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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Sep 20. 2023

회사의 생애 1화

소문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으며,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소문


나른한 금요일 오후 네 시, 사내 메신저 슬랙 채널에 공지가 하나 올라왔다.

@here 다음 주 화요일 CPO 지은님께서 Q&A세션을 갖고 앞으로 변동되는 회사의 방향성에 대해 설명해 주실 예정입니다! 다들 오프라인으로 출근해서 미팅 참석해 주세요!

'회사가 뒤숭숭한 마당에 무슨 방향성?'이란 다소 냉소적인 반응이 나오게 만드는 메시지였다. 몇 달 전부터 회사 직원들과 온라인 커뮤니티 블라인드를 중심으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던 탓이었다.


소문의 주된 내용은 회사에서 사업을 위해 발행했던 대규모의 채권이 최근 급격하게 경색된 채권시장으로 인해 회수가 어려워졌다는 이야기였다. 채권을 발행해 준 다수의 회사가 망하면서 그 연쇄 반응으로 회사 역시 자금사정이 급격하게 나빠진 것이다. 소문 중에는 월급이 안 나올 수도 있다는 다소 급진적(?)이면서도 구성원을 불안하게 만드는 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작년 한 해에만 천억 가까이 투자를 받은 회사에서 아무리 채권시장과 경제상황이 어려워졌다고 한들, 월급이 안 나오고 회사 자금 상황이 어려워지는 일이 생길 리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루빨리 경영진이 이런 호사가들의 헛소문을 잠재우고 불안한 구성원들의 마음을 가라앉혀주길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안 좋은 이야기는 늘 가장 자극적인 형태로 가장 매력적으로 사람들 마음에 가 닿는 법이니까.


메시지가 올라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글 캘린더에 <콘텐츠실 Q&A>라는 제목의 일정이 생성됐다. 캘린더를 확인해 보니 같은 이름으로 '마케팅실', '디자인실'등 각 부서별로 일정이 만들어져 있었다. 각 부서별로 주어진 시간은 약 한 시간 남짓이었다.


찝찝한 마음을 안고 퇴근하려던 찰나, 뒤에 앉아 있던 해린님이 의자를 돌리고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 석준님, 어떨 것 같으세요?

- 어떨 것 같냐는 건...어떤?

- 다음 주 저 미팅이요. 안 그래도 요즘 블라인드에서 난리인데 그 얘기하려는 건가.

- 그 얘기요?

- 아니 왜... 채권 회수 어려워지고 회사 망한다는 얘기요. 아 나 전 회사도 망해서 쫓겨났는데 또 이러네. 파괴왕인가.

- 저도 그래요. 저 예전 회사 망해서 2년 동안 백수였잖아요.

- 하, 씨발 짜증 나네. 가볍게 맥주나 한 잔 할래요 금요일인데?

- 저도 갈래요!


해린님 옆에 앉아 가만히 듣고 있던 지민님이었다. 콘텐츠팀에서 글을 쓰고 있는 에디터는 이렇게 셋이었다. 회사가 당장 어떻게 돼서 언제 헤어질지도 모르는 마당에, 좀 더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만들면 좋겠지.


- 좋아요! 마시러 갑시다!

- 아싸! 저 이것만 정윤님한테 보내고 바로 퇴근할게요. 같이 나가요.


지민님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 업무를 마무리지었고, 나와 해린님 역시 다시 자리로 돌아가 퇴근을 준비했다. 가방을 싸다 문득, 책상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각종 사무기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미리 조금씩 챙겨두는 게 좋지 않을까?'하는 데에 생각이 미친 나는,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좋아하는 사진집을 가방에 함께 챙겨두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회사에 남겨져 있는 내 흔적들을 조금씩 지웠다.


- 석준님! 어디 가서 마실까요?

- 요 앞에 그 차돌박이집 갈까요?

- 오 좋아요 역시 기름칠이지~ 지민님도 괜찮죠?

- 그럼요! 저는 술이면 다 오케이!


회사 앞 자주 가던 차돌박이집에 앉아 낯익은 메뉴를 주문했다. 소주와 맥주는 금방 테이블에 놓였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고기가 나오기 전에 소맥을 말아 한 잔을 들이켰다.


- 하~! 시원하다! 아니 석준님, 이럴 거면 우리한테 그때 도망가라고 해야죠! 왜 뽑았어요 뽑기를.

- 아니 내가 뭐 뽑고 싶어서 뽑았나~ 이게 다 그쪽들이 실력이 좋아서 그런 걸 어떡해요~ 에헤~


해린님과 지민님은 나 밖에 없던 콘텐츠실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나와 실장인 연수님이 함께 채용과정을 거쳐 뽑은 사람들이었다. 그 순간에도 회사를 나가고 싶어 이곳저곳 찔러보던 나였기에, 내심 미안함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회사란 자고로 자기가 다니는 회사가 제일 최악인 법이니까. 그러나 이 둘은 누가 봐도 괜찮은 사람들이었고,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뽑아놓고 나간다면 그래도 내가 만약 나가더라도 걱정 없이 일을 맡기고 떠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물론 다 같이 나가게 생겼지만.


- 하 진짜 너무해. 이렇게 될 줄 석준님도 알았던 건 아니지만 진짜 어쩜 이러냐..

- 그 옆팀에 정윤님 있죠? 정윤님은 한 달 전에 입사했잖아요. 근데 회사가 뭐 망하니 마니 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 아 진짜요? 근데 다른 층에 어떤 분은 지난주에 입사했다던데? 심지어 이번주에도 면접 있는 것 같던데...


해린님과 지민님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던 내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 회사가 개판이구만. 어떻게 될 줄 알고 사람을 더 뽑아? 양심이 있어야지 사람들이...


딱히 대상이 없는 푸념을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뒤, 참이슬 병을 집어 들고 한 잔 따르며 말했다.


- 에휴, 짠해요 우리.

- 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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