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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니야 Oct 27. 2024

5. 달콤한 허상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졌지만, 온종일 내리 붓는 장대비가 아니라 촉촉이 바닥을 적시며 잘금하다 멈출 비였다. 이 정도로 기분 전환이 될 줄 알았더라면 진즉 시도해 볼 걸, 생각하며 자영은 속눈썹 연장을 늦심은 일에 후회가 들었다. 자영은 집 근방에 있는 편의점에 들렀다.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는 것을 살 요량이었다. 자신에게 아줌마,라는 말로 모욕을 주는 남자가 있을까 봐 통유리로 살펴봤지만 다행히 그는 없었다. 대신 눈매가 매력적인 여자가 운율이 느껴지는 밝은 음성으로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지난번과 다르게 높게 묶었던 말총머리가 어깨 위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때 아닌 비가 추적이는 밤거리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라 ‘기분이 좋은 걸’하고 생각했다. 자영은 샌드위치와 우유를 집었다. 계산대로 향하려다 똑 떨어진 생리대가 떠올라 그것까지 집어 계산대로 향했다. 

“지난번에는 고마웠어요.”

자영은 여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뭘요. 그쪽에서 무례하게 굴어서 오히려 제가 더 화가 났는걸요.”

가까이에서 본 여자는 멀끔한 차림새에 웃을 때 휘어지는 눈매가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세상의 풍파가 들이친 적 없는 말간 안색은 앳되어 보였다. 계산대 한쪽에 반쯤 펼쳐둔 책과 바나나 우유가 눈에 들어왔다. 알바를 하는 틈틈이 공무원이나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이 샌드위치는 원 플러스 원이에요. 잠시 만요.”

여자는 냉장고에서 다른 샌드위치를 꺼내 왔다. 자영은 구매한 물품을 봉투에 넣는 여자의 바지런하고 야무진 손동작을 관찰했다. 한쪽에 놓인 우유로 향한 시선을 느낀 여자는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아, 새로 나온 우유인데 맛있더라고요. 유통기한이 지나서 폐기 등록해야 하는 것들 중 하나인데 먹어보니 맛있어서 끼니 때우기 애매할 때 자주 먹어요.”

묻지 않아도 자신의 이야기를 툭 터놓을 수 있는 솔직함이 무해하게 느껴졌다. 무감각한 기계처럼 반복적으로 계산만 하지 않고 낯선 이에도 사근사근하게 말을 붙이는 친화력이 순수했다. 자영은 웃으며 봉투에 담겨 있는 샌드위치를 꺼내 건넸다.

“때마침 원 플러스 원이라 좋네요. 나눠 먹을 수 있으니까.”

“아니에요. 전 여기 있는 거 먹으면 돼요.”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손사래를 쳤다. 

“저도 대학시절에 편의점 알바를 했던 때가 있어요. 그때 폐기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게 일상이었어요, 그런 간편한 음식도 좋지만 가끔은 잘 차려진 한 끼를 먹을 때도 필요해요. 밥 잘 챙겨 먹으면서 공부도 하고 일도 해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어째서 모르는 여자에게 친언니처럼 조언을 건넸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자영은 마음의 한결 여유가 생겨 무언가를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관찰할 수 있는 여유가 마련된 기분이었다. 

“전보다 안색이 좋아지셔서 다행이에요.”

그 말에 자영은 멈칫 여자를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바뀌어서 긴가민가했어요.”

주인의 말대로 신비한 속눈썹의 힘이 발휘된 것일까? 자영은 지난 시간을 복기했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협소하게 줄이고 집-회사를 반복적인 패턴으로 오가는 것에 익숙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 사이에서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다못해 편의점이나 마트에 장을 보러 갔을 때에도 일하는 분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적도 없었다. 이렇게 짧지만 정겨운 대화를 나눈 건 근래에 없던 일이었다. 생계와 직결된 것이 아니면 일절 손조차 대려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낄 줄 모르는 회색유령처럼 떠다녔다. 이별의 후유증으로 얻은 상처와 우울은 치유되기보다 덧나며 일상이 무채색으로 바뀌어버렸다는 걸 자영은 그제야 깨달았다. 깊숙한 구덩이에 빠진 것만 같은 우울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아무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 근처 사시죠? 자주 오셔서 얼굴 기억하고 있었어요. 늘 무표정하셔서 잘 몰랐는데, 웃으시니까 훨씬 좋아 보이세요.” 

