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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니야 Oct 27. 2024

7. 하이볼 같은 남자

미술관은 몇 년 전과 비교했을 때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1층 카페에서 차를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통유리로 비췄고, 입구 근처에 기름기가 없는 담백한 호떡을 파는 트럭도 그 자리에 있었다.

‘여전하구나.’

에드워드 호퍼의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무작정 온 것인데, 흥미로운 주제라 보기 전부터 흥분이 고조됐다. 우연적으로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든 건 적극적 호감의 발현은 아니었다. 진지한 호감이었다면 범석과의 만남 뒤로 희미해진 기억 속 남자의 잔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김이 새버린 핑크빛 관계의 종결에 힘 빠진 건 사실이지만 사내 연애는 권할 만한 사항은 아니라는 진단을 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범석은 결혼 후에도 경제 활동을 하기를 원할 것이 빤한 고루한 남자다. 부부싸움 후 냉전에 돌입했을 때 회사 복도에서 마주치는 모습까지 연장하여 생각하자 진저리를 칠 만큼 불편했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미술의 조예가 깊은 젊은 연하의 남자를 사로잡을 만한 매력이 본인에게 있는가?라고 자문한다면 글쎄, 호랑이 눈썹을 장착했을 땐 일시적으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본성이 달라지지 않으니 매력은 금세 반감될 것이다. 의기소침하고 강단 없는 자영의 성미를 두 팔 벌려 환영할 남자는 없을 것이라며 스스로에 대해 신랄하게 진단하고 일찌감치 체념했다. 단지 지금으로서 자영은 서주 선배의 짙은 담배 연기를, 어두운 옆얼굴을 잊고 싶었다. 가라앉은 기분을 상쇄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발매한 티켓을 건네고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천천히 그림을 보는 한 편 전시 관계자들로 보이는 이들 속에서 남자의 얼굴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우연에 기댄 방문이었으므로 마주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 건 아니었다. 계획에 없던 오후의 여유를 멋진 그림과 음악으로 채울 수 있다는 점은 가라앉았던 기분을 회복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그림을 찬찬히 둘러보며 전시회장의 공기를 느꼈다. 사실주의적인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도시에서 쉽게 볼 만한 차가운 시멘트 바닥처럼 공허하고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도시의 일상적인 풍경, 하루 일과를 끝마친 직업인들의 노곤한 피로가 배어 나왔다. 그림을 보다가도 자영의 시선은 전시장 공간을 드나들거나 배회하는 이들을 향했다. 그들 중 찾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인해 자영은 쉽게 그림에 집중하지 못했다. 전시회장은 평일 오후였지만 대학생으로 보이는 인파와 커플이 제법 있었다. 몇 번이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남자는 없었다. 

“찾는 게 혹시 저인가요?”

자신의 머리보다 한 뼘 더 위에서 들리는 나직한 음성에 자영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하철에서 만났던, 자신을 개찰구까지 바래다주었던 그 남자였다. 그때와 달리 정겹게 웃고 있어서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여기서 또 보네요.”

자영은 일부러 그를 찾아온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듯 단조롭고 태연한 목소리를 내려했지만 말을 맺을 때의 떨림을 느끼며 귓불을 붉혔다. 남자에게 부끄러운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 귀 뒤로 넘긴 머리를 빼내어 달궈진 귓불을 감췄다. 그 찰나의 방어적 감정 수비를 남자가 알아차렸을까 봐 자영은 조마조마했다.

“지난번 일은 고마워요. 그날은 경황이 없었어요.”

“아뇨, 오히려 제가 불편하게 만든 건가 싶어서 걱정했어요. 초면에 모르는 사람이 바래다준다고 하는 건 충분히 경계할 만한 일인데.”

“그날은 제가 그럴 만한 상태긴 했어요. 회복됐지만.”

길게 설명하기도 모호하여 자영은 말끝을 흐렸고, 남자는 찬찬히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누군가의 눈을 똑바로 보는 일에 부끄러워하는 면이 없는 당당한 남자였다. 요즘 젊은 남자들은 원래 저돌적인 건가, 자영은 이런 게 세대차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네요.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데요.”

