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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Jan 27. 2018

거리를 스쳐가는 무수한 생 가운데

원스, 더블린-그래프턴 스트리트

<원스>를 좇아 찾아온 더블린에는 해 질 무렵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내려앉고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흩뿌릴 듯했다. 그러나 착 가라앉은 공기와는 달리 도시의 분위기는 묘하게 흥분되어 있었다. 공항에서 마주한 더블린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속에 차분한 흥분을 갖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더블린의 모습과, 혼자 머릿속으로 수없이 상상했던 더블린의 모습을 계속해서 비교해보았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우산을 쓰기에도, 쓰지 않기에도 애매한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비를 그대로 맞으며 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차창 너머로 보이는 사무실엔 불이 켜져 있었고 누군가가 책상 앞에서 분주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퇴사를 결심하기 전, 광화문에서 지내던 내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나는 누군가의 일상 속으로 들어온 이방인이었다. 내가 일상을 잠시 멈춘 그 순간에도 누군가는 평범한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는 사람들 무리 속에 섞여 25인치 캐리어를 끌고 가며, 나는 평범한 일상들의 저녁을 상상했다. 어쩌면 여행은 서로 다른 두 일상이 가장 직접적이고도 강렬하게 부딪히는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영화 <원스> 역시 서로 다른 두 일상이 마주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자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일상인 사람이다. 거리의 삶이 일상이라는 건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흔한 문구를 온몸으로 느끼는 삶일 테다. 모든 이들이 목적지를 향해 분주하게 움직이며 스쳐 가는 곳에서 묵묵하게 서서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삶. 또 다른 주인공인 여자는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잡지나 꽃을 팔아 가족들을 부양한다. 남자와는 달리 물건을 팔기 위해서 부지런히 두 발을 움직이며 거리를 활보하지만, 역시 거리를 스쳐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한 장소를 맴돈다. 거리 위에서 살아가는 삶은 그런 것이다. 타인을 무수히 스쳐 보내지만, 막상 본인은 계속 같은 장소에 머물러야 하는 존재.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마주하지만 그 때문에 역설적으로 고독해지는 삶.

영화의 시작에서 카메라는 그런 고독한 두 삶이 마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스쳐 보내던 둘은 길 위에서 서로를 마주하며, 타인의 생을 강렬하게 마주한다. 이 만남으로부터 펼쳐질 앞으로의 많은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이 장면은 결코 가볍지 않다. 영화는 서로 강렬하게 마주하는 두 개의 삶이 거리를 스쳐 지나가며 만나는 수천수만의 삶보다 의미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원스>는 우리가 음악영화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뮤지컬 영화와는 달리, 지극히 사실적인 영화다. 등장인물들은 이야기의 흐름상 자연스럽게 노래를 불러야 하는 지점에서만 노래를 부른다. 이런 자연스러운 음악의 등장과 연출은 우리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을 현실에 있을 법한 캐릭터로 받아들이게 할 뿐만 아니라, 음악까지도 스토리 속에 등장하는 제삼의 존재처럼 보이게 한다. 존 카니 감독은 어떤 지점에서 이야기와 음악이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완벽한 공식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작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출에도 불구하고 거리의 두 일상이 만나 함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이미 충분히 영화적으로 느껴진다. 처음 만난 남녀가 음악을 통해 감정을 나누는 정서적 교감은 실로 놀라워서, 비현실적이다 못해 동화 같기까지 하다. 이 같은 그 정서적 교류를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음악이 가진 힘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막상 더블린이라는 도시에선 이런 이상적이고도 비현실적인 음악적 교감들이 지극히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더블린을 여행하는 동안 도시에선 늘 음악이 울려 퍼졌다. 주인공이 노래를 부르던 그래프턴 스트리트(Grafton Street)뿐 아니라, 평범한 음식점에서도, 탁 트인 광장에서도 사람들은 늘 노래를 불렀다. 그것도 단순히 흥얼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악기를 꺼내어 들고 본격적으로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식이었다. 더블린 사람들은 자신들이 있는 공간이 어디든 그곳을 음악 소리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이런 음악이 주는 힘은 대단해서, 나 같은 낯선 이방인도 잔뜩 긴장했던 마음의 경계를 한층 느슨하게 풀고 더블린이라는 도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만들었다.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여행자에게 선물하는 음악들은 마치 〈원스〉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음악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더블린에서 음악은 그렇게 일상과 비일상을 묶어주고 있었다. 서로 다른 일상들이 만나는 지점에는 음악이 필요한 걸까, 싶은 생각과 함께 음악과 한 몸을 이루는 영화의 배경이 되기엔 더없이 적절한 도시라는 생각이 여행 내내 들었다. 더블린 출신의 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데에는 어쩌면 다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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