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의 기억을 더듬으며 몸을 일으켰을 때는 오후 한 시였다. 주말 아침을 잠자는 일에 고스란히 소진했는데도 피곤한 몸은 회복되지 않고, 목 안 쪽은 칼칼했다. 휴대폰에는 잘 들어갔느냐는 준원의 연락이 와있었다.
화장을 지우지 않고 잠드는 바람에 손으로 매만진 피부 결이 거칠었다.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았을 땐 절망스러웠다. 눈가에 속눈썹 몇 가닥이 빠져 있었다. 하루에 두세 가닥씩 꾸준히 빠지면서 풍성했던 눈썹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머리를 자르면 힘을 잃는 삼손처럼, 자영은 더 이상 속눈썹이 없어진다면 자신에게 아무 매력도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흰머리를 족집게로 뽑을 때보다 두 배 더 짙은 슬픔을 느꼈다. 더군다나 착용했던 귀결이 한쪽은 사라지고 없었다. 자영은 짝 잃은 귀걸이를 빼고, 화장을 지우며 준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토록 솔직하게 터놓을 필요는 없었는데, 조심성을 갖고 경계하고 선을 지키려 할수록 준원은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단속해 둔 자영의 마음 벽을 손쉽게 허무는 남자였다. 숱이 적어진 속눈썹을 보며 자영은 울고 싶었다. 본래 민낯으로 돌아간다면, 준원은 실망할 것이다. 다시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하다 못해 밋밋하고 매력 없는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젊음을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던 이십 대의 생기가 없다면 이젠 자기 관리와 매력으로 승부를 봐야 하지만, 속눈썹이 없다면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자영은 준원과 서주 선배의 연락에 답을 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모자를 눌러쓰고, 급히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 지나친 편의점에는 고약한 성미에 비해 귀여운 스티커 취향을 가진 턱수염 짙은 남자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자영은 빠르게 편의점을 지나치고, 익숙한 거리를 경보하듯 걸어갔다.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향하는 길에 지나치던 익숙한 골목으로 향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 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다시 속눈썹을 붙여야만 해.’
밝은 낮에도 골목 안쪽은 어두웠다. 일전에 가본 적이 있는 가게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 무거운 문을 밀어젖혔지만 열리지 않았다. 휴무일이라는 표시도 없는데, 굳게 잠긴 문은 두드려도 인기척은 없었다. 한 동안 주변을 서성였지만 가게 주위로 오는 사람은 없었다. 체념하고 돌아선 그 뒤로 며칠간 퇴근 후 가게를 찾았지만 여전히 닫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빠진 속눈썹으로 인해 자영은 준원을 만날 수 없었다. 그에게 본래 민낯을 보이는 건 용납할 수 없었으므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만남을 연기했다. 회사에서도 자영의 달라진 태도에 동료들은 걱정 어린 말을 건네 왔다. 요즘 들어 안색이 좋지 않다든가, 무슨 일이 생겼느냐는 말이 이어졌다. 회사 일에도 집중하지 못한 뒤로는 부장으로부터 ‘퇴사 얘기 꺼내더니 벌써 이직할 회사 찾아서 일에 성의가 없는 거냐는’ 자존심 상하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속눈썹이 빠지고 난 뒤에 자영은 과거보다 더욱 위축되고 우울감에 젖어들었다. 한동안 거울을 보며 단장하고, 꾸미던 일에도 흥미를 잃게 돼버린 뒤로 거울은 보지 않았다. 매일 회사가 끝난 뒤에는 호랑이 속눈썹을 다시 구하기 위해 골목을 헤매고 가게를 서성였지만 가게 주인을 만날 수 없었다.
‘없어. 어디로 간 거지?’
자영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반응 없는 문 앞에 주저앉았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때 서주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녀는 자영의 회사 근방에 위치한 친정집에 오게 됐다며 괜찮으면 퇴근 후 만나자고 제안했다. 한동안 선배와의 연락을 미뤄왔던 자영은 선뜻 거절하지 못하고 약속을 잡았다.
자영은 미래 계획이나 이직할 회사를 정한 건 아니었지만, 퇴사 의사를 전했다. 마음먹었던 퇴사를 실행했던 이유 중 하나로 범석이나 과장과의 불편한 관계를 끊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범석은 회사에서 최근 입사한 신입 사원과 열애를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자영을 보더라도 대면 대면하거나 모른 척 지나쳤다. 불편하고 힘든 환경에서 계속해서 버티며 일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마음속으로 퇴사를 생각해 둔 터라 그 말을 공식적으로 꺼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처럼 다시 자신감을 갖고 일을 할 힘과 의지 없이 무기력하기만 했다. 온종일 호랑이 속눈썹을 다시 붙여야 한다는 생각에만 몰입되어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상태였다. 퇴사 의사를 밝힌 날, 자영은 퇴근 후 서주를 만났다. 두 사람은 회사에 다닐 때 자주 가던 카레 집에서 만났다. 야채 카레와 돈가스 카레가 더운 김을 풍기며 테이블 위에 놓였다. 서주는 맥주 한잔을 단숨에 비운 뒤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그간 연락이 잘 안 돼서 걱정했어. 안색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던 거야?”