그는 자영을 보며 호쾌하게 말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격의 없는 사람이었다. 나이대가 높은 임직원들과 일하는 회사에서는 볼 수 없는 드문 타입.  자영은 남자의 시선을 피하며 그가 매고 있는 이름표를 빠르게 훔쳐보았다. 장준원. 남자의 이름이었다.  준원은 자영과 걸음을 맞추며 전시관에 있는 그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며 자영은 몇 년 전 나누었던 짤막한 대화가 홀연히 되살아났다. 그땐 남자친구와의 다툼으로 마음의 여력이 없었다. 경계마저 허물어진 상태로 무방비한 속내를 드러내보였던 날이 떠오르자 새삼 ‘신기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회적 인연으로 끝날 확률이 높지만 이렇게 다시 만난 점이 퍽 재미있긴 했다.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의 만남의 계기로 사용하는 빤한 레퍼토리가 삶에 적용된 건 흔치 않은 일이었으므로 자영은 이 상황에서 느껴지는 설렘을 애써 지우지 않고 그대로 느꼈다. 척 보기에도 자신보다 앳되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연상의 평범한 여성에게 호감을 가지는 일은 극히 드물겠지만 잠깐의 착각은 자유였다.  그림을 둘러보던 중 자영의 걸음은 한 작품 앞에서 멈춰졌다. [아침 햇살]이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다. 그림에는 열린 창을 보며 침대 가에 동그마니 앉아 있는 여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햇살이 들어오는 밝은 방 안의 분위기와 달리 여자의 얼굴에는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광고에서도 사용된 적 있는 만큼 유명한, 에드워드 호퍼의 대표작 중 하나예요.”

준원은 말했다. 

“그랬군요. 어쩐지 낯이 익었어요.”

“마음에 들어요?”

“이상하게 시선이 가네요.”

준원은 그림을 응시하는 자영의 옆얼굴을 보았다. 유독 길고 짙은 속눈썹이 눈가에 드리워 그림 속 처연한 여인과 분위기가 흡사한 것 같다고 준원은 생각했다. 

“그림에 대해 잘 모르지만 밝은 컬러를 사용했는데도 쓸쓸한 기운이 드네요.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는데도 고립된 느낌이 들어요. 따뜻한데 쓸쓸하고, 충분히 개방된 것 같은데 밀폐된 곳에 갇혀 홀로 있는 것도 같고.”

“제대로 봤어요.”

준원은 웃으며 대답했다. 

“호퍼는 대공황 이후 미국의 도시인을 대상으로 이들이 살고 있는 현실적 공간과 사람들을 많이 그렸어요. 대부분은 삭막하거나 황량한 느낌이 들죠. 안목이 있는데요.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건 섬세한 시선을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섬세한 시선이요?”

자영은 고개를 저었지만 강하게 부정하진 않았다. 준원의 칭찬은 마음을 간지럽게 하며 불편하였지만 피하고 싶은 부정적 감정이 아니었다. 그의 말속에는 일방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적절한 질문과 칭찬, 미소가 어우러져 대화의 충분한 윤활유가 흘러 자연스럽게 굴러가는 바퀴처럼 돌아갔다.  준원은 설명을 이어가기 전에 먼저 자영의 의견을 물었다. 작품을 봤을 때 느껴지는 생각이나 감상에 대해 질문한 뒤에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 대답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두서없는 대답을 이어가더라도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했다. 그 작은 끄덕임이 자영이 힘껏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작은 독려였다. 그림 속 여인이 다른 작품 속 인물들과 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을 때도 준원은 같은 사람이 맞다고 대답했다.

"누군데요?"

준원은 웃으며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요."라고 말했다. 장난기가 다분한 웃음이 입가에서 흘러나올 때 자영은 따라 웃었다. 전염되는 밝은 생기였다. 준원은 다음 전시 해설 시간이 다가오는데 들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고 자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정된 시간이 되자 전시관 중앙에 있는 준원에게 사람들이 다가왔다.  헤쳐 모여 있던 이들이 모이자 전시관이 제법 들어찼다. 자영은 이들을 뒤따르며 들은 해설을 통해 그림 속 여인이 에드워드 호퍼의 아내인 조세핀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인파 사이를 뒤따르던 자영은 어쩐지 준원의 시선이 여러 시선을 피하여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염력 같은 힘이 준원의 눈에서 뿜어지는 것만 같아서 일부러 그림에 시선을 두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품 보시다가 궁금한 게 있으시면 편하게 물어봐주세요."