“아, 제가 그랬군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는데.”

여자의 말에 자영은 얼굴을 붉혔다. 그간 고개를 푹 숙이고 계산한 뒤 카드를 건네받고 가거나 작은 목소리로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이렇게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친 일도 거의 없었으니 자주 방문하는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 얼굴을 알고 있었을 리 없었다. 

그것으로 짧은 대화는 끝이 났다. 자영이 집으로 가려할 땐 빗줄기가 조금 더 굵어졌다. 여자는 투명한 문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다 자신의 우산을 건넸다. 

“쓰고 가세요.”

“집이 근방이라 뛰어가면 금방 도착해요.” 

“전 야간이라 괜찮아요. 다음 날엔 비가 그칠 거예요.”

“그렇지만,”

자영이 머뭇거리듯 말하자 여자는 말했다. 

“샌드위치 주신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고마워요. 다시 돌려줄게요.”

친절한 아르바이트생의 배려로 자영은 우산을 쓰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출입문을 나올 때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키가 큰 남자가 비에 젖은 어깨를 털며 들어왔다. 남자는 곧장 여자에게 다가갔다. 대화를 나누는 둘 사람 사이의 친밀감이 느껴졌다. 우산을 쓰고 걷던 자영은 고개를 돌려 편의점 창을 바라봤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을 보며 둘 사이가 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남자친구와의 연애 시절이 불현듯 떠올랐다. 김밥 한 줄을 나눠 먹고, 도서관에서 나란히 앉아 공부하는 게 데이트의 전부였던 때가 아련하게 떠오르자 자영은 코끝이 찡해져 버렸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회한보다는 당연시했던 일상이 지속되지 않는 찬란한 한 때라는 사실을 실감하여 느끼는 아련한 향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로의 마음은 조금씩 뒤틀리거나 다른 방향으로 향했지만 어느 시절엔 영롱하게 빛을 발하던 때가 자영에게도 있었다. 자영은 앳되어 보이는 어린 연인의 귀여운 모습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우산 표면에 맺혀있는 빗물을 털어낸 뒤 습기가 차지 않도록 활짝 펴서 베란다에 말려 두었다.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간소한 속을 품은 샌드위치를 베어 물며 창을 열었다. 환기되지 않은 집안에 빗물을 뒤집어쓴 차가운 바람이 드나들었다. 빗소리가 귀를 기울이자 복잡했던 마음이 조용히 잦아들었다. 


가뿐한 몸으로 눈을 떴을 때 시침은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영은 눅진하게 늘어진 엿가락처럼 무거웠던 몸이 가뿐하다고 느꼈다. 비슷한 패턴으로 생활하였는데, 몸이 가벼운 점이 신기했다. 드라마 프렌즈의 재생 버튼을 눌러놓은 뒤 도시락을 싸고 출근 준비를 느긋하게 시작했다. 이십 분 먼저 일어난 아침은 시간에 쫓겨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마음까지 유여했다. 젖은 머리를 말리며 거울 앞에 섰을 때 익숙한 듯 낯선 얼굴이 비췄다. 자영은 눈을 몇 차례 깜빡이며 얼굴을 비춰보았다. 얼굴의 기미나 주름은 여전하고, 이목구비가 달라진 게 없는데 묘하게 분위기가 청량하고 고혹적으로 바뀌었다. ‘호랑이 눈썹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걸까?’ 이렇게 거울 앞에서 얼굴을 자세히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간 늘어나는 주름이나 기미 따위가 싫어서 보지 않았는데, 그날 아침 자영은 꽤 오래 거울 앞에 머물렀다. 

