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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니야 Oct 27. 2024

3. 결혼에 재능 없는 인생

자영은 집 앞 편의점에서 유제품과 도시락 코너 쪽을 서성였지만 입맛이 돌지 않았다. 만지작 거리던 컵라면을 내려놓고 주류 코너로 몸을 틀었다. 생수와 맥주, 약간의 안줏거리를 집어 들었다. 자영은 남자 직원이 바코드를 찍은 물건을 가방에 넣은 뒤 계산을 하고 돌아섰다.

 편의점을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녁은 더위가 한 꺼풀 꺾인 선선한 바람이 일렁였다. 자영은 아까 만난 남자를 떠올렸다. 몇 달 전 우연히 만난 사람을 다시 마주한 게 마냥 신기했다. 그의 호의에 냉소적으로 반응한 건가 싶었지만 사과나 고마움을 표시하기엔 늦은 뒤였다. 돌아서기 전 남자는 아직 그 미술관에 있다고 말했다. 마음먹고 간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술관까지 찾아가는 건 개연성 없는 명분이나 핑계로 느껴질 게 빤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 때 누군가의 버럭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체구 좋은 남자가 허리춤에 손을 짚은 상태로 따졌다. 그는 방금 계산하고 온 편의점의 직원이었다.


“이봐요, 아줌마. 지금 구매한 것 중 하나가 계산이 안 됐잖아요.”

“계산이 다 된 줄 알았는데, 죄송해요. 지금이라도,”


자영은 무감각하게 했던 행동을 사과하려 했지만 남자는 말을 끊으며 투덜거렸다.


“아무튼 요즘 아줌마들은 자기밖에 몰라서 탈이라니까. 머리 나쁜 것도 죄인 거 몰라요? 그쪽 때문에 엄한 사람 피해볼 뻔했잖아요. 본인 편의만 생각하고 꼴사납게 행동하는 것만큼 극혐도 없는데 주제를 몰라, 진짜.”


자영은 문득 부장의 조소 어린 표정이 뒤이어 떠올랐다. 서른 중반의 여성은 누구든 두드리고 건드릴 수 있는 만만한 동네 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요즘 시대에도 여성의 나이에 대한 신랄한 평가와 무시가 만연하는 것을 느낄 때마다 자영은 분노가 치밀었다. 이들의 의식 저변에는 여성이란 나이가 들면 단물이 빠져 맛을 잃은 과일이나 해묵은 알곡으로 인식되는 것만 같았다. 불편한 현실을 인식할 때마다 아직도 그런 고리타분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애써 부정하려 노력했을 뿐 실제로는 그런 경우가 허다했다.


“말이 심한 거 아닌가요? 실수로 빠뜨리고 계산을 못한 거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요. 인격적인 모독까지 하는 건, 도가 지나치다고 보는데요.”

“댁처럼 개념 없는 손님들 한 둘인 줄 아세요? 꼬우면 그런 행동을 하지를 마시던가.”


기가 찬 얼굴로 서있는 자영의 두 손이 저절로 쥐어졌다. 주먹으로 남자의 면상을 때리거나 중심부를 조준하여 냅다 걷어차는 상상을 했지만 덩치로 봤을 때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네가 계산을 빠뜨리지 않고 꼼꼼하게 했으면 될 문제잖아.”


높다란 음성이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자  뒤를 돌아보았다. 말총머리를 높게 묶은 여자가 자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여자는 남자 직원과 잘 알고 있는 사이인 듯 거리낌 없이 말했다.


“그런 식으로 면박 주고 무시하는 말투 사용은 조심해. 너 때문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인성 수준 낮다고 욕먹는다고. 번번이 네가 빠뜨리고 계산 잘못해서 안 맞을 때가 많다는 거 잊었어?”


시원한 눈매를 가진 여자가 따져 물었다. 대화하는 내용을 듣자 하니 여자 또한 같은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는 듯했다. 남자는 코 밑을 빼곡하게 채운 수염을 씰긋거리다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홱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대신 사과드릴게요.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이건 계산 못한 비용이에요. 대신 전해주세요.”


자영은 여자의 사과에 살짝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진정 고개를 숙이고 반성해야 하는 건 남자 직원과 전 부장, 너 같은 여자가 나 말고 결혼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냐는 망언을 하던 전 애인이었다. 이들에게 지금이라도 사과를 한다면 상한 마음이 회복될까?  정신적인 맷집이 강한 편이 아니었기에 마음의 크고 작은 타격을 받으면 쉽게 흔들리는 자신이 자영은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저 사람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본인보다 힘이 약하다고 판단되면 함부로 대하는 타입이에요.”


