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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Jan 06. 2018

시간의 간극과 기억의 온도차

비포 선셋, 파리 - 프롬나드 플랑테

9년 만에 만난 연인은 애틋한 재회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다분히 둘 스러운 주제들로 9년의 간극을 메워가며 파리의 거리를 걷는다. 그렇게 둘은 프롬나드 플랑테(Promenade Plantée)라 불리는 산책로에 다다른다. 프롬나드 플랑테는 ‘가로수 산책길’ 정도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곳은 원래 근처의 바스티유 역에서 파리 동남쪽을 연결하던 철도가 있던 자리였다고 한다. 하지만 1969년 기차 운행이 중단된 후 방치되었다가 1980년대에 이곳을 녹지로 조성하는 사업을 시작했고, 1993년에 완공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프롬나드 플랑테에는 이곳만의 특징적인 철골 구조물들이 있는데, 이 독특한 디자인의 구조물은 기존에 있었던 철도의 모양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라고 한다.

프롬나드 플랑테를 걸으며 제시와 셀린은 9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운명적 사랑에 빠져 하룻밤을 보냈던 9년 전의 제시와 셀린은 이젠 더 이상 운명적 사랑을 믿기엔 조심스러울 것이 너무나도 많은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 그들은 산책로를 걸으며 대화를 하다가, 9년 전 빈에서 있었던 일을 제각기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둘은 같이 밤을 보냈지만 섹스에 대한 기억을 서로 다르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셀린은 그런 행위는 절대 없었다며 부인하고 제시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는데, 이 부분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섹스에 대한 기억이 어떻게 희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셀린이 제시의 말에 수긍하며 자신이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남녀가 나눌 수 있는 가장 내밀하고도 강렬한 행위를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고 흐릿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셀린은 일부러 기억나지 않은 척 거짓말을 한 것일까? 관객은 그저 어림잡아 짐작만 해볼 뿐이다.

그러나 이처럼 서로 같은 사건을 놓고 다르게 기억하는 일은 우리 주변에서도 비일비재하다. 보통 헤어진 연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비극은 바로 ‘기억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어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기억이 어느 누군가에겐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소한 일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행복했던 일이 상대방에겐 아무 일도 아니거나, 심지어는 고통스러웠던 기억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보통의 경우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기억이고, 추억일 뿐이다.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났을 때 벌어지는 재앙의 대부분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생겨난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과거 앞에서 무기력한 존재다. 한낱 평범한 인간인 우리는 절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역사를 바꿀 수 없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과거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이 억지로 기억과 추억을 미화하는 것은 어쩌면 과거의 기억에 대한 유통기한을 늘리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에 잠긴 채 길게 나 있는 산책로를 걷던 나는 ‘기억은 미화된다’라는 문장을 다시금 되새겨보았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낸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다른 무엇도 아닌 옆에 상대방이 아닌 함께하는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제시는 결혼을 했으며 셀린에게는 다른 남자 친구가 생겼다. 시간의 잔인한 면은, 무언가를 변하게 만든다는 자명한 진리에 있다. 그들은 더 이상 9년 전 첫눈에 반한 상대와 함께 기차에서 내리던 패기 넘치던 이십 대가 아니었다.


“내가 책을 쓴 이유가 확실해졌어.”

“뭔데?”

“저자와의 만남에 네가 찾아오면 꽉 잡으려고.”

“내가 올 줄 알았어?”

“책을 쓴 건 널 찾으려는 뜻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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