출근 준비를 끝마친 자영은 거울에 한 번 더 모습을 비춰보았다. 말끔하게 정돈하여 말린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기다 허전한 목이 눈에 들어왔다. 가게 주인의 가냘프고 긴 목에서 반짝이던 검은색 초크가 떠오르자 오랜만에 보석함을 열었다. 변변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액세서리 사이로 전남자친구가 선물한 목걸이가 보였다. 프러포즈를 바랐던 작년 생일 때 그가 건넸던 건 네 번째 손가락의 반지가 아닌 작은 진주가 박힌 얇은 체인의 목걸이였다. 왜 반지가 아니라 목걸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반지는 나중에 주겠다며 말끝을 모호하게 흐렸다. 그때 느꼈던 허탈한 실망감이 떠올랐지만 이내 지워냈다.  자영은 실망의 기억이 다발로 엮여 있는 목걸이 곁에 다른 목걸이를 집어 착용했다. 액세서리를 착용하거나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이 오랜만이라 어색했지만 들뜨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런 작은 행위들이 모여 새것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영의 입에서 경쾌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자영은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에 편의점에 잠깐 들러서 어제 빌려 준 우산을 돌려줄 계획이었다. 활짝 펼쳐져 있는 우산은 물기가 말라 보송했다. 우산을 개어 접은 뒤 가방에 챙겨 넣고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 편의점을 봤지만 자영에게 우산을 빌려준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교대 근무 시간을 넘긴 뒤였던지 졸린 눈을 메기처럼 끔뻑이던 남자가 대신 그 자리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었다. 우산은 나중에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지하철을 탔다. 승강문 어귀에 서 있을 때 눈에 익은 카피가 눈에 들어왔지만 시선을 거두었다. 어쩌면 당신은 아직 인연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대한 자영의 정직한 속마음은 수긍했지만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조급한 압박으로 무리한 노력을 감행하고 싶지 않았다. 장기 연애했던 남자친구와 이별을 했더라도 아침 출근길은 달라지지 않았으며 눈가에 까만 얼룩처럼 기미가 내려앉더라도 피부 화장은 여전히 얇고 가볍게 했다. 구태여 갖은 노력과 애를 써서 나이 든 티가 나지 않도록 감추는 일도,  주변 사람들의 결혼 소식에 짝 잃은 짚신처럼 혼자 있다는 사실에 심각해져서 누구라도 좋으니 인연을 찾아야 한다는 위기의식도 갖고 싶지 않았다. 지혈되지 않은 상처의 피를 흘리며 눈을 감고 있던 석고상의 얼굴이 스치듯 떠올랐다. 아픈 상처의 장막이 드리워지고, 창으로 비가 들이치더라도 이렇게 맑고 화창한 하늘이 떠오르는 때가 있지 않은가, 지하철 창으로 맑은 햇살이 내려앉은 한강이 보였다. 출근길엔 다른 때보다 더 오래 넓은 강물과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비가 그쳤네.’

낮게 중얼거리는 자영의 목소리가 덜컹거리는 지하철 소음에 사위었다. 

 환승 지점에 도착하여 내릴 때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혹시 그 남자가 아닐까, 옅은 기대감이 일었지만 돌아본 곳에는 낯선 얼굴이 바라보고 있었다. 서른 후반을 웃도는 나이대의 남자는 귓불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로 두서없는 말들을 한 뒤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고 사라졌다. 인파 사이에 섞여 사라지는 남자와 명함에 쓰여 있는 이름을 번갈아보았다. 대학생 때 이후로 모르는 남자에게 호감의 표시를 받아본 건 처음이라 얼떨떨했다. 출근길에 피로에 취해 다른 사람과 오인한 건 아닐까. 화장기 없는 얼굴에 평범한 셔츠와 슬랙스, 단화 차림의 수수한 직장인 여성은 누가 보더라도 특별한 매력을 발견할 수 없을 텐데, 의아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자영은 굽어있던 어깨를 쭉 피며 오랜만에 착용한 목걸이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건네받은 명함을 접어 가방에 넣으며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값비싼 옷을 입거나 새 가방을 산 것도 아닌데, 자신이 대단한 매력을 겸비하게 된 것만 같았다. 

“어쩌면 호랑이 눈썹의 능력이 진짜인지도 몰라.”

호랑이 눈썹의 신비롭고 영험한 힘에 대한 기분 좋은 예감을 하던 자영은 다른 때보다 이른 시간에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


탕비실 한쪽에 비치된 파쇄기에 필요 없는 서류를 넣자 종이는 국수 면발보다 더 얇게 잘려 나왔다.  머릿속에도 파쇄기가 있어서 쌓여 있는 복잡한 상념도 넣으면 잘게 잘려서 알아볼 수 없게 저며졌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쌓여 가는 종이더미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인기척이 들려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부장은 뜨거운 커피를 내리며 흘깃 이쪽을 보았다. 부장은 자영을 보고 놀란 표정이었다. 자영은 그가 말을 걸기 전에 파쇄된 종이를 옮겨 담은 박스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장을 빠르게 지나쳐가는 자영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얼거리는 말소리는 문을 지나쳐 나가는 자영의 귀에도 또렷이 들렸다. 

“뭐지, 분명 달라졌는데, 뭔가.”