이십여 분의 작품 해설이 끝난 뒤 준원의 마지막 인사가 끝났고 인파는 흩어졌다. 

"어땠어요?"

"설명을 듣지 않고 보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거예요. 덕분에 감상을 더 잘할 수 있게 됐어요."

"다행이네요."

답지 않게 준원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다른 이들을 칭찬하고 허물없이 말하는 건 능숙하면서도 본인의 칭찬을 듣는 것은 어색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무해한 소년처럼 느껴졌다. 

“덕분에 아까 듣지 못했던 답도 알게 됐어요. 아내인 조세핀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도 들어보는 건 어때요? 더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은데.”

준원은 예정되어 있던 해설 업무는 방금 전 끝났다는 말을 덧붙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지만 기다렸다는 듯 덥석 좋다고 승낙하는 것이 어색해서 머뭇거리자 준원은 말했다.

“혹시 다른 선약 있어요?”

자영은 고개를 저었다. 준원은 웃으며 “고맙다면서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같이 저녁 먹어요.”라고 말했다. 


*


미술관 근처에 준원이 자주 가는 가게로 향했다. 그는 작품에 대한 감상을 물어봤을 때처럼 어떤 음식을 먹고 싶은지 자영의 의사를 물었다. 한식 중식 양식 일식 중 구미가 당기는 쪽은 한식이었다. 그중에서도 얼큰한 국물이 끌렸지만 자영의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말은 ‘양식’이었다. ‘이 근방에 감자탕 맛있는 곳도 있어요.’라는 그의 말에 둔해져 있던 미각이 살아나는 듯했지만 격의 없는 사이에서나 가능한 살코기와 뼈 분리 과정을 이 남자에게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도 기품과 우아함 따위를 잃지 않는 사람으로 비치고 싶었다. 나이가 든 상태를 바꿀 수 없다면, 그 뒤에 따라오는 설명이나 연상되는 이미지는 세련되고 멋스럽게 보이고 싶었다. 적어도 이런 젊은 남자와의 만남에서 만큼은, 와인이 좀 더 어울렸다. 

 와인바에서는 트러블 크림 파스타와, 6가지 치즈와 올리브, 초리조로 구성된 치즈 플래터와 레드블렌드 품종의 당도가 높은 뚜에벨을 주문했다. 준원은 테이블에 놓인 치즈를 크래커에 얹어 입으로 가져갔다. 뒤따라 그가 먹었던 대로 따라먹자 은근한 짠기가 식욕을 돋구웠다. 통유리로 어두운 밤거리의 부우옇게 퍼지는 가로등 빛과 이따금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보였다. 지금 자신이 몸담고 있는 환경과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호퍼의 작품 중 하나가 떠오르자 자영은 웃었다. 그가 왜 웃는 거냐고 물었다.

“아까 봤던 작품이 생각나서요. 순간 내가 당신과 술을 마시는 장면이 호퍼의 그림을 재연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이렇게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실제로 본 뒤에 그렸겠구나 싶어요.” 

자영은 웃으며 말했다. 

“그 작품 뭔지 알 것 같은데. 동시에 생각하고 있는 작품 말해보는 거 어때요?”

준원은 물었고, 둘은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라고 동시에 답했다. 둘은 웃음이 터져 수초 간 함께 웃었다. 웃을 때 흐르는 준원의 소성은 곱고 상쾌해서 따라 웃는 사람의 호흡도 담장의 넝쿨이 버드러지듯 부드럽게 뻗어 나오도록 만들었다. 

“우리, 같은 생각을 했네요.”

“자영 씨는 섬세한 관찰력의 소유자 같아요.”

“설명을 상세하게 해 주셔서 그렇죠. 몇 가지 인상 깊었던 작품만 떠오를 뿐이에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거고요.” 

