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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Jan 13. 2018

사랑의 유통기한

냉정과 열정사이, 피렌체-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헤어진 연인과의 약속으로부터 시작되는 사랑 이야기가 있다. 서른의 어느 날, 피렌체의 ‘두오모’에 함께 오르자고 약속한 두 사람 쥰세이와 아오이. 그들의 이야기는 이 작은 약속으로부터 시작한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이다. 피렌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 속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두오모에 새겨진 두 사람의 약속, 그리고 애절한 OST는 많은 사람들을 이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로 향하게 만들었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는 내게도 피렌체로 향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피렌체는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인 도시임에 틀림없다. 르네상스의 발원지이자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며, 해 질 녘이 되면 미켈란젤로 광장(Piazzale Michelangelo)과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를 배경으로 수많은 이야기들이 쓰이는 곳. 이 도시는 이미 존재만으로도 낭만 그 자체였다. 그러나 나에게 피렌체란 예의 그 동그란 돔형의 지붕과 그 위에 올라선 두 남녀의 이미지로 가장 먼저 떠오르면서 동시에 영화의 OST인 ‘The Whole Nine Yards’가 환청처럼 귓가에 들려오는 곳이었다. 이 노래는 내겐 피렌체라는 도시의 주제곡과도 같았다. 나는 까마득하게 높은 동그란 지붕 위에서 주황빛 도시를 바라보며 이 노래를 듣는 느낌을 알고 싶었다. 그건 직접 느껴보지 않는다면 절대로 알 수 없을 종류의 경험일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영화 속 쥰세이와 아오이의 엇갈린 인연과 재회가 녹아 있는 피렌체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의 촬영지를 찾아다니기로 결심했다.

“피렌체 두오모는 연인들의 성지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곳…….
언젠가 함께 올라가주겠니?
“피렌체의 두오모에?”
“응.”


아침 일찍 일어나 쿠폴라에 올라갔다. 쥰세이가 성당이 열리자마자 올라가 아오이를 기다렸던 것과 비슷한 시간에 올라가서 그의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성당은 생각보다 훨씬 높았고 통로는 상상 이상으로 좁았지만, 겨울이라 그랬는지 조금씩 쉬면서 오르다 보니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았다.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인지라 아마 여름이었다면 금방 지쳤을 거란 생각을 했다. 계단을 오르며 보이던 벽면에는 수많은 낙서들이 자신들의 약속을 자랑하기라도 하는 듯이 어지러이 늘어져 있었다. 언어는 제각각이었지만 적어도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사람은 늘 눈에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약속의 징표를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무언가로 보고 싶어 하게 마련이다. 그건 서로를 향한 약속의 가장 확실하지만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증거들이다. 영원히 함께하리라 믿었던 순진함에서 비롯된 영화 속 둘의 약속처럼 말이다.

마침내 쿠폴라에 오른 나는 아오이를 기다리던 시간 속 쥰세이의 마음을 가늠해보고자 했다. 아침의 어스름이 물러나고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저 하염없이 피렌체 시내를 바라보며 원형의 쿠폴라를 따라 의미 없이 빙빙 걸었다. 시간은 고요한 공기의 틈에 들러붙어 느릿느릿 흘러갔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준비해온 음악을 틀었고, 이내 귀에서는 ‘The Whole Nine Yards’가 흘러나왔다. 첫 음이 들리자마자, 나는 금세 영화 속 두 주인공을 눈앞에 그려낼 수 있었다. 노래는 피렌체를 배경으로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음악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에서 배경음악으로 들리는 듯했다. 마치 둘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사랑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원을 맹세하며 오른다는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에 올라 10년 전에 했던 약속을 잊지 않고 하염없이 옛 사랑을 기다리던 쥰세이. 그리고 역시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찾아온 아오이. 비록 영화 속 이야기라고 하지만, 사랑은 가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우연과 인연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약속이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자신들의 미래를 조금이나마 손에 쥐어보기 위한 행위라면, 쥰세이와 아오이의 약속은 그런 행위의 가장 이상적인 정점에 놓여 있다. 연인들은 두 사람의 약속처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앞날을 약속하며 그 사랑의 유통기한을 연장해나가는 존재들이다. 미래의 어느 순간에도 둘이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 때로는 부질없어 보이고 때로는 한없이 터무니없게 느껴지는 그 약속들을 우리가 클리셰처럼 반복하는 이유는, 사랑의 감정은 미래를 약속할 때만이 관계의 유통기한을 유예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수많은 둘이, 그리고 개인들이 쥰세이와 아오이의 재회를 그리며 이곳에 왔을까. 그리고 그중에 몇 명이나 이곳에서 그 관계의 지속 기간을 연장하거나 혹은 완전히 끝맺었을까.

나 또한 한때는 먼 훗날의 약속을 매개로 사랑의 유통기한을 연장하던 연인이던 때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때 했던 많은 약속들 중의 하나는, 언젠가 피렌체의 두오모에 꼭 오르자는 약속이었다. 이 영화 때문에 피렌체에 왔다는 것은 어쩌면 핑계이거나, 내 얄팍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한 일종의 위장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그 당시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연인과의 약속을 잊지 못해 이곳을 찾았다는 말이, 내게는 부끄럽지만 더 적확한 표현이었다. 나는 헤어진 연인과의 지키지 않아도 될 약속을 떠올리며, 대상 없는 그리움을 좇아 이 도시에 온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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