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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Dec 09. 2017

작은 레코드점, 둘 사이의 공기

비포 선라이즈, 빈 - 알트운트노이 레코드점

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이에게 첫 눈에 강렬한 끌림을 느끼는 일. 모든 여행자들은 여행의 길 위에서 이 같은 낭만적인 판타지를 꿈꾼다. 그리고 여기, 두 남녀가 이 같은 판타지에 온 몸을 던지는 영화가 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1995년작 <비포 선라이즈>. 각자의 목적지인 파리로, 빈으로 가기 위해 올라 탄 기차에서 만난 셀린과 제시는 제시의 목적지인 빈에 다다랐을 때, 불현 듯 함께 내려 낯선 도시에서 하루의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즉흥적으로 함께 빈을 여행하게 된 두 사람은, 발 닿는 대로 도시를 돌아다니다가 트램에 올라타 알트운트노이(ALT&NEU)라는 빈의 한 레코드점으로 향했다.

레코드점에 들어선 둘은 캐스 블룸(Kath Bloom)이라는 가수의 음반을 집어 들고 함께 청음실로 들어간다. 청음실은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서야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다시금 이 둘이 오늘 처음 만나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은 이들임을 상기시킨다. 그곳에서 둘은 1분가량의 시간 동안 딱 한 번, 겨우 0.1초가량의 시선을 교환한 뒤에 바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는 짐짓 태연한 척 서로를 흘끔흘끔 쳐다만 볼 뿐이다. 셀린의 시선이 느껴지면 제시는 일부러 천장을 바라보거나 딴청을 하고, 셀린 역시 제시가 쳐다볼 때면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렇게 수줍게 미소를 띠고 있는 둘의 모습 위로 캐스 블룸의 ‘이리로 와(Come Here)’가 흘러나온다. 만난 지 채 얼마 되지 않은 젊은 남녀의 어색함과 쑥스러움을 디테일하게 표현해낸 이 연출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옅은 미소를 짓게 만든다. 뻔히 옆에 있음에도 눈조차 마주치기 쑥스러워 시선을 회피하는 이런 둘의 모습이 내게는 이제 막 시작되는 사랑의 가장 순수한 모습과 풋풋한 마음을 영상으로 표현해낸 아름다운 장면으로 다가왔다. 누군가 내게 시작하는 사랑의 첫 모습을 물어본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 장면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둘이 함께 들어간 청음실은 아쉽게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청음실은 영화 속의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뒤 철거됐고, 둘이 집어 든 캐스 블룸의 음반 역시 영화를 위해 따로 제작된 것이었다. 따로 제작된 앨범 커버는 영화를 촬영한 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이 레코드점에 기증했고, 그 특별 제작된 앨범은 액자에 보관된 채로 나처럼 영화를 쫓아 이 공간에 온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런 몇 가지 사소한 점들을 제외하고, 레코드점의 내부는 영화에서 본 그대로였다.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고, 더 놀라웠던 사실은 대부분의 손님들이 나처럼 영화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실제로 레코드를 사러 온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런 손님들 사이에 섞여 있던 나는 누가 보더라도 영화 때문에 이곳을 찾은 여행객이었으리라. 그런 나를 본 직원은 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가와 〈비포 선라이즈〉를 통해 레코드점을 찾은 이가 궁금해할 법한 것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앞에서 언급한 캐스 블룸의 앨범과 청음실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전부 그가 들려준 것이었다. 점원의 친절함 혹은 기분 좋은 상술(!)에 감동한 나는 이곳에서 클래식 음반을 하나 구입했다. 어쩐지 음악의 도시 빈에서 사는 음반은 클래식 앨범이어야 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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