“전 자영 씨만큼 작품을 꼼꼼하게 보고 자신만의 독자적 시각을 가진 감상자를 만난 적이 없어요.” 

준원은 웃으며 자영의 말에 귀엽게 반박했다. 

“요즘은 작품에 대해 애정을 갖고 찾아와 주시는 분도 있지만, 전시회장을 하나의 스튜디오로 생각해서 작품보다는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 배경으로 활용하는 분도 많아요.”

준원은 엄지와 검지를 위아래로 움직여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시늉을 취했다. 

“사진 촬영 금지라고 명시해 두어도 셔터 음 들리지 않도록 설정해 두고 찍기도 하고요. 제지해도 쉽지 않아요. 그래서 더 반가웠어요. 작품을 진지하게 감상하는 게 좋아 보여서.”

“그림을 좋아하지만 보러 온 건 오랜만이에요. 그림에 대해 잘 알진 못해요.”

자영은 준원의 칭찬이 과분하게 여겨서 얼굴을 붉혔다.

“이것 하나쯤은 마음속에 간직해 뒀다가 꺼내보고 싶어,라고 생각하는 작품 한 두 개 정도 떠올릴 수 있으면 충분하죠. 굉장한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도 지극히 평범한 이들의 일상을 그렸어요. 화려하지도, 대단히 비극적이지도 않은.”

“그래서 좋았어요. 잘 모르던 예술가인데, 알고 보니 더 재밌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더군요.”

“저도요. 덕분에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알게 돼서 좋아요. 잘 왔어요.”

준원은 웃으며 대답했다. 잘 왔다는 말에 자영의 가슴은 탈싹거렸다. 그는 마치 자신의 집에 방문한 귀한 손님에게 좋은 것만 대접하기 위해 애쓰는 사려 깊은 주인처럼 말했다. 개찰구에서 헤어지던 때에도 자신이 사는 곳에 대해 말해주듯 아직 그곳에 있다고 이야기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부터 이 일을 했어요?”

자영은 와인을 마시며 물었다. 

“대학 다닐 때부터였으니까 4년 정도. 취미로 시작했던 일인데 좋아하니 계속하게 됐네요.”

“나이는 나보다 어린것 같은데, 연차는 비슷하네요. 전 일한 지 5년 됐어요.”

도수가 높지 않은 와인이라도 알코올이 지나간 자리는 부드럽게 넘실거렸다. 둘은 서로의 일에 대해, 그가 전시 해설을 도맡아 했던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었다. 미술 작품에 관심이 많았지만, 디자인 쪽에도 흥미를 느끼는 준원은 자영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고, ‘공통점’을 하나 둘 발견하며 가까워졌다. 공교롭게도 둘은 미술 외에도 취향이나 취미도 비슷해서 어렵지 않게 여러 화제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주제가 동이 나서 분위기가 어샌지는 일은 없었다. 

 준원은 스물일곱 살로, 자영의 예상대로 어렸다. 그가 설명하기 전까진 도슨트와 큐레이터가 동일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맡고 있는 업무가 전혀 다르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전혀 몰랐어요. 이런 쪽으로는 까막눈이라.”

“모르는 게 당연해요. 저도 시작하기 전엔 몰랐으니까.”

“어떻게 이 일을 하게 됐어요?”