자영은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했다. 이내 여자는 편의점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영 또한 가던 길을 천천히 이어 걸었다. 한 손에 들린비닐봉지 속 맥주가 묵직하게 느껴질 만큼 기력이 빠지는 하루였다.

힐긋 다시 돌아보자, 편의점의 투명한 문 너머로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교대 시간이 된 남자 대신 카운터에 앉아 담배를 정리하고 있었다.  자영은 걸어가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화는 남자의 무례함에 대한 분노 때문만은 아니었다. 젠가탑처럼 쌓인 감정의 빈틈을 남자의 언행이 예리하게 자극했을 뿐이었다.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불편한 말이 연속적으로 배치된 방지턱처럼 마음속에 산을 이루었다. 턱 걸리는 말에 주춤한 내면은 계속해서 위축되고 약해졌다.


'누가 보더라도 눈가에 기미를 숨길 수 없는 아줌마로 보일 만큼 나이가 든 거겠지.'


아직 미혼인 여자에게 아줌마라는 말은 불쾌하고 거슬리는 표현이었다. 나이와 결부시켜 주제 파악의 중요성을 아무렇지 않게 운운하던 전 부장의 말도 화가 났지만, 나이 먹고 눈치와 개념이 없는 존재로 내몰며 냉안시하는 시선도 싫었다. 눈을 부라리던 편의점 직원 걸어가다 돌부리에 걸려 코가 깨지거나 어두운 골목에서 나쁜 일이 벌어지길 바랐다. 마음속으로 온갖 저주를 퍼부었지만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다. 애꿎은 바닥의 돌을 툭툭 차며 자영은 걷고 또 걸었다. 편의점 유리문으로 멀어지는 자영의 뒷모습을 보는 시선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자영은 맥주 캔을 땄다. 거품이 입구 위로 보글거리며 흘러넘치자 재빨리 입술을 마중하여 맥주를 들이켰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이었으니 아이들은 잠들었으리라 생각하며 서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이어지다 한껏 낮춘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통화 괜찮으세요?”

“자. 덕분에 잠깐의 자유시간이야. 너는?”

“쉬는 중이에요.”


자영은 맥주 캔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스피커폰 모드로 바꾸어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다. 욕심으론 선배와 술잔을 기울이며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결혼한 친구나 동료와의 만남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잡는 게 고작이었다. 남편과 아이 문제로 바쁘다 보니 좀처럼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다.


“목소리가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었어?”


눈치 빠른 서주가 물었다. 서주는 자영의 사수였다. 사회에서 만난 인연은 오래 이어지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지만 책임감이 강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있는 서주는 꾸준히 연락을 이어가는 몇 안 되는 인연이었다.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고 떠난 선배의 빈자리는 자영에게 크게 작용했다. 한 동안 그녀는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던 서주를 떠올리며

 홀로 계단을 올랐다.


“선배, 담배 끊었다고 했죠?”


자영은 옥상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물고 있는 서주의 옆얼굴을, 살짝 찡그린 눈과 이따금 끄덕이는 고갯짓을 동경했다. 업무 능력이 뛰어난 선배가 결혼 후 경력이 단절된 건 자영이 아쉽게 여기는 부분이었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썩히기엔 아까울 만큼 서주는 사내에서도 다른 남자 사원들을 휘어잡거나 이끌 수 있는 여유로운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다.


“임신하면서 바로 끊었지. 담배는 왜?”

“술에 취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서요.”


반쯤 비운 맥주 캔을 들었다 놨다 하며 자영은 나지막이 말했다. ‘담배라도 태우면 답답함이 가실까 싶어서.’라는 말을 덧붙이자 서주는 웃었다.


“너처럼 몰입감이 높은 타입은 시작하는 거 아니야. 경험하면 끊기 쉽지 않거든.”

“담배 태울 때 선배 모습 참 멋있었는데.”

“싱겁긴. 무슨 일인데.”


서주는 바로 본론을 물었다.


“나이 드는 게 두려워요. 난 이제 아무도 없는데 이 상태로 나이만 들고 있어서요. 이젠 누가 보더라도 내가 아줌마처럼 보이나 봐.”

