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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Sep 22. 2023

회사의 생애 2화

미수채권 '700억'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으며,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미수채권 '700억'


뒤숭숭한 공지가 있은 뒤로, 내 신경은 온통 그 화요일의 미팅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일이 손에 제대로 잡히질 않았다. 사내에선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지에 대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회사 내 휴게 공간에선 삼삼오오 목소리를 낮추고 누가 오는지를 살피며 온갖 소문들에 대한 진위여부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게 약속의 화요일이 되자, CPO는 10시부터 각 팀을 만나며 회사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콘텐츠실은 가장 마지막인 네 번째 순서였다. 그 말은, 앞 팀들이 어떤 말을 들었는지 미리 물어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혜인님, 무슨 얘기했어요?" 참지 못한 내가 슬랙으로 1:1 메시지를 보낸 건 가장 친한 동료였던 마케팅실 혜인님이었다. "석준님 물어볼 줄 알았습니다 ㅋㅋ" 그녀는 내가 물어볼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미팅에서 들은 내용을 정리한 노션 링크를 전달했다.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들은 익히 예상했던 것도 있었고, 예상하지 못한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충격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익히 들었던 내용들은 확인사살이었고, 예상하지 못한 내용은 불의의 기습이었다. 어느 쪽이건 치명상에 가까운 내용들이라는 점만은 확실해 보였다. 전달받은 문서에 따르면, 결국은 회사에 거액의 미수 채권이 생겼다는 소문이 사실이며, 이를 회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회사가 인력을 감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CPO의 입으로 듣기 전까진 실감이 나질 않아서 '에이 설마'하는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로 미팅이 잡힌 2시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약간의 불안함과 긴장감, 어색함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콘텐츠실 사람들이 504호 회의실로 들어갔다. 연수님과 내가 둘이서 시작했던 콘텐츠실은 어느새 열한 명이 되어 있었다. 모아놓고 보니 새삼 이렇게 사람이 많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CPO를 둘러싸고 앉으니 마치 청문회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사실 분위기가 연출되었다기 보단, 청문회나 다름없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회의실 분위기 속에서, 아무도 먼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좁은 공간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고요함이었다.


침묵을 깨고 CPO가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다들 모이신 것 같으니 미팅을 시작해 볼게여. 최근 회사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많이 들으셨을 텐데여.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항상 '-요'를 '-여'라고 발음하는 입버릇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무거운 분위기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말투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회사는 최근 채권시장이 급격하게 안 좋아지면서 회사가 발행한 약 700여 억 원의 채권에 대한 회수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경영진 중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때문에 앞으로 큰 규모의 비용절감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여기엔 희망퇴직을 포함한 인력감축도 진행될 예정이고여. 희망퇴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직 조율 중인데, 조율이 미처 끝나기 전에라도 개인의 커리어 패스를 위해서 공백이 없도록 준비하신다고 하셔도 이해하고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노트북에 이미 준비된 말을 적어둔 채 읽고 있는 듯 CPO의 말투는 다소 어색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는 혜인님께 텍스트로 받았던 내용을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충격이었다. 그 말을 전달하는 CPO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울음이 섞여 있었다. 어렵게 돌려 말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의 결론은 결국 회사 사정이 급격하게 어려워졌다는 소리였다. 인력 감축을 80% 수준까지 진행한다는 건 과격하게 표현해 보자면, 회사가 망했다는 소리였다. 역시나 처음 든 생각은 '두 번이나 다니던 회사가 망하다니.'였다. 나는 해린님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또 망해?'라는 허탈함을 읽을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회의실 내부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걸어온 건 다름 아닌 CPO였다. "석준님께서는 회사에서 가장 오래된 멤버 중 한 분이신데, 혹시 질문이나 궁금하신 말씀 없으신가여?" 궁금한 게 없을 리가. 그런데 내가 여기서 어떤 질문을 해야 하지? '회사가 어쩌다 이지경이 됐나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정말로 돈이 없는 건가요?'. 그 어떤 질문을 해도 적절해 보이지 않았고, 그 어떤 질문을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내 처지를 가엾게 여긴 회사 대표들이 돈이라도 쥐여줄 셈인가? 대상을 잃고 조각난 질문의 문장만이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 미수채권 700억은 정말로 아예 회수가 불가능한 금액인가요? 정말 가능성이 없는 건가요?"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자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회수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합니다. 기계적인 CPO의 답변이 돌아왔다. 하나마나한 질문이었으니 답변도 하나마나한 답변일 수 밖에. 문득 또 한 가지를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 져 질문을 이었다. "개인의 커리어를 위해 준비해도 이해하신다는 말씀은... 그러니까 이직을 준비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제야 노트북에서 시선을 뗀 CPO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맞아여. 연수님께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편하게 면접등에 다녀오실 수 있도록 배려해 주세여."


조직의 최고 결정권자인 CPO가 본인 입으로 본인 조직 사람들에게 이직을 얘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보다도 더 확실한 시그널이 있을까? 심지어 실장에게 필요한 지원을 해달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더 이상 무언가를 덧붙일 필요조차 없어 보이는, 쐐기를 박는 발언이었다.


그 뒤에도 질문을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콘텐츠실의 모든 구성원들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나마 연차가 나와 비슷한 해린님이나 지민님도 침묵하긴 마찬가지였다. 콘텐츠실은 나를 제외하곤 이 회사에 입사한 지 1년도 안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가 건네는 질문들도 그저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한 소리들에 불과했다. 의미 있는 문장이 아닌 그저 입으로 내는 소리. 궁금하지도 않았고 궁금하다 한들 변하지 않을 사실들에 대한 확인뿐. 심지어 이미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문서로 받았는데 무엇이 더 궁금했겠는가? 무거운 침묵이 견딜 수 없었던 나는 그저 입으로 공간에 소리를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그 순간에 궁금했던 건 '지금 팀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였다. 나마저도 질문을 멈추자, 무거운 공기를 뚫고 CPO가 한 마디를 던졌다. "미팅이 가장 빨리 끝난 팀이 되었군여...감사합니다."


경영진의 잘못이 왜 다른 직원들의 감축으로 이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억울함 같은 건 그 자리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은 그 누가 책임을 져도 수습할 수 없었다. 80%가량의 인원감축이라는 대규모 구조조정 목표 속에서 경영진을 다 내보내고 난 회사에 남아있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 날 이후로, 우리는 회사와의 길고 긴 작별인사를 시작했다. 글로벌 서비스를 런칭하겠다고 한지 불과 두 달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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