“예술 관련 사 보지에서 기고를 하고 있어요. 그쪽에서 일할 때 글이 막히다가도 그림을 보면 해방감이 들었어요. 그때 알게 됐어요. 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그림 이면에 담겨 있는 메시지에 호기심을 갖는구나 하고. 대학 땐 봉사활동 정도로 생각해서 잠깐 하던 일인데, 꾸준히 하게 된 이유예요. 도슨트는 큐레이터와 다르게 퇴직한 어르신이나 학생들의 무급 봉사 활동 정도로 인식되어서 전문적인 직업으로 갖긴 어려운 면이 있어요. 그래서 꾸준히 기자로서 활동하면서 겸업하고 있고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알고, 애정을 가진 업무에 열정을 쏟는 일은 멋지게 느껴졌다. 문득 자영은 서주 선배 밑에서 일을 배우던 신입 때 그녀의 저돌적이고 당당한 태도와 책임 의식에 감동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서주 선배에게서 엿보였던 정대한 성품이 준원에게서도 비쳤다. ‘난 이러한 생동감을 뿜어내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는구나.’ 새삼 알 수 있었다. 문득 자영은 선배를 떠올리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때 서주 선배는 동경하기에 충분한 멋진 인생 선배였다. 자영이 길을 잃고 헤맬 때 ‘자, 그쯤 했으면 이젠 빠져나올 때도 됐잖아’라고 여유 있게 말하며 끌어줄 수 있는 횃불 같은 사람. 그랬던 선배의 어둡고 침잠한 면을 목격한 일은 자영에겐 충격이 컸다. 기능적인 면에서 완벽하다고 믿었던 제품에 원인 모를 오류가 생겼을 때처럼 막막한 당혹감의 일종이었다. 선배의 말 못 할 아픔에 대해 언급하거나 말할 자신도 없었다. 그 상처에 대해 조언하기엔 자신은 미숙했고, 서주 선배는 자영에게 너무도 큰 나무의 그림자 같았다. 그러나 목격한 상처를 못 본 척 평소대로 대할 자신도 없다. 숨통이 막히는 회사 생활만으로도 버거 운데, 믿었던 선배의 휘청임은 더욱 마음을 괴롭게 했다.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은데, 물 좀 마실래요?”라고 말하던 준원은 자영의 빈 잔에 생수를 채워주었다. 자영은 드리워졌던 얇은 거즈 수건을 들춰내듯 선배에 대한 생각을 거둬냈다. 

“지난번에 보니까 두통이 있는 것 같은데, 자주 그런 편이에요?”

“잦은 야근으로 체력 저하가 원인이었어요. 그때보단 오늘이 낫지 않나요?”

자영은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 준원은 그때와 달라진 면이 무엇인지 콕 집어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이목구비의 변화 없이도 이미지가 바뀔 수 있다는 건 전적으로 눈썹의 영험한 힘 덕분이었다. 자신이 겪은 변화에 대해 술김에 터놓는다 해도 준원은 믿지 않겠지만. 

“네. 다르게 느껴져요. 그래서 안도했어요.” 

“어떤 면에서요?”

“처음 봤을 땐 꼭 내 모습을 비춰 보는 것 같았어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표정 없는 석고상을 보고 있었잖아요. 두 번째 만났을 때도 비슷한 절망이 느껴졌어요.”

“죽으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자영은 변명을 늘어놓는 아이처럼 풀 죽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알아요. 진짜 죽을 거였으면 인적이 드문 곳이 유리할 테고, 그토록 오래 지하철을 보내진 않았을 거라는 거.”

자영은 그 말에 놀랐다.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다 몇 차례 지하철을 놓쳤을 때도 준원은 곁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림을 보러 다시 왔잖아요.”

준원은 미소를 띠며 이어 말했다. 

“내 안에 있는 문제에 골몰하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들리지 않아요. 예술이란 작가가 느끼고 경험한 아름다운 세상을 화폭에 옮겨 놓는 작업이고, 그 작업물을 보는 게 아니라 ‘감상한다’라고 표현하는 건 단순히 응시하는 게 아니라 그림의 담긴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기 때문이에요. 마음의 넉넉한 여유가 없다면 할 수 없는 작업이에요.”

민망하여 얼굴을 붉히던 자영은 대답대신 술을 들이켰다.

“훨씬 좋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그날 많이 걱정했다는 뜻이었어요.” 


준원은 작품 해설을 하거나 사보 기사로 일하며 겪는 고충에 대해 터놓았고, 자영은 디자이너로 일하며 겪는 불합리한 일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었다. 숫기가 없는 자영으로서는 연하의 남자와 막역하게 지내본 일이 없어 생경한 시간이었다. 연하의 남자는 어린 티를 벗지 못해 미숙하거나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편견을 갖고 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즐거운 만남이었다. 연하의 남자도 충분히 남자로 느껴질 수 있구나, 자영은 준원을 보며 생각했다. 취기에 기대어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푸념했을 때도 준원은 공감해 주었다.  