“넌 아직 아가씨인데 뭐. 난 네 나이보다 훨씬 더 늦게 갔어.”

“선배랑은 다르죠.”

“내가 뭐가 다른데.”


감정적으로 푸념을 늘어놓는 자영과 달리 서주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서주는 타인의 말에 마음이 상하거나 상처받아 움츠러드는 타입이 아니었다. “선배는 나이 들수록 더 멋있으니까. 사내에서도 선배 좋아하는 동료들 많았어요.”라고 자영이 말하자 서주는 호탕하게 웃었다. 전형적인 미인 타입은 아니었지만, 서주에겐 분명 사람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었다.


“왜 다들 서른 전에 남자친구랑 결판을 보거나 아닌 것 같으면 빨리 갈아타라고 했는지 이제 알겠어요. 마음은 조급한데 나이만 먹어가는 것 같아. 세월이 비껴가는 미모 같은 건 연예인에게나 가능한 거지,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나이 들어가는 게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도 싫어요. 거울 보는 것도 우울하고, 나이로 면박 주거나 노처녀 취급당하는 것도 진력나고.”

“ 네가 지나치게 나를 과대 평가해 줘서 고맙지만 난 평범한 주부일 뿐이야. 오히려 난 선택의 자유가 넓은 네가 부러운데? 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오히려 맞지 않는데 괴로운 결혼 생활 이어가는 것보다 끝이 이미 정해져 있던 연애를 그때라도 끝낸 건 다행일 수 있어.”


서주의 말에 자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주 선배가 남편의 권유로 직장을 관두고 육아에 전념하게 된 일이 그녀에게 스트레스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장 곁에 아무도 없는 자영의 눈엔 서주의 결혼 생활과 안정적인 가정은 마냥 부럽기만 했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둘도 없는 가족과 남편을 둔 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자연히 실현화될 거라고 믿었던 꿈이 멀어진 뒤로 자영은 만연한 무기력과 위축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결혼 이야기로 부담을 주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없었을 수도 있어요.”


술을 먹자 속내가 튀어나왔다.


“네 잘못 아니야.”


자영은 말끝을 흐리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시간 낭비만 한 거죠?”

“서로에게 충만한 만족을 줬던 시절도 있었잖아. 둘도 없는 의미를 건네줬던 시절까지 부정하지 않아도 돼.”


서주는 다른 이들과 달리 자영의 연애에 대해 실패나 소모적 낭비였다고 평가하지 않았다. 서로가 원하는 관계의 결론이 달랐던 건 자영에게 상처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여성적 매력에 대해 의심하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서주는 말해주곤 했다.


“떠난 사람, 미련 둬서 속 쓰리지 마. 이미 그 인연은 네 손을 떠난 거야.”

“맨날 내 하소연만 잔뜩 하게 되네요. 듣는 사람 힘 빠지게 해서 미안해요.”

“아냐. 먼저 연락 줘서 내가 고맙지. 회사 생활은 어때.”

“비슷해요. 근래엔 여러 일이 있긴 했지만.”


삭연히 있던 자영은 자신이 경험한 일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부장의 무례한 행동과 자신을 위축시키는 아르바이트생의 태도. 도움을 준 낯선 남자와의 인연과 시원한 인상의 여자에게 얻은 도움까지. 서주는 자영이 터놓은 일을 흥미롭게 들어주었다.


“부장이 선 넘었을 땐 분명하게 표현한 건 잘한 거야.”

“앞으로 얼굴 볼 때마다 불편해질 것 같아요.”

“차라리 불편해도 무시하지 못할 사람이 되는 편이 나아. 편해서 만만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용당하는 게 정신 건강에 얼마나 해로운데. 그런 타입은 본인이 정말 널 위해서 대단한 배려를 베푼 거라고 믿겠지마 말이야. 의도가 선하더라도 상대의 기준과 의사를 묻지 않고 혼자 하는 일은 엄연히 폭력인데 그걸 잘 몰라.”


자영은 맥주를 집어 들었다. 쏴아, 시원한 소음이 들리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는 빗줄기가 날카롭게 사선을 그으며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자영은 베란다 창으로 다가가 비 오는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인적이 없는 거리에 가로등 불빛만 어둠 속에서 작은 노을처럼 번져 있었다.


“가정에서 자유로웠으면 집 근방에서 술이라도 함께 먹었을 텐데.”


