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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Dec 30. 2017

9년 만의 재회

비포 선셋, 파리 -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

<비포 선라이즈>에 이어 ‘비포’ 시리즈의 2부 격으로 탄생한 <비포 선셋>. 영화는 빈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두 사람이 재회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 제시가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출판한 책의 출판 기념회를 위해 파리에 방문한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불꽃같았던 둘의 첫 만남 이후 9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제시는 《This Time》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낸 유명한 작가가 되어 있었다. 그 출판 기념회에서 자전적 이야기냐며 묻는 기자를 향해 그는 모호한 답변을 되돌려준다.


“전 삶 속의 ‘만남’에 관한 얘길 글로 써보고 싶었습니다. 제 삶에서 가장 소중한 건 만남의 인연이었거든요. 그런 인연의 소중함을 글로 써보면 어떨까 해서……. 질문에 답이 됐나요?”


그리고 이 답변 뒤에 이어지는 기자들의 질문은 첫 영화가 나온 뒤에 사람들이 감독에게 던졌을 질문과 비슷했으리라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자전적인 이야기인가? 그 둘은 그래서 결국 6개월 뒤에 만나는가? 다음 작품은 있는가? 등의 질문들. 흥미로운 건 실제로 이 영화의 전작인 〈비포 선라이즈〉가 감독이 겪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감독은 영화의 시작에서 제시의 입을 빌려 차마 다 답하지 못했던 질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제시와 셀린이 9년 만에 만난다는 설정이 시작되는 파리의 이 작은 서점은 파리를 여행하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하게 되는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다. 노트르담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이 위치한 시테섬 옆의 센강변에 위치한 이 서점은 파리를 여행하다 보면 자연스레 지나갈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리고 만약 이 근처를 지나게 된다면, 서점 앞에 몰려 있는 사람들 때문에 호기심이 들어서라도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곳이기도 하다. ‘도대체 저 작은 서점에 왜 사람들이 몰려 있지?’ 하고 말이다.


이 서점은 <비포 선셋>,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2011)를 비롯한 영화의 촬영지로도 유명하지만, 파리에 최초로 생겨난 영미 문학 전문 서점으로도 명성이 자자한 곳이다. 앙드레 지드나 헤밍웨이 등의 작가들이 즐겨 찾았던 역사 있는 서점이기도 한 이곳에서 영화는 제시와 셀린의 재회를 그린다. 미국에서 온 제시와, 파리의 여인 셀린. 둘의 재회를 나타내기에 이렇게 상징적인 곳이 또 있을까. 온통 프랑스어로 가득한 파리 한 가운데 마치 영어의 섬처럼 위치한(파리의 한가운데에 영국 최고의 작가 셰익스피어의 이름을 딴 서점이라니!) 이 이질적이면서도 운치 있는 영미 문학 서점에서 둘의 재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미국 남자와 파리 여자의 9년 만의 재회를 다루기엔 더없이 적절한 장소처럼 보인다.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순히 <비포 선셋>이라는 영화의 촬영지이기 때문이었지만, 이 서점은 영화 촬영지로서뿐 아니라 그 자체로도 굉장히 매력적인 곳이었다. 서점에 들어서니 목조로 이루어진 건물의 곳곳에 배인 나무 냄새가 서점 특유의 종이 냄새와 뒤섞이며 후각을 기분 좋게 자극해왔다. 천장높이까지 빼곡히 꽂혀 있는 각종 서적들과 그 안에서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 이 작고 아늑한 책의 숲이 왜 파리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책과 사람이 작은 공간 안에서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서점은 늘 사람들로 붐볐지만, 그럼에도 본연의 역할을 고스란히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곳이었다. 책을 한 권 사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어차피 영어로 된 책을 읽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상징적인 의미로 한 권 정도는 샀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출판 기념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정신없이 답하던 제시가 문득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지난 9년 동안 잊지 못했던 사람이자 자신이 쓴 책 속의 주인공인 셀린이다. 9년 전 빈에서 헤어질 때처럼 서로를 향해 짧은 ‘안녕’을 말하며 인사하는 둘. 그러나 헤어질 때 두 남녀의 짧은 ‘안녕’에 수많은 말이 생략되었듯이 만날 때 서로를 향해 건넨 ‘안녕’이라는 안부 인사 속에도 역시 많은 말줄임표가 숨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 속에서 꺼내지 못한 말들이 너무 많이 쌓여버리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기도 한다. 9년의 세월이 흘러, 그렇게 둘은 담담한 듯 벅찬 듯 다시 재회한다.


그렇게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지나간 시간의 여백을 처음 만났던 그 시절처럼 긴 대화를 통해서 천천히 채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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