“디자인의 영역은 기능적인 일이 아닌데도 무엇이든 뚝딱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독촉하는 것도 스트레스가 클 것 같아요. 시각적인 이미지를 구현하는 중요 역할을 도맡은 디자이너에 대한 대우도 좋아져야 마땅한데. 보수적이거나 나이가 제법 있는 오너들은 ‘디자인’의 영역을 단순히 툴을 다룰 줄 아는 기술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기자로 일하면서 마감에 쫓겨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고충이 많았겠어요.”

고충이 많았겠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영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에서 비틀거리는 자영을 부축해 줄 때엔 무례하고 오지랖 넓은 남자인 줄 알았는데, 대화를 이어갈수록 배울 점이 많았다. 

“괜찮으면 자리 옮겨서 더 이야기하는 건 어때요?” 

자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방에 있던 한강 공원을 걸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낮에는 거인의 뜨거운 입김처럼 습도 높은 열기로 뒤덮여 있던 공기가 밤이 되니 한층 가볍고 시원했다. 이따금 연인으로 보이는 한 쌍이 다정하게 팔짱을 끼며 걷거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우리도 누군가의 눈엔 ‘연인’으로 보일까, 자영은 생각하며 준원이 최근에 쓰게 된 ‘영화 속에 나오는 명화와 관련한 실제 사례를 다룬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취미나 연애, 앞으로의 꿈에 대한 화두까지 이야기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싶으냐는 준원의 질문에 자영은 모호하게 웃었다. 디자이너라는 말보단, 구체적 업무 분야로 나누지 않고 통칭한 ‘직장인’이라고 불리는 게 더 어울렸다. 미감을 일으키게 만드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보다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업무를 겨우 받아내며 버티고 있는 격이었다. 정작 자신이 하는 일에 애정을 느낀 적도, 평안과 안정을 느낄 위안의 대상도 없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자 그 외로움이 낯선 남자의 호의에 깊게 의미부여를 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정감을 느끼고 싶다, 상사의 비위와 클라이언트의 눈치를 살피며 뒤쫓기듯 일하는 세상에서 벗어나 언제든 쉬어가고 기댈 수 있는 듬직한 남편과 가정을 갖고 싶다. 그런 간절한 바람이 술김에 강하게 밀려들자 자영은 불쑥 이렇게 말했다. 

“실은 제 꿈이 뭔 줄 아세요?”

“뭔데요?”

“남들만큼 평범하게 사는 거. 우습고 하찮게 들릴 수도 있지만요. 이따금 말다툼도 하고 투덕거려도 한 침대에서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잠드는 가족을 만들고 싶었어요. 서른이 넘은 뒤로는 남편을 얻는 일부터가 고도의 난제지만.”

“꿈이 커리어와 관련되어야 한다고 누가 그래요.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도 충분히 멋져요.”

준원은 특별한 성취를 향한 야망이 아니라고 해서 위축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남들보다 잘나거나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꿈을 꾸는 게 아니니까, 진짜 원하는 건 모든 꿈이 될 수 있어요. 어떤 이에겐 강아지를 키우며 시골집에서 사는 게 소박해 보이더라도 안락하고 멋진 꿈이 될 수도 있고요.”

 누군가 ‘고작 그 정도가 꿈이냐’고 되묻거나 조소하듯 말한다면 혼찌검이라고 내주겠다는 어조로 준원이 말했을 때 자영은 웃음이 터졌다. 꽤나 진지한 얼굴로 발 벗고 나서서 편을 들어주려는 모습에 지원군을 얻은 기분을 느꼈다.  

“위로가 되네요. 내 꿈의 크기에 대한 위축감이 있었는데.”

“원하는 크기의 꿈은 사람마다 다르고 크기나 질량은 함부로 판단할 수 없어요.”

자영은 가볍게 숨을 토해내며 웃었다. 나이와 무관하게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은 작지만 든든한 조언을 건네는 스승이 되어주는 것 같다. 내가 이십 대엔 어떤 생각으로 살았나, 준원을 보며 새삼 자영은 과거의 자신을 떠올려보았다. 

