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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Nov 13. 2018

풍경의 자오선

2017 몽골 여행 (6/14)

녹색이라는 색채가 낯설게 느껴질 무렵이 되어서야 우리는 이 땅에서 나무를 마주했다. 식생의 경계는 늘 우리의 의식을 앞질러서 변했다. 바람에 흩날리던 모래 언덕이 점차 단단한 외형을 갖추더니, 그 위에 풀들이 마치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생겨난 녹색의 얼룩처럼 생겨났다. 풀이 난 자리에는 몇 그루 되지 않는 나무들이 생채기에 난 딱지처럼 비죽비죽 솟아 있었다. 길을 가면 갈수록 나무들은 점차로 많아져서, 결국에는 어제의 풍경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나무들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 보이는 유려한 곡선의 언덕에서 조금만 시선을 앞으로 가져오면, 그곳엔 하얗고 노란 들꽃들이 낮게 피어있었다. 풍경의 변화는 지구본에 그려진 자오선처럼 딱 잘라 구분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무언가를 구분하기 위해 인간이 임의로 정해놓은 경계들은 대부분 실제로는 딱 잘라 구분지어질 수 없는 것들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보통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 대한 공포심을 갖고 사는 존재들이니까.


하루 만에 달라진 풍경에, 나는 다른 행성에 와 있는 듯 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번에도 다시 한번 어린 왕자가 떠올랐다. 지구에 오기까지 서로 다른 여섯 개의 별을 여행했다는 그 작은 소년의 여정이 이랬을까.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바오밥나무가 보고 싶어 졌다.

한참을 새로워진 풍경에 감탄하고 있으니 차가 멈추어 섰다. 우리는 어딘쯤지도 모르겠는(어딘지 모르는 그 상황 자체가 몽골에선 디폴트였다)어느 풀 밭에 멈춰서 점심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몽골에 도착한 뒤로 계속 느꼈던 단단한 바위와 퍼석한 모래의 감촉이 아닌 잔디가 주는 폭신한 촉감은 꽤나 이질적이었다. 멀리서 봤을 땐 대지의 일부처럼 보였던 잔디들은 생각보다 높게 자라나 있었다. 잔디들 사이로 주황과 흰색의 고개를 내민 들꽃들은 포인트 벽지처럼 피어나 밋밋한 풍경을 환기해주고 있었다.


가이드가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잠시 시간이 생긴 나는 낯설어진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까지 시야를 채웠던 높은 모래언덕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풍경은 거짓말처럼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언덕을 오르는 동안 계속해서 땅을 발바닥으로 두드려보았지만, 땅은 흘러내리지 않고 애꿎은 잔디만 풀썩하고 쓰러졌다가 일어났다. 언덕에 오르니 빼곡한 나무 사이로 우리가 타고 온 밴이 보였다.

그런데 풍경을 구경하는 동안 자꾸만 귓가에서 우웅-츠츳-거리는, 익숙하게 기분 나쁜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한동안 생명체의 흔적을 찾기 힘들어 잊고 있던 소리였다. 기분 나쁜 소리의 근원은 바로 파리였다. 그것도 무수히 많은 수의 파리. 사막에서 의외로 벌레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알아차렸다. 벌레들도 엄연한 생명체였고, 생명체가 살아남기 힘든 사막에선 그들도 활동할 수 없었던 거였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우리가 벌레와의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 그 파리들이 미리 말해준 셈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난 뒤에 파리로 인해 우리에게 엄청나게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되리라는 걸...


한국에선 흔히 찾아볼 수 없던 수와 크기의 파리들이 동시에 우리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공포심과 혐오감에 사로잡혀 점심을 먹어야만 했다. 파리는 모기처럼 우리를 문다거나 눈에 두드러지게 해악을 끼치지 않았지만, 존재 자체만으로 혐오를 일으키고 밥맛을 떨어뜨리기엔 충분했다. 모기의 날갯짓보다는 둔탁하고 벌의 날갯짓보다는 훨씬 더 더럽고 기분 나쁜 파리의 날갯짓 소리가 사방에서 돌비 5.1 채널 서라운드로 들려온다면 당신도 혐오스럽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 뒤로도 나는 귓가에서 파리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했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며칠 뒤에 벌어질 지옥 같은 사태를 알지 못했을 때의 일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파리떼와의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쳉헤르 온천으로 계속해서 이동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새로워진 풍경들은 너무 인위적이라 오히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컴퓨터 게임 속에 들어온 듯한 풍경이었다. 자연이 만들어낸 명암은 부드러우면서도 또렷했고, 경계는 흐릿한 듯 명확하게 구분되고 있었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색과 구도라는 생각이 들어 한참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나는 문득 우리나라의 오래된 왕들이 잠들어 있다는 경주의 능들이 생각났다. 먼 타지의 몽골에 있는 유려한 곡선의 언덕들은 경주에 있는 오래된 왕들의 무덤을 닮아 있었다.

