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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Feb 03. 2018

이어폰, 감각적이고도
은밀한 사랑의 행위

원스, 더블린-피츠기번 스트리트

음악을 통한 교감은 그 어떤 정서적인 행위보다도 사람 사이의 유대감을 훨씬 더 깊게 만들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연인들이 하는 모든 행위 중에 서로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노래를 나눠 듣는 것이 가장 은밀하고도 감각적인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음악을 통한 소소한 정서적 교감인 셈이다. 그 모습은 자못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하나의 노래를 나눠 듣는 동안, 둘은 오직 그들만의 세계에 속해 있다. 세상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오직 둘만의 세계. 그리고 둘 사이를 위태롭게 연결하고 있는 이어폰은 둘의 세상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다.

남자와 여자 역시 함께 같은 음악을 듣는다.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지는 않지만, 남자는 여자에게 본인이 작곡한 미완의 노래를 들려준다. 시디플레이어에 시디를 넣고 둘이 함께 여자의 집 계단에 앉아 노래를 듣는 모습은 소박하고도 아름답다. 이때, 남자는 곡을 마음에 들어 하는 여자에게 직접 작사를 해보겠느냐며 제안한다. 남자가 돌아간 뒤에 여자는 시디에 녹음된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붙인다. 한참 가사를 붙이며 노래를 듣던 그녀는 건전지가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 집 앞에 있는 가게로 나간다. 시디플레이어에 새 건전지를 넣은 뒤 자신이 붙인 가사를 노래에 맞춰 흥얼거리며 거리를 걷는 그녀. 그리고 곧 몽환적이면서도 꿈결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이 마법 같은 장면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화면은 어둡고, 길가의 오렌지색 조명만이 간헐적으로 그녀를 비춘다. 평범한 거리를 걸으며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을 카메라는 그저 묵묵히 따라가며 담는다. 4분 남짓의 노래가 흐르는 동안 관객이 보는 것은 오직 그녀의 모습뿐이다. 흔한 거리의 오렌지색 가로등 빛에 둘러싸여 있을 뿐인데도, 꿈속의 장면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조용하게 읊조리는 듯한 몽환적인 목소리는 자칫 밋밋할 수도 있었을 이 장면을 단숨에 마법 같은 시퀀스로 바꿔버린다. 단언컨대 이 장면은 그 어떤 극적인 장치가 없음에도 <원스>라는 영화에서 관객이 가장 숨죽이고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는 장면일 테다.


그녀가 걷던 거리의 이름은 피츠기번 스트리트(Fitzgibbon Street). 마운트조이 스퀘어 공원(Mountjoy Square Park)이라는 작은 공원으로 이어지는 아주 짤막한 거리였다. 이름조차 생소한 이곳은 인적이 드문 평범한 주택가였고, 이 영화가 아니었다면 알 수도 없었고, 올 일조차 없었을 동네였다.

나는 이어폰을 꽂고 그녀가 부르던 ‘If You Want Me’를 들으며 천천히 영화 속 장소를 그대로 걸었다. 거리는 조용했고, 이어폰을 타고 흐르는 목소리는 몽환적이었다. 그러나 노래가 들리는 4분 남짓한 시간 동안은 이 회색의 도시가, 우중충한 하늘이 마치 눈앞에 필터를 씌운 듯이 다르게 보였다. 보폭에 따라 흔들리는 시야는 영화 속에서 핸드헬드로 담겨진 그 장면을 그대로 내 눈앞에 펼쳐놓고 있었다. 불 꺼진 가로등이 오렌지 빛을 내며 켜지고, 주위가 어둠에 덮이는 상상을 하며, 영화 속 그녀가 된 듯한 착각에 잠시 빠졌다. 나는 자연스레 그녀의 걸음에 보폭을 맞춰 걸었다. 마법 같은 노래와 장면은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 매거진은 1월에 출간된 제 책 <낭만이 여행자의 일이라면>의 내용을 발췌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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