서주가 아쉬워했지만 자영은 다 마신 맥주 캔을 구기며 괜찮다고 했다. 휴대폰 너머로 서주의 목소리 외에 다른 음성이 들렸다. 서주는 ‘이제 그만 전화를 끊어야 한다.’고 황급히 말했다. 남편이나 아이가 잠에서 깬 것이라 예상했다. 자영이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전화를 끊으려 하자, 서주는 한 마디 덧붙였다.


“의외로 인연은 기대하지 않던 곳에서 시작될 때가 있어. 미술관에서 일한다는 남자,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관심 있으면 찾아가 봐. 아직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며.”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밤이었다. 자영은 두 번째 맥주 캔을 비웠다, 서주 선배와의 통화가 끊기자 다시금 정태적 공허에 빠졌다. 선배의 말대로 떠난 남자는 방면해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련하게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괴로워하는 건 본인 손해였다. 서주는 남편과 아이를 위해 자신이 많은 것을 양보하거나 포기하는 일이 당연하게 치부될 때 결혼 생활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고 말했다. 당연한 건 없다,라는 문장을 타이핑 치듯 뇌리에 새겼다. 그 모든 일은 당연한 게 아니다. 그 사람이 내 곁에 있던 시간을 무감하게 받아들인 일도, 연락이 두절되어 걱정하는 자영을 성가시게 생각했던 애인의 태도도, 나이 먹은 여자는 ‘이럴 거야.’라는 부정적인 생각과 말도 전부,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건 없었다.

 자영은 창밖에 시정을 고정했다. 시푸르죽죽한 배경 위로 투명한 느낌표가 쏟아졌다. 눈을 깜빡이자 눈앞에서 환상이 펼쳐졌다. 눈을 떼지 않고 쏘아보듯 응시할수록 빗줄기는 점차 짙어지더니 인간의 형상으로 바뀌어 보였다.  마그리트의 골콩드라는 작품이 현실화되어 나타난 것만 같다. 떨어지는 빗물을  들여다보니 중절모의 코트를 입은 남자가 흐릿하게 그려졌다. 신사적인 남자들이 하늘에서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쏟아지는 모습은 시끌벅적한 인파 사이를 헤집고 나올 때처럼 자영의 머리를 어질어질하게 만들었다.  저 그림을 보러 갔던 어느 계절이 머릿속을 스쳤다.


6개월 전.


화창한 주말.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에 자영은 기분이 들떠 있었다.  보고 싶었던 마그리트의 전시회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을 때, 애인은 남들 다 쉬는 주말에 인파로 북적이는 미술관에 가고 싶지 않다며 투덜거렸다. 결혼해서도 이럴 거야? 주변에 결혼한 언니들 말 들어보니까 남편은 일 힘들다고 육아나 집안일에는 관심 없대. 아직 우린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러면 결혼해서는 어쩌려고.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인데 기쁘게 가줄 수 없어? 자영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 말에 애인의 표정은 금세 일변하였다. 말끝마다 결혼, 결혼. 그만 좀 할 수 없어? 너 그러는 거 숨 막혀. 당황한 자영은 어리둥절했다. 애인의 얼굴엔 짜증이 역력했다. 그는 자영에게 결혼으로 계속 부담을 줄 거라면 헤어지자고 불쑥 말했다. 예매한 전시회의 티켓을 들고 있던 자영의 손 끝이 떨렸다. 볕 좋은 주말, 미술관 앞에서 나눌 만한 말이 아니라고 자영은 생각했다. 몇 차례 부담 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사과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는 자영에게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결혼으로 사람 옭아맬 작정이면 딴 데서 알아봐. 난 더 이상 감당 안 되겠다. 때마침 분수대에서는 물줄기가 허공으로 높다랗게 뻗치고 있었고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빼입은 여성이 연인과 팔짱을 끼고 전시장 출입구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랑 결혼할 생각이 있긴 했어? 자영이 물었을 때,  애인의 일그러진 입에서 비웃음이 흘렀다. 지금 네 형편에 결혼이 가당키나 해? 평범하게 남들만큼 살 정도로 조건이나 스펙이 충분한 것도 아니잖아 그 말을 뒤로하고 남자는 떠났다. 자영은 미동 없이 서서 막연한 눈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았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도 자영은 한 동안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애인이 다시 돌아와 심신이 지쳐 짜증이 치솟았던 것뿐이라며 사과할지 모른다. 그는 결코 냉정한 사람은 못되어서 자영의 토라진 마음이나 푸념을 달래주는 다정만 면모를 지녔었다. 적어도 몇 년 전까지는 약간의 짜증이 일어도 상냥한 언행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이따금 자영의 곁을 지나쳐 미술관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아졌다. 삭연히 서 있던 자영은 예매한 티켓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전시회는 보고 난 뒤에 말할걸. 기껏 얼리버드로 예매한 티켓이 무의미한 휴지 조각이 돼버렸다. 돌아가려던 자영은 걸음을 멈추었다. 의무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본전 생각이 앞서 작품이라고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그리트의 작품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창연한 하늘에는 커다란 바위가 중력의 무게를 이기고 가볍게 떠 있거나 비둘기가 쏟아졌다. 꼭 보고 싶었던 기억 시리즈 앞에서 자영은 입술을 깨물며 서성였다. 사람들은 관자놀이에서 피가 흐르는 석고상에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견고할 것만 같은 석고상에게 상흔을 남긴 건 무엇일까. 석고상의 얼굴엔 슬픔과 괴로움, 체념이 뒤섞여 복잡함이 감돌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착잡하게 얽힌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방면한 걸지도 모른다. 푸른 허공으로 날갯짓을 하며 사라진 비둘기의 모습이 아까 봤던 애인의 뒷모습과 겹쳐 보였다. 예고한 적 없는 급작스러운 이별에 마음은 산란하게 흩어졌다. 그는 데데한 형편에 결혼은 언감생심 꿈조차 꾸어서는 안 된다는 뉘앙스로 급전직하했고, 약간이더라도 결혼의 의지가 있다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내뱉었다.