피식, 자영은 넋이 빠진 얼굴로 자신을 주목하여 보는 부장의 시선을 유유히 즐기며 자리로 돌아갔다.  직원들은 전과 달라진 자영의 분위기에 반색하며 신기하게 여겼다. 기획팀의 전무는 자영이 종이 더미가 들려 있는 상자를 안고 나오자 먼저 다가와 도움을 주었다. 사용하는 사무실 층수가 다른 부서의 사원들도 엘리베이터에서 자영을 마주쳤을 때 평소와 달리 반색하며 인사를 건넸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라는 모토를 가진 자영은 전에 없던 사원들의 관심과 호의가 어색했다.  갑작스러운 관심은 자영에게 생전 느껴보지 못한 야릇한 쑥스러움을 일게 만들었다. 외관의 특별한 변화가 없는데도 인상과 분위기를 바뀌게 만드는 ‘호랑이 눈썹’의 힘이 실제 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점심시간, 동료들은 자영에게 저마다 탄성과 질문을 아끼지 않았다. 며칠 사이에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칭찬 일색이었다. 특히 그녀의 변화에 결혼을 앞둔 동료가 호기심과 흥미를 보이며 이것저것 물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자영 씨 얼굴이 달라졌는데? 비법이 뭐야?”

식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몸매와 피부 관리의 연속이라며 외관을 가꾸기 위해 힘쓰는 일이 얼마나 피로한 일인지 배부른 푸념을 늘어놓던 직원은 눈을 반짝였다. 그녀 덕분에 예정에 없던 속눈썹 연장을 받게 된 일은 일상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키게 됐다는 것을 실감하며 자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오래간만에 푹 쉬고 잠도 잘 잔 것뿐이에요.”

“와, 그런데 이렇게까지 사람이 달라 보인다고? 말도 안 돼, 진짜 인상이랑 분위기가 달라졌다니까.”

동료의 칭찬에 자영은 기쁨을 숨기며 겸손하게 웃었다. 속눈썹의 힘을 빌려 변화하게 되었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영험한 힘에 대해 터놓고 말하면 ‘고작 속눈썹으로 사람이 바뀌었다고?’라는 의문의 시선을 받거나 ‘나도 그 가게를 소개해줘.’라고 말하며 앞 다투어 눈썹을 붙이기 위해 가게로 향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챙겨 온 도시락을 먹은 뒤 자리로 돌아왔을 때 자영의 자리에는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쪽지와 놓여 있었다. 자영의 곁에 앉던 동료는 미끄러지듯 의자를 당겨와 옆구리를 꾹 찌르며 물었다.

“뭐야, 누구야?”

“모르겠어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맛있게 먹고 오후 시간도 힘내세요’는 격려의 메시지를 보며 자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제비 뽑기로 상대를 뽑아 마니토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분위기가 전과 달라졌다는 이유로 자영을 대하는 타인의 태도에는 사려 깊은 배려와 매너가 기본 값으로 장착되었다. 사무실을 오가며 복도에서 마주치는 남자들은 자영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반가운 인사를 건넸고, 여직원들은 그녀의 마법 같은 변화에 호기심을 가졌다. 단지 속눈썹을 붙였을 뿐인데,라고 생각했던 가벼운 일은 자영의 일상에 새로운 일들을 선사했다. 더 이상 남자의 관심을 받을 일도, 결혼을 전제로 한 진지한 연애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자영에겐 새로운 제2의 전성기가 이어지게 됐다. 점차 자영의 뇌리에도 ‘전남자친구의 결혼 소식’으로 인한 위기감은 젖은 옷이 마르듯 서서히 희미해졌다. 부장은 더 이상 자영을 무시하거나 나이를 거들먹거리며 평가하는 일도 없었다. 