온천까지 가는 길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아마 차 안에서 깊은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차가 정체할 때만 느껴지는 그 특유의 '미적거림'이 느껴져 잠에서 일어나 보니 게르가 모여있는 어떤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쳉헤르 온천 구역은 흡사 영화 속에서 보던 군사들의 전초기지 같았다. 하얀색의 게르는 도열한 병사처럼 가지런히 열을 맞추어 위치해 있었다. 어떤 군대가 내일 적들과 전투를 치르기 전에 산속에서 매복하고 있는 풍경 같았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차에서 짐을 내려 이젠 익숙해진 게르 안에 들어가 빠르게 내부를 스캔했다. '음, 이 정도면 그래도 꽤 괜찮은 축에 속하는 게르군.'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위아래로 살짝씩 반동을 주며 생각했다.


우리가 북쪽으로 향할수록 온도는 점점 더 내려갔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이 되면, 기온은 우리나라의 초가을 정도로 바뀌었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온천을 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던 온천을 하러 향했다. 물론 나는 발만 담글 예정이었으므로 샤워 도구만 대충 챙겼다. 꽤나 제대로 된 샤워시설이 갖춰진 샤워장은 오랜만이었다. 나는 온천에 발만 살짝 담갔다가, 온천을 즐기고 있는 일행들을 뒤로하고 다시 게르로 돌아왔다. 게르에서 바로 내다 보이는 숲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

몽골에서의 거리 감각은 사막이나 초원이나 여전해서, 나는 여전히 거리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 가깝다고 생각했던 숲은 생각 외로 상당히 멀었다. 나는 걸어도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는 숲이 마치 매직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 즐겨했던 매직아이에는 저렇게 초록색의 노이즈 같은 풍경들 사이로 또 하나의 가상의 숲이 나타나곤 했다. 만질 수도 없었고 가까이 갈 수도 없는 숲이었다. 그렇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걸었다. 숲에 거의 도착할 즈음이 되어서, 나는 가이드가 온천의 수원지라고 말했던 장소에 도착했다. 겉보기에도 따뜻해 보이는 물이 하얀 수증기를 뿜어내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녹색의 언덕과, 빼곡한 숲, 앙증맞은 꽃과 물의 근원이라니. 몽골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풍경이었다.

수원지를 보고 난 뒤 조금 더 깊숙이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점점이 주황색의 꽃들이 모인 곳이 보였고 나는 홀린 듯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꽃에 정신이 팔려 걷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사위가 고요해져 있었다. 나는 커다란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사람은커녕 동물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정지한 느낌이었고, 들어와선 안 되는 비밀의 정원에 몰래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 느낌은 소름 끼친다기보다는 평온한 상태의 고요에 더 가까워서, 초월적인 존재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경험이었다. 꽃의 이름은 알 수 없었으나 작고 아름다웠다. 주황색의 꽃들이 나무의 녹색과 대비되며 반짝였다. 지상에 내린 작은 은하수 같았다.

돌아가기 싫을 정도로 고요하고 편안한 공간이었으나, 더 오래 있다간 일행들을 걱정시킬 것 같아서 나는 다시 게르로 향했다. 어느새 해는 흐릿하게 저물고 있었다. 이 곳은 그래도 산과 언덕이 있어서 이전까지 우리가 있었던 드넓은 황야와는 다르게 어둠이 걸음을 재촉하며 찾아왔다. 몽골의 태양이 해 질 녘에만 보여주는 연보라색 공기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나는 해가 저무는 하늘을 등지고 일행들이 기다리는 게르로 향했다. 오늘도 밤은 길 예정이었고, 우리에게 시간은 차고 넘쳤다. 새롭게 맞이한 이 풍경에서도 사랑스러운 일행들과 밤을 채우며 이야기할 시간은 충분했다. 일행들은 내가 저 먼 숲까지 다녀왔는지도 알지 못한 채 시끄럽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게르에 돌아오니,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먼 곳으로 떠났다가 집으로,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 탕아가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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