에서 늦게까지 놀기도 하고요. 그런데 딸아이가 저학년인데 옷 입는 것도 그렇고 신체적 발육도 그렇고 뭔가 섹시해요. 남자들이 왜 어린아이에게서 성적인 욕망을 느끼는지 공감되더라니까요. 친한 사이라면 옷을 제대로 입고 다니라 한마디 했을 텐데 그냥 참았어요.


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놀랐고, 절망스러웠고, 슬펐다.


이 사람은 N번방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만약 아들이 아닌 딸을 갖고 있다 해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저학년 어린아이를 섹시하게 바라보는 시선의 근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행여 내 생각을 얘기했다가 상대가 기분이 언짢아지거나 분위기가 어색해지거나 언쟁을 하게 될까 두려웠다.


하지만 분명히 얘기했어야 했다. 어린이를 섹시하다 여기고 성적 욕망을 갖는 어른의 시선이 문제이며 왜곡된 것임을. 그 시선의 근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찾아서 해결하는 게 필요할 것 같다는 진지한 조언을 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아득한 절망과 무력감 앞에서 비겁해지고 말았다.


그날 저녁엔 유독 생각이 많아졌다.


과연 N번방 가담자들만이 비판받아야 마땅할까. 혹시 그들을 악마라 몰아넣으며 내 안의 작은 괴물은 귀여운 살쾡이 정도로 여기는 건 아닐까.


우리 모두 반문해 봤으면 한다.



N번방 사건을 통해 어른들이 해결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선한 이들과 악한 이들을 무리 짓고, 가담자들을 혐오하는 것 이전에 성범죄에 대한 적정한 처벌 수위를 논의하고 사회적으로 합의해야 하는 것이다.


즉, 가해자들에게 합당한 벌을 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성착취 범죄에 대한 법적 형량을 강화해야 한다. 내가 저지르는 일이 세상에 얼굴이 공개되고 감옥에 갇힐만한 범죄라 인식한다면 선택에 앞서 무진장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


또한, 개개인의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상대의 성을 혐오하거나 왜곡하는 게 아닌 불균형의 지점을 이해하고 좁히려는 노력. 여자로서의 옷차림을 지적하는 게 아닌 왜곡된 성적 욕망을 품는 게 실은 병든 것임을 자각하는 일.


몹시 괴롭고 고단한 일이지만 그래야만 다수의 가해자를 낳은 n번방 같은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성인지 감수성?

성별 간의 불균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갖춰 일상생활 속에서의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을 말하며,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해 낼 대안을 찾아내는 능력까지도 포함한다.

* 말랑말랑한 글을 쓰며 힐링하는 게 본 매거진의 컨셉이었지만 이번 사건을 대하면서는 절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쓰다 보니 너무 심각해졌고, 개인적 생각을 일반화해 궤변을 늘어놓은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네요. 이번 글을 통해 저 역시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복잡하고 힘든 마음을 남기고 싶었는데, 여러 생각과 문장들이 뒤죽박죽 부딪히다 어수선한 글이 되었습니다.


* 2편에서는 살면서 여자로서 겪은 위험한 순간들을 기록해보려고 합니다. 실은 이 이야기를 먼저 그렸다가 도입에서 너무 많은 얘기가 터져 나오는 바람에 글을 나누기로 결심 했습니다. 분명, 불편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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