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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Dec 23. 2017

여행의 끝을 대처하는 올바른 자세

비포 선라이즈, 빈 - 알베르티나 광장

빈 오페라하우스(Operahaus)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알베르티나 광장(Albertinaplatz) 에서, 제시와 셀린은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헤어짐에 대해 생각한다. 둘이 함께 보낸 꿈같은 밤은 조금씩 지나가고 있었고, 아침이 밝아오면 둘은 헤어져야만 한다. 아름답고 슬픈 밤이었고, 둘에게는 붙잡아두고 싶은 밤이었다.


국립 오페라하우스는 유럽에서도 음악의 도시로 널리 알려진 빈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 중의 하나다.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 밀라노 스칼라 극장과 함께 유럽 3대 오페라 극장으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아름다운 외관뿐 아니라 내부 역시 각종 그림과 장식들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내부에는 들어가보지 못했다. 오페라하우스 앞에 위치한 알베르티나 광장은 빈 시내 중심의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어 사람이 많을 거라 생각했으나, 한밤중의 광장은 기대 이상으로 한산했다. 그곳에는 나를 포함해 열 명도 채 안 되는 사람들이 저마다 환하게 불을 밝힌 오페라하우스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행은 짧고 현실은 길다. 낭만은 케이크처럼 달콤하지만 끝 맛은 그 당도만큼이나 텁텁하다. 둘의 만남은 여행지에서 만난 운명적 만남이었기에 꿈만 같았고, 그랬기에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꿈처럼 끝나버릴 짧은 만남이기도 했다. 이 만남의 유통기한은 겨우 하루, 혹은 한 달 정도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곳에서 자기들 앞에 닥칠 이별을 생각했다.


그러나 둘은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마주하기로 한다. 작별인사를 미리 연습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어떤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다. 그 모습은 우리가 여행이 끝난 뒤 현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올바른 답변이기도 하다. 여행은 짧고, 언젠가는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끝나지 않는 여행이란 세상에 없으니까. 끝나지 않는 여행이란 그저 방랑에 불과할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언젠간 돌아가야 할 현실을 향해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용기와 대담함을 갖춰야 한다.

영화 속 두 연인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이 진리를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아직 오지도 않은 이별의 순간을 생각하며 우울한 감정에 휩싸인 채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망치는 대신, 그날 밤을 아주 멋진 밤으로 만들기로 다짐한다. 그건 현실을 똑바로 마주한 자들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한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서서히 아침이 밝는다. ‘동이 트기 전’라는 뜻의 영화 제목처럼 한정된 시간 동안 아름다운 순간을 보낸 그들이 이제는 서로를 향해 뜨거운 작별의 인사를 해야 할 시간이 온다.


이른 아침, 빈의 골목길을 걷던 그들의 귀에 낯선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하프시코드’. 이름도 생소한 이 악기는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가장 번성했던 건반악기였다. 그들은 이 클래식한 악기 소리를 배경으로 춤을 추고, 키스를 나누며 서로를 껴안는다. 고전음악의 성지인 빈에서의 마지막을 보내는 그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마지막 음악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알베르티나 광장. 그들은 오스트리아의 국가 영웅 알브레히트 대공의 기마상 아래서 얼마 남지 않은 이별을 조용히 맞이한다. 자연스레 숨을 얕게 내쉬게 만드는 힘을 지닌 고요하고도 아름다운 장면이다. 서로에 대해 아직도 알아야 할 것이 많은 그들이지만, 이제 하룻밤의 환상 같았던 만남은 마지막을 향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다.


셀린이 자신이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순간에 대해 말하는 대목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겨우 몇 시간의 대화를 나누고 기차에서 내려 빈에서의 하루를 보낸 남자에게 그녀는 오래된 연인들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네가 아까 커플이 몇 년 동안 같이 살게 되면, 상대의 반응을 예측할 수 있고, 또 상대의 습관에 싫증을 느끼게 돼서 서로를 싫어하게 된다고 했잖아. 난 정반대일 것 같아. 난 상대에 대해 완전히 알게 될 때, 정말 사랑에 빠질 것 같거든. 가르마는 어떻게 타는지, 이런 날은 어떤 셔츠를 입는지, 이런 상황에선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할지 알게 되면…… 난 그때야 비로소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거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교감했지만, 그들이 보낸 시간은 겨우 하루에 불과했다. 사랑에 빠지는 데에 무조건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누군가와 진심으로 교감하며 오랜 시간의 만남을 지속하는 일은 그들이 느꼈던 순간의 감정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일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상대에게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때는, 셀린의 대사처럼 이 사람에 대해 완전히 알게 됐다고 느끼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마법 같은 일은 우리 눈앞에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가르마의 방향과 상대방의 옷 취향, 사소한 습관 같은 일상의 순간을 마주했을 때 불현듯 다가올지도 모른다.


아마도 셀린은, ‘이 순간이 끝나더라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 너의 모든 것을 알아가고 싶어’라는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제시에게 건넸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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