“회사 일이 바빴어요. 선배도 바쁠 텐데, 계속 연락드리는 것도 죄송하기도 하고요.”
자영은 서주의 시선을 피하며 맥주로 입을 축였다. 속눈썹이 사라진 뒤로 누군가의 눈을 보는 일이 어려워져 버렸다. 오랜만에 만난 서주 선배에게 조차 속내를 터놓기 어려워지자 말과 행동을 삼가게 됐다.
“너랑 나 사이에 그럴 게 있나. 퇴사 후에도 이어가는 이런 관계 드물어. 그 말은 뭔지 알아?”
서주는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넌, 오래 곁에 두고 보고 싶은 소중한 후배이자 동료라는 뜻이야. 그런 사이에 재고 따지지 않아도 돼. 내가 자유로운 몸이었으면 네가 부를 때 당장 달려갔을 거야. 그렇지 못한 게 못내 미안했지만.”
“미안하긴요. 선배가 보태준 조언들이 일할 때도 그렇고, 마음 추스르는 일에도 도움이 됐어요. 선배 없었으면 저 진짜 회사에서 오래 못 버텼을 거예요.”
서주는 얼마 전 봤던 때의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진 얼굴이었다. 안색이 나아진 것을 보며 자영은 안도하는 한편 그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쩐지 선배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간의 근황에 대해 나누던 끝에
서주는, 지하철에서 만난 남자에 대해 물었다. 자영은 모호하게 웃으며 연락은 하지만 발전할 만한 사이가 아니라고 답했다. 깊게 이야기를 이어가다 호랑이 눈썹에 대한 고민까지 터놓는 건 선배에게 부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속마음 편하고자 타인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고민을 말하는 건 부담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일로 느껴졌다. 자영은 자신이 모를 선배의 보이지 않는 어두운 그림자가 줄곧 신경 쓰였다. 그녀에게 더 큰 무게를 짊어지우고 싶지 않았다.
“꾸준히 만남을 이어가고 연락이 온다는 건 너에 대해 분명한 호감이 있다는 거야.”
서주는 확고한 태도로 답했다.
“그렇지만, 혼자 앞서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싶지 않아요, 선배.”
“주저하게 되는 이유가 있어? 다시 또 상처받을까 봐?”
“일전에 다른 동료와도 그랬고, 결혼에 대해서도 혼자 앞질러 기대했다가 관계가 망쳐졌어요. 언제든 상대가 발 빼면서 아니었다고, 말하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나이 들면 감정이 무뎌질 거라 생각했는데, 상처는 받을 때마다 아프더라고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방어적으로 변하고, 계산하게 되고, 극히 조심하며 몸을 사리게 됐어요. 그 사람에 대해서도 혼자 앞질러 생각해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요. 젊은 연하의 남자가 굳이 나이 차이 나는 여자한테 호감을 느낄 만한 요소가 있을까에 대해 스스로도 의문이기도 하고. 아쉬울 게 없잖아요. 훤칠한 키와 외모에 자신만의 꿈이 있는 그런 건실한 청년이, 어째서 저를 좋아하겠어요.”
맥주 한 잔을 다 비운 자영은 자조적으로 자신에 대해 신랄한 평가를 뇌까렸다. 속눈썹이 모두 빠진 자신의 본모습을 그 남자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머지않아 알게 되면 태도는 돌변할 것이다. 회사 동료들이 그녀가 속눈썹이 사라진 뒤 태도가 바뀌었듯. 준원 또한 그들과 다를 게 없으리라.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만남을 미루고 피하는 건 직감한 현실을 마주했을 때의 상처가 두렵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예상했더라도 상처에 무뎌지거나 충분히 감내할 만큼의 담대한 마음이 생기진 않았다. 오히려 잘 알고 있으므로 최대한 피하거나 무기한 미뤄두고 싶었다.
“자신에 대해 너무 평가 절하하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넌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거든. 그 남자는 네 진가를 알아봤으니까, 관심을 보이는 걸 테고.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미적인 기준 같은 것만으로 판단 내릴 수 없어. 넌 겸손해서 좋지만, 좀 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어.”
“그 남자도 선배 같은 시선으로 나를 봐줬으면 좋겠는데.”
자영은 입가에 쓴웃음을 흘리다 무언가 생각난 듯 가방에서 작은 선물 박스를 꺼내 건넸다.
“아, 전해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하마터면 잊을 뻔했어요.”
“이건 뭐야?”
“제 것 사는 김에 선배 생각나서 샀어요.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서주는 자영이 건넨 상자에서 립스틱을 꺼내 보더니 기뻐했다.
“화장, 안 한 지 오래지만 이런 선물, 너무 좋은데. 고마워. 잘 바를게.”