“이십 대에는 세상이 오로지 나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어요.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공부했고, 그 노력으로 직장을 들어가게 됐죠. 그땐 만나는 사람도 있었으니 이대로 착실히 돈을 모으면 순탄한 미래로 흘러갈 줄 알았어요. 지금 나이 정도가 되면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로, 평범하게 살 줄 알았던 거예요. 내가 꿈꿨던 대로. 평범한 삶의 기준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때는 충분했으니까요.”

자영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뒤처지고 있는 기분이에요. 나이가 든다는 건 그 자체로 선두에서 멀어지고, 중심에서 벗어나는 걸 의미해요.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와 헤어지면서 혼기를 놓치고, 쌓인 경력만큼 주어지는 업무의 책임감은 회사에서 커졌어요. 그 사이에 친했던 동료와 친구들은 이직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 자리를 잡았어요. 모두가 공고한 자신만의 자리를 마련해 가는데, 나 혼자 방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대로 나이가 들면 경력만큼 높아진 연봉을 맞춰줄 다른 회사로 이직할 기회는 줄어들 거고,  인연을 만날 기회도 닫혀 버릴 거예요.”

자영이 젊은 연하의 남자 앞에서 구현하고 싶은 이미지란 자기 일에 열중하여 자립적인 삶을 꾸리는 커리어우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엉뚱하게 방향을 틀어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건 아마 준원이 발휘한 다감 성에 잠겨 있던 마음의 문이 무방비하게 열린 탓이리라. 

“이상한 말을 늘어놓았네요. 술 먹고 한탄하는 사람만큼 못난 것도 없는데.”

“자영 씨가 한 말들 이상하지 않아요.” 

“그럼 이해할 수 있다는 거예요?”

자영은 웃으며 물었다. 이십 대의 파릇한 청년이 불안한 직장 생활과 이별 후 연애 불능 상태가 되어버린 서른 후반의 여성의 너절한 심정을 알 리 없다. 그런데도 그럴 수 있다고, 덮어두고 이해하려는 너른 마음이, 고집 없는 태도가 귀엽게 느껴졌다. 

“다른 이들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도달하거나 이루는 것들이 나한텐 꿈으로 남아있는 게 싫어요.”

“가령 어떤 거요?”

준원은 구체적으로 물었다. 

“아직 어려서 모를 수도 있지만, 내 나이 정도 되면 아직 안 간 쪽이 어딘가 하자가 있다고 여기는 경우가 빈번해요. 결혼 적령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늦게 결혼하는 사람도 많다지만 보이지 않는 따가운 편견은 여전해요. 왜 아직 안 갔어? 이 말 들으면 부아가 치밀어서 제발 남 일에 지극한 관심을 꺼주시죠,라고 버럭 소리치고 싶어 지거든요.”

어쩌면 자영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는 존재라고 믿었던 서주 선배의 어두운 옆얼굴과 담배 연기는 잘못 삼킨 알사탕과 같이 마음에 걸렸고 지워지지 않은 채 마음을 솔도록 만들었다.

“지금은 모르겠어요. 내가 바란다고 믿었던 게 정말 원하던 거였는지. 내가 꿈꿨던 삶을 모두 이뤘다고 믿은 사람이 어쩌면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요?”

“제가 동경하고 좋아하는 회사 선배가 있어요. 그 선배는, 매력적인 외모와 출중한 실력, 사려 깊은 성격으로 어디서든 주인공처럼 빛났어요. 결혼마저 성공한 사업가랑 할 땐 선배답다고 생각했죠. 난 그런 선배를 닮고 싶었어요. 나의 롤 모델 같은 사람이랄까. 그런데, 오늘 본 선배는.”

