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식은땀이 나며 몸살기운이 있어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쉬기로 했다. 점심으로 뭘 먹을 거냐는 남편의 말에, 몸이 이럴 때는 신라면을 먹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을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린 남편은 물을 끓였다. 라면을 먹을 때마다 어쩌면 이건 이렇게 항상 맛있을까, 생각했고, 간혹 남편과 함께 신라면을 만들어낸 이를 축복하기도 했던 나였는데 하얀 볼에 먹음직스럽게 담긴 라면을 휘저으며 냄새를 듬뿍 들이마시 다가 문득 이인스턴트 음식이 왜 나의 소울 푸드인지에 생각이 미처 약간 서러워졌다. 게다가 이 좋은 토요일 오후에 라면이라니. 그건 아마도 길고 가난했던 타국에서의 나의 시간 때문이겠지, 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려는 데 아차, 그건 그냥 자라면서 라면이 제일 맛있었기 때문이야, 하고 나는 스스로를 바로 잡았다.
얼마 전 서울에 갔을 때 엄마는 잡채며, 매운탕이며 동태 전이며 잔뜩 상을 차리고 왜 더 먹지 않느냐고 타박했는데 아무리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잡채와 동태 전이 아니라 얘기해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럼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뭔데? 하고 삐진 듯 되묻는 엄마에게 나는 숭덩숭덩 크게 자른 목살 넣은 김치찌개에 대해 얘기했으나 엄마는 공감하지 못했다. 아유, 그 느끼하지 않니?
외삼촌은 아냐 누나, 못살은 살코기라 부드럽고 느끼하지 않아, 하고 내 편을 들었다. 우리는 내가 사는 뉴욕의 원베드 아파트 거실보다 작은 암마의 방 두 칸짜리 반지하 전셋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이러한 전셋집도 남동생의 도움으로 겨우 마련한 엄마의 형편이, 그것을 돕지 못하는 나의 능력이, 혹은 능력이 있더라고 모른 척하고 싶을지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나의 마음이 모두 들고일어나 일렁일렁 속이 메스꺼웠을 것인데 이제 나는 (뭔지 모르지만) 괜찮았다.
쇠고기를 먹지 못하는 엄마는 고기 요리를 잘하지 못했다. 굽는 고기는 우리 집 식탁에 올라온 적이 없었고 미역국에는 조개가 들어갔다. 엄마는 자신이 닭띠라는 이유로 닭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닭고기 역시 우리 집 식탁에 올라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찌개나 국이나 탕을 항상 혼동하는 엄마의 찌개는 탕 같았고 국은 찌개 같아 나는 그 모든 것이 비슷한 모양에 비슷한 맛을 내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가 유일하게 잘하는 요리는 오징어를 넣은 동태찌개였다. (엄마는 동태와 오징어를 좋아한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음식도 먹어본 사람이 그 맛을 낼 줄 아는 법이었으므로, 음식에 큰 흥미가 없었던 엄마는 요리에 재주가 없었을뿐더러 특별히 노력하지도 않았고 (아니면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주는 늘지 않았으므로) 나의 식탁엔 보통 도시락용 조미김과 달걀프라이, 외할머니나 친할머니가 해주신 김치가 전부였다. 엄마는 간장과 소금을 쓸 줄 모르는 사람처럼 음식을 해 우리 집의 모든 음식은 생식과 별반 다르지 않아 슴슴하게 먹는 건강한 입맛을 키운 나는 이 부분에 관해는 엄마에게 항상 점수를 준다. 우리 집 식탁 사정을 잘 아는 엄마의 유일한 친구는 내가 놀러 갈 때마다 삼겹살이나 불고기전골, 제육볶음등을 해주시며 놀라 동그란 눈으로 식탁을 바라보는 나를 의자에 앉혀 밥을 두 그릇씩 먹이셨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동태 전이라도 여기는 데에는 엄마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그건 외삼촌이 장가를 간 지 얼마 안 되어 돌아온 설인지 추석인지 하는 명절에 내가 외할머니가 입에 넣어준 살살 녹는 동태 전에 순간적으로 마음을 빼앗겨 큰소리로 맛있다를 외쳤기 때문이다. 별로 예쁘지도 않은 외숙모에게 외삼촌을 뺏겨 심통이 나 있던 나의 마음을 아셨는지 외할머니는 손수 잔 가시 하나하나 발라낸 반투명 하다 시피한 동태살에 얇은 달걀물을 적셔 구워낸 동태 전을 평소와 달리 내 입안에 넣어주셨던 것이다.
참, 너는 닭발 좋아하잖아? 이제 곧 경로혜택을 받을 외삼촌이 서른 살 때와 변함없는 얼굴로 놀리듯 말한다. 엄마는 신나 하며 동참한다. 그래 그래, 얘가 어릴 때부터 시뻘건 닭발을 그렇게 좋아하는데..