*


이곳을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 자영은 호랑이 눈썹의 힘에 대해 뒤늦게 알게 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꼈다. 외관을 가꾸는 일에 부지런해져야 한다는 조언을 흘려들으며 ‘남자친구는 꾸밈없는 나를 좋아해.’라고 생각했던 건 어리석은 오만이었다는 것을 이젠 알게 됐다.  교제하는 사이더라도 상대의 관심과 흥미가 떨어지지 않게 하려면 관계의 긴장감을 심줄처럼 팽팽하게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어째서 그러한 노력은 여자 쪽에서만 열의를 갖고 힘써야 하는 것인지, 남자는 노력하지 않는 게 당연한 건가라는 허무한 회의가 들었지만 이내 불편한 감정은 지워냈다. 자영은 전과 달라진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다.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호감 어린 선망의 시선을 즐기게 됐고, 이 기분을 만끽하며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게 될 가능성은 높아졌다.  남자란 시각적인 것에 약하다는 말이 가볍게 흘려들을 말이 아니라는 건 생활의 변화에서 절실하게 느꼈다. 남자들이 선뜻 건네는 관심이 자신에게 향할 때의 기분을 만끽하게 되었다.  자영은 지금의 들뜬 기분을 은근히 즐겼다. 경험해 본 적 없는 호의를 누리며 사는 건 술을 한두 잔 마셨을 때의 들뜬 취기를 닮았다. 크게 힘을 들이거나 애쓰지 않아도 기분 좋은 친절을 누렸고, 관심의 중심에 서는 일이 많아졌다. 진작 이렇게 변화했더라면 전 남자친구는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불현듯 일어난 아쉬운 미련을 지우며 자영은 약속 시간까지 여유 있게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넉넉하게 시간이 남아 있어 화장품 코너를 둘러보았다. 선크림이나 립밤 정도만 바르던 자영에겐 화려한 펄과 색감의 화장품은 제 돈 주고 사본 적이 없었다. 접해보지 못한 신문물을 구경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색조 제품 사이에서 자신에게 맞는 색감을 고르는 건 난해하게만 느껴졌다. 곤란한 표정으로 마른 장미 컬러의 립스틱과 채도 높은 붉은색 립스틱을 집었다 놓았다 하고 있을 때 점원이 다가왔다.  

“혹시 찾으시는 제품이 따로 있으신가요?”

“아뇨, 그건 아니고, 구경 중이었어요.”

“고유의 분위기가 있으셔서 메이크업에 약간의 변화만 줘도 매력이 살아나실 것 같아요.”

점원은 자영에게 여러 제품을 추천해 주며 무료로 ‘메이크업 서비스’를 받아보라며 권했다. 거울 앞에 앉자 눈꼬리를 한껏 올려 그린 여자가 다가와 메이크업을 해주었다. 자영의 얼굴에 전에 없던 낯선 컬러가 덧입혀졌다. 

“화려한 색감도 잘 어울리시네요.”

붉은 립스틱을 바른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며 자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서른이 넘은 뒤에는 외모에 대한 칭찬을 받는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어릴 땐 결점 없는 흰 피부가 유일한 장점이었던 이십 대를 흘려보낸 뒤로 자영에겐 자신감을 갖고 드러낼 외적 요소가 없었지만 이젠 달라졌다. 밋밋한 벽에 포인트가 되어줄 인테리어 액자가 걸리듯 속눈썹을 갖게 된 자영은 매력도가 충만하게 상승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딱 집어서 사람들은 설명하지 못했지만 자영에 대해 ‘전과 달리 예뻐졌다’ 거나 ‘아름다워졌다’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전에는 얼마나 못나고 추레하게 보였다는 걸까 싶어 지금의 자신이 실제가 아닌 것 같다고 느낄 땐 묘한 스산함이 감돌기도 했다. 속눈썹의 힘이 아니었다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호의였으리라. 메이크업 때 사용한 립스틱을 집어 들던 자영은 같은 것으로 하나 더 달라고 말했다. “다른 하나는 선물 포장 부탁드려요.”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을 때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빨리 가겠다고 답문을 보내자 천천히 와도 괜찮으니 조심히 오라는 답이 왔다. 늦어도 채근하지 않는 말이  생경했다. 배고픈데 어째서 늦었냐며 날카롭게 구박하는 전 남자친구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일이 스치듯 떠올랐던 건 왜일까. 그러고 보면 장기 연애를 이어오면서 남자친구의 불평에 싫은 소리 한번 못하고 군말 없이 넘기며 상한 속을 떠안았던 일이 많았던 것 같다고 자영은 생각했다. ‘그간 서러운 일도 자주 겪었는데, 왜 꿋꿋하게 넘겼는지 모르겠어.’ 이자카야에 도착하여 주변을 둘러볼 때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이직하여 회사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된 범석은 자영을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젊고 파릇하다. 몸가짐도 웃는 얼굴도 산뜻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남자였다. 