자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카락에 가려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깨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준원은 그녀가 말을 다시 이어 갈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밤은 깊었고,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진 검푸른 장막에는 서울 하늘에서 보기 드문 별빛이 맺힌 눈물처럼 작게 빛났다. 고요한 가운데, 이따금 여름밤의 열기를 깨우는 매미와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준원은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영의 속도에 맞춰 걸었다. 공기의 흐름을 말로 채워할 할 필요는 없으니까. 어떤 때는 고요한 기다림이나 끄덕임이 주는 여백이 마음을 채워준다는 것을 준원은 알고 있었다.  기다림은 그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사고로 다리를 다친 형이 재활을 포기한 채 방에서 나오지 않을 때에도 하염없이 기다렸다. 형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일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고,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멈추지 않고 문을 두드려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했다.  1년 만에 형이 입을 열고 준원에게 했던 말은 ‘미안해’라는 짧은 말이었다. 충분히 기다리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말, 열리지 않았을 문이었다. 닫혀 있지만 열고 싶은 문은 그 하나 만은 아니었다. 1년 전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던 자영의 옆얼굴을 준원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자영은 무언가를 호소하는 표정이었다. 역 내에서 다시 보게 됐을 때도 마찬가지. 그간 있었던 말 못 할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굳게 닫힌 문 같았다.  선뜻 손을 내밀고 싶을 만큼 지친 얼굴이 준원의 마음을 한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무채색 표정 없는 얼굴로 서 있던 여자에게 관심이 기운 건 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때의 자신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말로 뚜렷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준원은 자영에게 동질감 비슷한 것을 느꼈고,  ‘다 알 순 없겠지만 이해하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랐다. 

 발 앞코만 보며 걷던 자영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목덜미에서 머리카락이 작게 흔들렸고, 눈가에 번진 물을 손등으로 훔치는 손놀림이 재빨랐다. 자영은 쓰디쓴 심정을 감추며 잘린 말허리를 맺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준원은 고개를 돌려 자영을 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 그녀는 말했다.

“알아요,  다른 사람이 봤을 땐 심각하게 여길 만한 일이 아닐 수 있어요. 그저 공원 벤치에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을 뿐이에요. 흡연자들에겐 이상할 게 없는 행동이니까. 그런데 선배는 분명 결혼한 뒤에 아이를 위해 담배를 끊었어요.”

자영은 얼마 전 서주와 나눴던 통화를 떠올렸다. 담배를 여전히 피우느냐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근데 어째서 선배는 제가 담배를 피우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대답한 걸까요.”

자영은 우연히 목격하게 된 서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예정에 없는 반차를 쓰지 않았더라면, 또는 범석이 변심하지 않거나 부장과 얼굴 붉히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지금 떠올리는 것 중 한 가지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면 선배를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고, 안 갔더라면 보지 못했을 장면이었다.  담배를 피우던 서주는 지친 기력이 역력해 보였다. 프로젝트 준비로 연일 야근 하던 때에도 보이지 않던 어두운 그늘은 육체적 노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깊고 무거운 시름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 얼굴은 제가 선배를 알게 된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어쩌면 선배가 저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다예요?”

좀 더 깊은 심연을 되짚어보도록 종용하는 물음이었다.  자영은 예리하게 찔러오는 말에 속내를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마치 보고 싶지 않은 장면 앞에서 TV 전원을 꺼버리듯 뒤돌아서 벗어난 건 진정 선배에 대한 ‘배려’였는지 되물어보았다. 선뜻 그렇다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선배가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거라는 말의 이면엔 그 광경을 못 본 척하고 싶은 자기 자신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영은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워 준원을 똑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선배는 저한테는 도달하고 싶은 꿈이었어요.”

“그런 선망의 대상이었던 사람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는 건가요?”

준원은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그 모습을 선배가 보이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 건 거짓말이에요. 본심은,  내가 실망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건 선배는 모르겠지만.”

자영은 얼굴을 푹 숙였다. 두 사람은 정지된 화면처럼 말없이 풍경 속을 걸어갔다. 

“이쯤에서 그만할게요. 술 취해서 하소연만 해댔네요.”

“하소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필요하면 할 수도 있죠, 하소연.”

자영은 서서히 녹은 얼음의 물방울이 유리잔 표면에 맺히듯 마음의 경계가 묽어지는 것을 느꼈다. 

“초면에 이미 애국가 삼절 정도 되는 한탄을 했는데도요?”

“아직 4절 더 남네요.”

준원의 말에 자영은 식은 웃음을 터뜨렸고 덩달아 그 또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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