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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Nov 22. 2018

밤하늘에 펼쳐진 생일 축하

2017 몽골 여행(6/15-16)

뜨르르르릉-


맞춰두었던 알람이 울린다. 동생들이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세면도구를 챙긴 뒤 게르를 나선다. 아침 세면의 맑고 상쾌한 기분으로 게르에 돌아와 보면 아침의 인기척에 깨어났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침낭 속으로 파고드는 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가이드가 머무는 게르로 건너가 그녀와 함께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메뉴는 그때그때 다르지만 역시 아침식사는 가벼워야 하는 법. 프렌치토스트나 구운 햄, 계란 프라이 같은 간단한 메뉴가 완성되면 게르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아침밥 먹어~!"하고 외치며 큰 소리로 아이들을 부른다. 아침을 먹고 게르로 건너와 캐리어에 풀어두었던 짐을 다시 넣은 뒤 다시 먼 길을 떠날 준비를 끝낸다.


대체로 몽골에서의 아침 풍경은 이런 식이었다. 어떤 여행의 아침이 이렇게나 정겨울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몽골에서의 여행은 일상이 되어갔다. 잊고 있었던 정겨움을 되살아나게 하는 풍경들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볼 때면 때로는 내가 이 친구들의 가족도 아니면서 슬그머니 미소를 짓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동행이었던 친구들이 괜히 '아빠'라고 부른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아빠가 될 가능성은 내 인생에서 제로에 수렴할 텐데.


테르힝 차강이라는 호수를 향하는 날이었다. 사전에 여행 업체 측에서 제공해준 일정표에는 '170km의 비포장 도로 6시간 이동'이라고 쓰여 있었다. 여행을 시작한 이래로 모든 일정이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두루뭉술한 숫자들은 이제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250km, 5시간 이동. 150km, 4시간 이동. 매일의 일정 뒤엔 이런 식으로 간략하게 이동거리와 시간이 적혀 있었는데 그 정보들 만으로는 우리의 하루 여정을 파악할 수 없었다.

가는 길에 마을 한 군데를 들르고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졌다는 산 하나를 올랐다.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졌다는 산을 오르고 있으니 내가 떠나온 제주도의 백록담이 떠올랐다. 군데군데 구멍 뚫린 검은색의 익숙한 돌이 보였고, 갈색빛이 감도는 분홍색의 토양이 흩날렸다. 산은 낮고 완만했다. 제주도로 치자면 아주 작은 오름 정도였다. 산의 꼭대기엔 깊게 파인 분화구가 보였다. 분화구는 의외로 깊어서, 아래까지의 거리가 잘 가늠되지 않았다.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한 언덕이었으나 막상 올라와보니 뒤편으로 드넓은 숲과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근처에 별다른 문명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그 풍경은 무척이나 이국적이게 보였다.

잠깐의 트레킹을 마치고 내려와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한 우리는 테르힝 차강 호수에 도착했다. 홉스골에 비하면 무척이나 작다는 호수는 우리나라에서 봤던 어떤 호수보다도 컸다. 산들은 호수를 둘러싸고 베일처럼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서울에서부터 다 같이 맞춰온 유니클로 플리스를 꺼내 입고 호수로 나갔다. 어느새 날씨는 몰라보게 쌀쌀해져 있었다. 한참 동안 웃고 떠들며 사진을 찍던 우리는 멍하니 산 너머로 해가 저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해는 처음엔 붉은빛을 내다가 이내 주황색과 분홍색의 흐릿한 빛을 내며 푸르스름하게 저물었다. 나는 살면서 이렇게 질리도록 노을을 바라볼 일이 또 얼마나 더 있을까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몽골에서 노을을 바라보는 일은 하루 일과를 무사히 마친 뒤에 행하는 일종의 의식이 되어있었다.

해가 지는 모습을 늦게까지 바라보다 게르로 돌아온 우리는 한국에서부터 챙겨 온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며 술을 마셨다. 이 날 우리는 하루가 끝날 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12시를 넘겨 맞이하는 6월 16일은 일행 중 한 명의 생일이었다. 우리는 오전부터 어설프게나마 깜짝 파티를 준비했다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이라는 존재는 여행의 공간에서도 어김없이 흘렀고, 일상의 영역에 속한 생일이라는 이벤트는 여행이라는 환상의 영역에서도 어김없이 환영받는 일이었다.


그러나 깜짝 파티란 대체로 주인공만 눈치채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법이다.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는 주인공과, 진짜로 모를 것이라고 굳게 믿는 지인들(자신이 주인공이라면 주변 사람들이 주고받는 어설픈 눈빛들을 보며 눈치를 채지 못할 수가 없다)이 만들어내는 어설프지만 사랑스러운 풍경들. 깜짝 파티는 결국 들키지 않는 것보다, 함께 들떠 축하하는 분위기에 의의가 있다.


그날의 깜짝 파티 역시 예외는 없었다. 모른 척 해준 주인공은 초코파이류로 급조한 케이크를 먹으며 '정말 몰랐다'따위의 덕담 아닌 덕담을 우리에게 건네며 너스레를 떨었다한바탕 소란을 피운 어설픈 깜짝 파티를 끝내고 게르 안에 파티의 잔상만이 남았을 즈음, 게르 밖으로 나간 누군가가 나와보라며 소리쳤다. 밖에는 지금까지 몽골에서 봤던 어떤 밤하늘보다 별이 흐드러지게 펴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블루투스 스피커와 침낭을 챙겨 게르 밖으로 나왔고, 각자의 자리를 펴고 누웠다. 고개를 올려 바라보는 밤하늘과 누워서 보는 밤하늘은 전혀 다른 하늘이었다.

곧 준비해둔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황홀한 침묵이 공기를 휘감았다. 한 편의 시 같은 순간이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흩뿌려진 별 사이로 간간히 터져 나오던 일행들의 웃음소리는 하늘에서 가끔씩 떨어지던 별똥별을 닮아있었다.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뭉클하면서도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사람이 표현해 낼 수 있는 언어와 감정의 한계는 이 풍경 앞에서 너무도 얄팍했다. 온통 검은 하늘과 하얀 별만 눈 앞에 펼쳐진 하늘 아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일행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스피커에선 생일을 맞은 친구가 좋아하는 데이미언 라이스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 몽골의 밤과 우리들을 떠올리면 속수무책으로 슬퍼질 것임을 예감했다. 밤마다 의식처럼 행해지던 우리의 별구경을, 침낭을 깔고 누운 아이들과 별이 가득한 하늘을 번갈아보며 헤아리던 그 밤을 어떻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그건 생일을 맞은 그녀에게도 우리에게도 잊지 못할 생의 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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