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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Dec 16. 2017

지상과 유리된 그들만의 세계

비포 선라이즈, 빈 - 프라터 놀이공원

놀이공원에서 관람차는 특이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요란하고 시끄러운 놀이공원에서 관람차는 저 혼자 우뚝 솟아 고고하게 돌아간다. 그렇게 느릿느릿 돌아가는 관람차에 올라 바라보는 세상은, 한없이 평화롭다. 적막이 뒤덮은 공간, 세상과 단절된 공간. 관람차 안은 그렇게 또 하나의 세계가 된다.


그 작은 세계 안에,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이 있다. 노을 지는 빈의 모습이 내려다보이는 로맨틱한 공간에서, 제시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하다가 주저하며 횡설수설한다. 셀린은 속내가 뻔히 보이는 그의 서투른 모습이 그저 귀엽기만 하다. 그녀는 말을 돌리며 횡설수설하는 그에게 다가가 목에 팔을 감으며 말한다.

“나한테 키스하고 싶다고 말하려는 거야?”


얼마나 당돌하면서도 멋진 여자인가. 제시는 귀엽게 고개를 끄덕이고, 이 귀여운 연인들은 그렇게 하나의 세계 속에서 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노을 지는 빈, 관람차, 그리고 사랑하는 두 남녀. 영화에서의 이 장면은 도저히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고요한 관람차에서 오직 서로의 숨소리만이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우던 그 순간, 제시와 셀린이 서로를 바라보던 그 눈빛은 명백히 사랑이었다. 영화 속 둘의 눈빛은 강렬하고 부드러웠으며, 달콤했다. 셀린은 당당하고 매력 넘치는 여인이었고, 제시는 소년 같은 풋풋함을 지닌 남자였다.

프라터 놀이공원은 오랫동안 빈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는 장소다. 예전에는 오스트리아 황제 일가의 사냥터로 쓰였으나 1765년에 일반에 공개된 후, 각종 위락시설과 카페, 레스토랑 등이 들어서면서 빈 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휴식처가 되었다고 한다. 둘이 탔던 프라터 대관람차는 189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빈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이곳에서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놀이기구다.


그러나 놀이공원이라는 얘기를 듣고 우리나라의 롯데월드나 에버랜드를 생각하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프라터는 앞서 나열한 놀이공원들에 비하면 놀이공원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규모다.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종종 눈에 띄었지만, 겨울이라 그런지 다수의 놀이기구는 영업을 하지 않는 상태였다. 철이 지나 인적이 드문 계절의 놀이공원은 그 전에 들렀던 공동묘지만큼이나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프라터 놀이공원은 오직 입구의 대관람차 주변만 사람들로 북적였다.


짧은 대기시간 뒤에 탑승한 관람차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한 번에 여덟 명 정도의 인원이 함께 탈 수 있었는데, 가족단위의 손님과 커플들이 가장 많았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혼자 사진을 찍었다. 함께 탄 중국인 가족들이 나를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긴, 동양인 남자가 먼 타국 땅에서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한 손에는 커다란 사진기를 든 채로 계속 사진을 찍고 있다면 누구라도 쳐다볼 수밖에 없었을 테다.


그곳에서 사진을 찍는 과정은 그들의 로맨스만큼 달달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과정이었다. 실내는 약간 소란스러웠고, 나는 혼자였다. 창밖으로는 천천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다소 쓸쓸한 빈의 저녁이었다.

난생 처음 만난 이 낯선 두 남녀가 반나절 만에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의 얘기를 해나가는 것처럼, 때로 우리의 어떤 이야기들은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기에는 적절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지 못한 이런 이야기들은 영영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속에서 흐릿해져간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완벽한 타인에게 우리의 비밀을 더 쉽사리 털어놓곤 한다. 나와 아무런 연고도 없고, 다시 만날 가능성도 적은 그런 사람들. 어쩌면 낯선 곳에서의 이 같은 만남은 그래서 더 매력적일지도 모른다. 


하여, 우리는 낯선 여행지에서의 새로운 만남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일종의 고정관념이나 배경지식 없이 보이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 가슴 깊은 곳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이는 어쩌면 내 옆의 가족이나 친구, 연인이 아니라 유럽 횡단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완벽한 타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여행지에서 마치 고해성사처럼 낯선 이에게 내 이야기를 마음껏 털어놓고 위안받는다. 여행지에서의 우리는 때로 완벽한 타인에게 자신만의 고해성사를 치르기도 한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게 기뻐.
그리고 너의 나쁜 점을 말해줄 사람을 내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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