 

몇 주 전부터 자영의 책상에는 그녀가 즐겨 마시는 가게의 커피가 올려졌다. 마니토의 은밀한 호의가 지속되던 때, 동료들의 추측은 난무했다. 자영을 흠모하는 남자의 정체에 대해 여러 첨언이 이어지는 와중에, 누군가가 합리적인 의심의 말을 던졌다. 

“같은 층의 사무실을 사용한다면 쉽게 알아차렸을 거야. 다른 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자영 씨가 새로 맡은 프로젝트에서 자주 만나서 회의하는 사람들이 유력하다고 보는데. 새로 오신 아트 디렉터나 카피 쓰는 석주 씨!”

하나의 일은 가스 밸브와 같이 이어져 있어서 어느 한 부분이 말썽을 일으키거나 막히면 다른 쪽도 동시에 제 기능을 못하게 돼버린다.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거나 연애가 엉망일 때의 자영은 회사 일이나 생활적인 면도 엉망으로 난항을 겪었다. 그러나 지금은 작은 변화를 통해 일적으로도 훨씬 더 자신감을 갖고 임할 수 있게 됐다. 회의에서도 ‘디자이너가 뭘 안다고 떠들어.’라고 말하던 고압적인 상사나 동료들도 먼저 자영의 의견을 물어봐주었다. 기한 없이 반복되는 수정 작업이나 클라이언트의 변덕으로 반복되는 보완 작업이 없도록 사전에 기획부터 철저하게 짰다. 회의를 자주 진행하면서 아트 디렉터인 범석과 대화를 나누게 됐다. 그는 자영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기획한 결과물을 시각적으로 만들 수 있는 건 디자이너의 중대한 역할이니 그녀의 의견이 중요하다며 신뢰하고 믿어주었다. 자신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범석을 보며 자영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외국 기업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때문에 남들보다 수용 범위가 넓은 걸까? 고압적이거나 보수적인 상사들과 다르게 사람들의 크고 작은 의견을 경청하는 너그러운 태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은 범석의 특별한 장점으로 느껴졌다. 그때부터 범석은, 자영의 눈에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전에 없던 대형 광고 기획을 하게 되면서 동료들에게 인재 추천을 받았는데, 그 시기에 입사하게 됐다고 전해 들었다. 부장의 추천으로 다른 대기업에서 디렉팅을 하다 오게 된 ‘범석’은 처음부터 호감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의식하게 됐다. 처음엔 그가 부장의 인맥이라는 것을 전해 들었을 땐 경계했으나 그런 마음은 허물어지게 된 것이다. 부장처럼 편을 가르거나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데 유리한 쪽에 줄을 서려는 기회주의자로 보이지도 않았다.  간혹 회의실이나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눈인사를 하는 게 전부였던 범석과 사적인 만남을 갖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다. 몇 주 전 이른 시간에 출근한 사무실에서 자신의 책상 위에 커피를 올려두고 나오는 그를 만나게 된 뒤로 둘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이 범석과 함께 하게 된 세 번째 식사였다. 그날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자영은 마니토로 ‘범석’을 떠올리진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 앞에 오코노미야끼와 해물짬뽕이 놓였다. 자영은 일본 소주로 만든 달콤한 레몬 사와를, 범석은 진저엘이 함유된 메가 하이볼을 주문했다. 옛 한옥을 개조하여 만든 가게는 그윽한 분위기의 조명과 감각적인 소품의 배치로 운치가 있었다.  

“같이 일하고 대화하면서 느낀 건데, 자영 씨는 자기만의 색깔이 있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도 시선이 갔어요. 눈빛이 매력적이에요.”

예고 없이 책상에 놓였던 커피 한잔처럼 범석은 뜻밖의 칭찬을 기탄없이 건넸다. 쑥스러움과 민망함이 담긴 웃음이 자영의 입가에 번졌다. 

“과찬이세요.”

“진짜예요. 처음엔 몰라본 게 신기할 정도예요.”

그 말에 자영은 멈칫하며 어색하게 웃음을 거두었다, 범석과 다른 사원들이 호의를 갖고 태도가 변화하게 된 건 호랑이 눈썹 때문이었다. 그전까진 범석은 자영에게 시선조차 건넨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이 마음 한 구석에 저울추를 매달았을 때와 같은 묵직함으로 전해졌다. 

‘이 눈썹이 없었더라면, 내게 먼저 커피를 건네거나 식사를 하자는 제안은 안 했을 거야.’