“선배, 꾸미는 것도 좋아했잖아요. 이런 화려한 색깔, 선배만큼 잘 소화하는 사람도 없어요.”
자영의 얘기에 서주는 손사래를 치며 아이 키우고 살림을 도맡다 보면 꾸미는 일과 멀어지게 된다며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는 일도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그때 선배 참 멋졌는데, 지금도 가끔 회사에서 일하다 선배 생각날 때 있어요. 그땐 프로젝트 일정 때문에 회사에서 밤늦도록 야근해도 지치는 줄 몰랐어요.”
“그랬던 때가 있지. 우리 팀워크가 좋았잖아.”
“그때 같이 했던 지형이랑 주원이, 상원 씨는 퇴사하고 저 혼자만 남아 있던 거 아세요? 그땐 선배 결혼하면서 그만둔다고 했을 때 절망적이었는데, 어찌 몇 년 간 버텨낸 것 같아요.”
“넌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잘할 거라 생각했어.”
자영은 서주의 칭찬에 미소로 대신 화답하며 퇴사 소식을 전했다.
“저도 그만하려고요. 선배, 저 퇴사하기로 했어요.”
그 말에 서주는 이유를 묻는 대신 그간 고생이 많았다는 말을 전했다.
“잘했어. 한 템포 쉬는 것도 필요하다고 봐.”
“정말 잘한 걸까요? 저 아무 계획도 없이 결정한 거예요. 몇 년 전 같이 했던 팀원들은 다들 결혼하고 그만두거나 이직을 목적으로 퇴사했지만, 전 어떤 계획이 있는 게 아니에요. 당장 그만둔 뒤 몇 달 정도는 모아둔 돈으로 버틸 수 있겠지만 이후에 계획은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불안한 부분도 있어요.”
“입사 초기부터 지금까지 몇 년 간 쉬지 않고 일에 매진했어. 노력한 자신에게 주는 휴식 기간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그 뒤의 일은 천천히 찾아보면 되고. 네 정도 경력이라면 충분히 좋은 조건으로 이직하는 건 어렵지 않아. 오히려 내가 문제지.”
서주는 마시던 맥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도 일 다시 시작하려고.”
“선배도 다시 회사로 복귀하시려고요?”
“경력 단절 된 지 몇 년이라 쉽지 않겠지만, 뭐든 시작해보려고 해.”
서주는 꽤 의욕적인 모습으로 씩씩하게 말했다. 가정생활에 매진하며 아이를 키우는 일에 집중하겠다고 했던 서주가 다시 일을 구한다는 소식에 자영은 놀랐다. 일전에 우연히 봤던 어두운 얼굴이 그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만 해볼 뿐이었다.
“응. 나도 오래 쉬었고,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컸으니까.”
서주는 빈 잔을 매만지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 뒤에 더 많은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자영은 둘 사이에 흐르는 공백의 흐름을 지켜보며 말을 아꼈다. 옆 테이블에서 노가리와 골뱅이 소면을 주문하는 소리가 들렸고, 허전한 듯 빈손으로 맥주잔을 꾹 쥔 서주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영은 호출 벨을 누른 뒤 맥주 두 잔을 추가로 주문했다.
“여기 생맥 두 잔 더 주세요.”
서주의 앞에 잔의 표면에 시원한 물기가 어린 맥주잔이 건네졌다. 마른 입을 달싹이던 서주는 맥주로 목을 축인 뒤에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자영 또한 굳이 둘 사이에 오가는 긴 침묵을 의미 없는 말이나 무례한 질문 등으로 채우지 않고 흘러가도록 두었다. 둘 사이의 고요한 적막과 맥주를 마시는 목 넘김 소리만 들렸다. 두 번째 잔을 반 절 정도 비웠을 때 서주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 사실 너한테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자영은 조용히 서주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네가 나한테 물었지. 담배 끊었냐고. 기억해?”
“네.”
“나 사실 다시 펴. 그때 너한테 한 말, 거짓말이었어.”
서주는 오래 묵혀둔 깊은 속내를 터놓듯 이야기한 뒤 ‘너한테는 속이는 것 같아서, 싫더라고.’라는 말을 덧붙였다.
“상관없어요.”
자영은 고개를 저었다. 선배가 담배를 다시 태우든, 그녀가 상상했던 모습만큼 마냥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리는 게 아니든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문제에 처해 있더라도 자영은 선배에 대해 실망하거나 기존에 갖고 있던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는 건 아니었다. 마냥 자신의 약하거나 부끄러운 면모를 숨기려 들지 않고 터놓는 진솔한 선배의 태도는 자영의 불편했던 마음을 오히려 다독여주었다. 청명한 하늘을 보며 담배를 태우던 선배의 곁에서 조잘거리며 고민을 터놓던 이십 대의 풋내 나는 때가 다시금 뇌리 속에 그려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주는, 자영에게는 소중한 선배이자 사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