‘상대는 마음도 없는데, 혼자 오버했던 거야.’


자영은 한 자리에 멈춰 서서 초점 없는 눈으로 작품을 보았다. 그의 생각이 자신과 통할 거라고 믿었던 건 오만이었다는 사실을 직시하자 그간 연락 횟수나 만남이 뜸해졌던 일, 부모님과의 식사 자리를 제안했을 때 출장 일정 때문에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던 일도 납득이 갔다. 남자는 점차 주말마다 바쁜 잔업이 많아졌고, 둘 사이의 대화도 부쩍 줄었다. 자영이 섭섭함을 토로하면 귀찮다는 뉘앙스로 돌아오는 짧은 한숨이 전부였다. 비슷한 패턴의 짧은 토막 대화만 이어지다 간격은 점차 벌어졌다. 그 균열은 장기 연애에서 자주 관찰되는 일시적 권태인 줄만 알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영을 떠난 적이 없었고, 서로의 자리를 다른 이성이 메꿀 수 없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자영은 그의 마음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피를 흘리는 석고상을 보던 자영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날아오는 돌멩이를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맞은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전시 해설가를 따라 설명을 듣던 인파가 흩어질 때에도 자영은 그림 앞에 서 있었다. 머리에 돌을 맞은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통보는 돌연했고, 이별의 사유는 불명확해서 납득하거나 수긍이 가지 않았다. 그는 어제까지 사랑한다고 고백했고, 그녀의 생일에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물어봐주었다. 까칠하거나 차갑게 굴더라도 연인으로서 기대할 만한 최소한의 행동을 성실하게 지켜주었다. 족쇄에 발이 묶인 듯 자영은 멈췄다. 남자친구의 말을 이해할 타당한 근거를 떠올렸다. 고심하며 떠올리며 얻은 결론은 하나였다. 문제는 남자에게 성급하게 결혼을 요구한 것이 부담을 떠 안겼다는 점이었다. 둘 사이의 균형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결혼에 대해 조바심을 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도출했다. 자영은 마음을 다스렸다. 혹 이런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관계가 완전히 끝났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일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설령 그의 마음이 완고하거나 닫혔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될 것이다. 고요히 침묵하며 고통을 감내하는 저 석고상처럼. 그 사이에 자영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이 그림, 마음에 드시나 봐요.”


인기척에 놀란 자영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흰 얼굴에 웃는 얼굴이 선한 인상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웃을 때 들어가는 볼우물은 소년미를 풍기는 인상이었다. 선량하게 웃으며 다가온 남자의 목에는 ‘전시 해설사’라는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동화적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그림자가 느껴져서 시선이 머물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어떤 의미가 담긴 건지 생각하게 만드는 그림인 것 같아요.”