요즘 자영은 짧지만 호화로운 휴가 기간을 보내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휴가란 즐겁고 안락하지만 그 시간이 언제까지고 지속되진 않는다. 언제든 이 기간이 끝나면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는 시점이 도래할 것이다. 눈썹이 없었더라면 누구도 먼저 호감을 베풀리 없다는 것을 자영은 알고 있었다. 눈썹 한 올 한 올의 보이지 않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주위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뒤로 자영은 점차 자신감도 생겼다. 입은 적 없던 여성스러운 블라우스나, 앞코가 뾰족한 구두를 신는 날도 많아졌다. 귀나 목걸이에는 작지만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내는 반짝이는 액세서리를 착용했다. 사람들을 앞도 하고 주목하게 만드는 자영의 분위기에는 무얼 걸치더라도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주변인들의 태도가 바뀐 뒤로 일적인 면에서도 자영은 적극적으로 변모했다. 그전까진 마감의 차질 없이 진행하는 것에 몰입하며 수동적으로 일했던 것과 달리 이런저런 의견을 먼저 제안했다. 아이디어와 자신감이 화수분처럼 샘솟는 기분.  자영은  들뜬 축제를 즐기듯 고조되는 기분을 느꼈다. 오후에 있던 회의에서 오래간만에 의욕적으로 여러 가지 시안을 만들어서 공유한 것이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범석은 자영의 디자인에 대해 지지하며 힘을 실어줬다.

그는 오랜 외국 생활을 하였고, 자리를 잡고 적응하는 시기에 외로웠다고 말했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어서 힘들었어요.”

“그렇겠네요.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다는 건 중요한 일이에요.”

자영이 무기력한 슬픔을 터놓았을 때, ‘너 괜찮은 거 맞아? 일이나 결혼보다 중요한 건 너야.’라고 말해주던 서주 선배가 떠올랐다. 애인이 다시 생긴다면 결혼상대로 적절한 남자인지 선배의 신랄한 안목으로 평가해 달라고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신중하고 생각이 깊은 서주의 의견은 다른 누구의 말보다 신뢰할 수 있다고 자영은 생각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를 보면 선배는 뭐라고 말할까? 외국 기업에서 경력을 쌓고, 오랜 시간 이민자로 미국에서 살았다는 소개를 들었을 때 범석은 부유한 집안일 거라고 예상했다. 시부모가 될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 그분들이 봤을 때 아들의 반려자로 자신을 부족하다고 반대하진 않을지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다. 자영은 앞선 걱정은 기우일 뿐이라며 지워냈다. 당분간은 행복하고 유쾌한 연애 관계에 집중하는 게 좋을 수 있다. 네 번째 만남 때쯤 그가 먼저 고백하여 사내 커플이 된다면, 교제 사실은 결혼 전까지 사내엔 비밀로 붙여두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여기서는 오래 일했어요?” 

범석은 물었다. 

“5년 정도 됐어요.”

“제법 오래됐네요.”

“비슷한 연차였던 분들은 다들 결혼하고 일을 그만뒀어요.”

“그럼 자영 씨는요?”

달콤 새콤한 레몬 맛이 혀끝에 감도는데 그 질문을 들었을 땐 술이 쓰게 느껴졌다. 

“글쎄요. 모르겠네요. 결혼한 뒤에는 가정에 충실한 편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자기 일을 계속 갖고 있는 게 더 건강한 생활 방식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서요.”

“부장님한테 듣긴 했어요.”

부장의 이야기가 나오자 자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개 여자들은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쪽을 선택하여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고요. 그래서 여자 직원들을 뽑는 것엔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동료 중 남아있는 여자 직원은 자영을 포함하여 넷 뿐이었다. 그마저도 곧 줄어들 것이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한 명은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생활에 전념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자영 씨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전 가능하다면 오래 하고 싶긴 해요. 여건이 허락만 된다면요.”

자영은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고 주부로 사는 삶을 꿈꿨지만, 속내와 다른 답을 했다. 그건 커리어우먼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범석의 말을 의식한 답변이었다. 자영은 사람들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사회 초년생이었던 때 우러러봤던 서주 선배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기를 바랐다. 은연중에 선배와 비슷한 말투나 행동, 옷 등을 골라 입는 자신을 종종 발견하기도 했다. 선배는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고, 스치는 작은 행동에도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드는 매력의 소유자였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가면을 쓰고 동경하는 이의 언행을 상상하여 행동하는 건 부자유스러웠지만, 근사한 기분에 도취될 수 있었다. 