내가 대여섯 살이던 무렵, 친할머니는 당시 비인기 부위이던 닭발을 헐값에 잔뜩 사와 커다란 들통에 놓고 익힌 후 지금으로 치면 맷단짠의 양념을 넣고 조려 나와 사촌 언니에게 간식으로 주시곤 했는데 나는 그 기막힌 맛에 흠뻑 빠져 내복을 입은 채 기름으로 뒤범벅된 얼굴을 하고 양손으로 닭발을 부여쥔 해맗은 사진을 여러 장 남겼다. 나는 친할머니가 해 주셨던 닭발을 잘 먹었을 뿐, 한 번도 내 돈을 주고 닭발을 사 먹어 본 적이 없다고 대꾸하며 나는 음식에 관해 매우 보수적인 취향을 가졌고 특수부위를 즐기지 않는다는 왠지 모를 항변을 길게 하였다. 엄마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나를 잠깐 보다가 과일이 요새 비싸다는 말과 함께 검붉은 포도를 싸구려 접시 가득 쌓아 내온다.
포도. 그래, 엄마는 포도를 좋아했지, 하고 나는 웃음이 난다.
엄마는 주전부리도 좋아했다. 새우깡이던 바나나킥이던 가리지 않는 과자 취향을 가진 엄마는 동네 슈퍼에서 세일하는 과자를 종류별로 사 오고는 숙제하던 내 등에 대고 맛있는 거 사 왔으니 먹으라고 약간은 들뜬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하던 일을 끝내야 직성이 풀리던 내가 숙제를 끝내고 나오면 과자는 이미 엄마가 다 해지운 후였고, 번번이 반복되는 일상에 나는 주전부리도 하지 않는 아이로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골골하고 예민하며 안 그래도 가리는 음식이 많던 나였지만 다행히 김과 달걀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변함없이 조촐한 엄마의 식탁에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단지 엄마가 집에 없으면 혼자 끓여 먹던 라면이나 가스레인지에 통째로 올려 데워먹던 참지캔의 맛에 중독되어 이런 인스턴트 음식이 나의 소울 푸드로 자리 잡은 것뿐. 한 가지 음식에 물리지 않는 성격은 이때부터 생긴 것일까. 유학 생활 초반, 약 일 년 가량 나의 점심은 학교 앞에 생긴 델리의 참치 김밥이었다.
우리 엄마가 요리를 못한다는 사실, 적어도 엄마의 요리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대학에 들어간 후에 밝혀졌다. 친구들과 밖에서 밥과 술을 사 먹는 일이 잦아진 후 나는 처음으로 순대 볶음을 맛보았고, 차돌박이 된장찌개를 먹어보았으며, 돌솥비빔밥에 매료되었고, 세상에 이렇게 다양하고 맛 좋은 음식이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이때부터 나에게 든 의문은 외할머니는 음식솜씨가 좋으셨다는 것인데, 아마도 홀어머니밑에서 삼 남매 중 장녀로 자란 나의 어머니가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하여 얼마 안 되는 월급일지언정 꼬박꼬박 돈을 벌어오는 가장 노릇을 하느라 요리하는 어머니와 보낼 시간이 없어 그랬던 것일까 생각하며 열 여덦의 엄마를 상상하고 이해해 보았다.
밥을 먹는 일이 단순히 내 몸이 사용해야 하는 에너지를 만드는 목적을 다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놀라움, 행복을 줄 수 있는 가장 일상적인 행위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 것은 그러나 한 참 후였는데 어릴 때부터 음식에 큰 애정을 가지며 자란 남편과의 결혼생활의 영향이 컸다. 타국에서 시작한 독립은 어떻게 하면 가장 저렴하게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지의 고민과 매일 함께였고 이 고민의 많은 변주가 오랜 시간 나의 일상을 장악했다. 직접 밥을 해 먹는 일은 사 먹는 음식에 비해 월등한 경제적 가치를 지녔으므로 나는 요리를 해야 했고, 서서히 만들 수 있는 음식의 가짓수가 늘었으며, 새로운 음식을 마스터했는데 그것을 나누고 싶어 친구를 초대했고 그 즐거움과 함께 음식의 맛이나 가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늦깎이 대학원 졸업장을 받던 작년 봄, 엄마는 생에 처음으로 장거리 비행기에 올랐고, 남편과 내가 빌린 에어비앤비에서 버섯볶음이나 오징어채, 무말랭이무침 같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반찬을 우리와 사돈어른 앞에 해 내놓았는데 그것들이 보기에도 먹기에도 좋아 나는 놀라워하며 수선스레 엄마를 칭찬했다. 엄마의 성장한 요리솜씨가 오래 자리에 누웠던 외할머니에게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음식을 드리려고 시도한 효심 덕분인지 전업주부 생활을 청산하고 몇 푼이라도 벌기 위해 출퇴근을 하며 점심 저녁을 사 먹은 빈곤한 사정의 결과인지 나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버섯볶음의 레시피를 물어보아 엄마가 자랑스러운 웃음을 짓게 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