“마그리트의 그림이 가진 특징이에요. 시각적으로 건네는 신선한 충격은 평범한 대상을 엉뚱한 곳에 위치시킴

으로써 환상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때문이에요. 가령 신체의 일부를 지나치게 확대해서 그리거나 대상을 복제하여 벽지의 패턴처럼 만들죠. 또는 낮과 밤의 중간에 위치한 오묘한 풍경을 화폭에 담기도 하고요. 특히 기억 시리즈는 여러 질문을 떠올리게 해요.”


남자는 자영이 묻지도 않은 설명을 이어갔고, 자영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한 때 미대 진학을 꿈꿨던 자영은 그림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되었지만 관심은 계속 갖고 있었다.


“왜 이 작품의 제목은 기억일까요?”

“개인적인 감상을 물어보는 건가요?”

“네. 해설자님의 의견이요.”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전 작품을 볼 때 상상력을 덧대서 보는 것을 좋아해요. 예술가는 작품 안에 감상하는 사람들이 상상을 투영할 수 있는 기발한 장치들을 곳곳에 숨겨두거든요. 이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실제 사람이 아닌 석고상이 피를 흘리는 모습을 연출했어요. 석고상의 뒤편에는 삼분의 일정도 처진 암막 커튼과 대조되는 화창한 하늘이 보이고요. 커튼이 있는 쪽의 석고상의 옆얼굴은 어둡게 음영이 져서 왼편에 있는 상처의 고통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가 있어요. 화창한 하늘과 어두운 커튼은 여인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떠한 심리적 고통으로 괴로운 여자는 현실의 괴로움을 회피하고 싶어서 눈을 감지만 그녀의 마음은 어두운 장막만 쳐져 있지 않아요. 그 이유는 고색창연한 하늘처럼 아름다운 기억이 마음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암막 커튼보다는 하늘이 화면을 훨씬 더 많이 채운 것만 봐도 그녀의 내면에 심리적 괴로움이 들이칠 때에도 상처를 보듬어주는 단단하고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죠.”

“제가 너무 부정적인 쪽으로만 생각했네요. 눈을 감고 피 흘리는 상처에 주목해서 봤을 땐 화창한 하늘이 보이지 않았어요.”


자영은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보는 사람마다 관점은 다른 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림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그림을 좋아하지만 잘 알지 못해요.”

“감상에는 답이 없어요. 정형화된 답을 정해둘 생각이었다면 예술가들은 붓으로 선을 긋는 게 아니라 연산기호로 가득하더라도 결국 한 가지 답으로 귀결될 수학 문제를 풀이했을 거예요.”


남자의 격려에 힘입은 자영은 나지막이 말했다.


“전요, 때론 저의 생각이 상대의 생각에 보폭을 맞추지 못하고 앞지르거나 의도와 다르게 해석될까 봐 걱정될 때가 있어요. 그린 사람의 의도와 다르게 멋대로 해석하는 게 무례한 신례로 여겨지기도 하고요. 지금 이 그림도 그린 사람의 의도와 다르게 제가 본 것 같아서요.”

“신중한 분이네요.”

“그렇지 않아요. 실수를 자주 하니까요. 내가 모르는 일면이라는 건 이 그림을 그림 사람에게도, 저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저마다 있어요. 그 중요한 사실을 그림이든 가까운 관계든 대입해서 봐야 한다는 것을 간과할 때가 많더군요. 그러다 덜컥 저 여인처럼 돌을 맞으면 뒤늦게 정신을 차리는 거죠.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른 상대의 태도에, 또는 벌어진 상황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혼란에 빠지기도 해요. 내가 맥락을 전혀 잘못 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땐 이미 때늦은 뒤였어요.”


자영은 속내를 두서없이 터놓는 게 한스러운 넋두리처럼 느껴져 부끄러웠다. 이제 그만 입을 닫고 자리를 뜨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에  끝맺는 말을 하고선 서둘러 돌아섰다.


“제가 괜한 말로 시간을 빼앗았네요. 설명 감사했습니다.”


남자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자영은 서둘러 전시관을 벗어났다. 아직 보지 못한 작품이 남아 있었지만, 감상할 기분이 더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응시했던 그림 속 석고상의 얼굴만 눈에 담은 채 자영은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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