“역시 다르네요. 전 자기 일을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 자영 씨의 그런 태도가 멋지다고 생각해요. 남자나 가정에 기대서 자기 일 없이 집에만 있다 보면 무기력해지기 십상이에요.”

“그렇지만, 주부들도 엄연히 집에서만 쉬는 건 아니에요. 회사 일과 다리 집안일과 아이를 들보는 건 연중무휴로 진행되잖아요. 그 또한 주부들의 중요한 일이고 역할이 아닐까요?”

조심스럽게 자영이 말하자,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회에서 부딪혀가며 일하고 돈을 버는 경제활동과는 엄연히 차원이 다르죠. 자기 일이 없으면 관리도 허술해지고 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결혼한 선배들이 다들 그런 말을 하더군요.”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꺼낸다는 건 미래의 반려자가 될 여자도 경제 활동을 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리라. 아이나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따뜻한 저녁을 차려두고 기다리는 엄마의 모습을 꿈꾸곤 했다. 맞벌이 부모님 밑에서 자란 자영은 가정과 아이를 위해 할애하는 시간이 충분한 엄마로 살고 싶었다. 그 꿈에 대해 범석에겐 솔직하게 터놓을 수 없었으므로 말을 아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상한 음식을 먹은 듯 속이 불편해서 음식이 입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여자들, 이라는 평에 분류되지 않기 위해 의식하여 행동하고 말을 아끼는 일은 거북스러웠다. 여자는 이러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한 건 그가 이민 생활을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성급하게 결론 내린 걸 수도 있다고 자영은 생각했다. 유학했다고 해서 개방적이고 열려있는 사고를 갖는 건 아닐 것이다. 거기다 그는 부장과 친한 인맥이었다. 만약 관계가 발전되더라도 사적인 데이트에 관해 부장의 귀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말 한마디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범석에게 진지한 호감을 느낄 만큼 감정이 큰 것도 아닌데, 잘 보이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며 꾸미는 이유는 여러모로 결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싶은 마음이 앞선 탓이었다. 

이 노력이 무용하다는 예견을 하며 자영은 빈 잔을 매만졌다. 갖은 애를 쓰며 참고 꾸미고 맞춰가며 결혼한다고 해서 행복할리 없다. 자신의 모습이 무작정 좋은 대학을 가고 싶어 하던 재수생 때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대학만 가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믿었던 때처럼, 취업하여 돈을 벌면 인생이 윤택해질 거라고 믿었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를 만나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어떤 이의 아내이자 엄마로 사는 삶이 어느덧 목표가 돼버렸다. 

 술이 제법 들어갔을 때 범석은 얼굴부터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얼음 잔을 좌우로 움직이며 경쾌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부장님 추천으로 왔을 땐 걱정이 많았는데, 이런 곳에서 자영 씨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될 줄 몰랐어요. 이런 행운을 만나게 될 줄은.”

“이런 곳이라는 건 어떤 건데요? 전에 다니던 대기업과 비교했을 때 작고 체계도 안 잡혀 있을 까봐?”

한 발 앞서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자영은 솔직하게 읊었다. 범석은 웃으며 수긍했다. 

“솔직히 그랬지만 후회 없어요. 자영 씨를 만나게 됐으니 부장님의 제안이 오히려 고맙죠.”

자영은 전 남자친구와 마찬가지로 그가 과장과 가까운 사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의 전 남자친구처럼 연인 관계에서 있을 법한 불평을 과장에게 터놓아 자신이 소모적 대화거리로 전락하게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술을 먹으며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적당히 말을 가려해야겠다는 의식적 경계심은 내면에서 발동되었다.  

“저도 좋은 동료를 얻게 되어서 좋아요.”

“앞으로도 계속 만날 수 있을까요?”

“네. 그럼요.”

자영은 대답하면서도 진지하게 교제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이 아닌 점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처럼 애매한 관계로 만남을 이어가자는 뜻인지, 본격적으로 교제하고 싶다는 뜻인지 알 수 없는 제안이었다. 범석은 한숨을 깊게 토해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왜 자영 씨처럼 매력적인 사람이 아직까지 혼자인 건지 신기하네요.”

그 말에 대해 자영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가 보고 있는 자영의 모습은 눈썹의 힘을 빌어 만든 일종의 신기루와 같은 허상이었다. 이것이 사라진 뒤에도 그가 지금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자영은 묘한 불안을 느끼며 김 빠진 술을 한 모금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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