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지하철 안은 짐승의 축사처럼 인파가 밀집되어 있었다. 무표정한 이들의 색 읽은 표정은 어딘가 비슷해서 구별이 가지 않았다. 건조한 갈댓잎이 물결치듯 사람들의 어깨가 이따금 좌우로 흔들렸다. 자영은 승강문 가까이에 섰다. 차창에 휑한 얼굴이 어스름하게 비추었다. 뻑적지근하게 무거운 어깨와 목을 좌우로 움직이다 시선이 어딘가에 머물렀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망설이지 말고 맺음’이라는 카피가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 문장에는 ‘어쩌면 당신은 아직 인연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라는 문장이 이어졌다. 작위적인 모델의 표정과 가입을 종용하는 카피에 조소를 던지며 자영은 시선을 거두었다. ‘인연은 무슨.’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사라졌다. 자영이 헤어진 전 남자친구의 결혼 소식은 전해 들은 건 그때였다. 회사 메신저에 뜬 알림톡을 톡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영 씨, 남자친구 결혼 한다고 주변에 청첩장 돌렸는데 알고 있어요?]
자영은 정신이 멍해졌다. 지탱하고 선 다리에 힘이 빠져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가까스로 한쪽 팔로 손잡이를 잡아 바닥에 주저앉지 않았다. 승강구 바로 옆 좌석에 있던 초로의 여성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는데, 얼른 여기 앉아요.”
“고맙습니다.”
자영은 갈라진 목소리를 겨우 짜내어 답한 뒤 자리에 앉았다. 여성은 병원에 꼭 가보라는 당부를 한 뒤 정차할 역에서 내렸다. 자영은 입술을 꾹 깨물며 전송된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메시지 내역에는 친절하게도 모바일 청첩장 링크가 첨부되어 있었다. 클릭하여 들어가자 모바일 청첩장으로 연결됐다. 결혼정보회사의 홍보 카피와 유사한 내용의 문장이 눈에 띄었다.
‘어려운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인연을 만났습니다.’
‘어려운 시행착오’에는 지난했던 자신과의 열애가 포함되어 있는 걸까. 자영은 당장 그에게 전화를 걸어 따지고 싶었다. 결혼에 대한 요구가 부담스럽다던 남자가 헤어진 지 6개월 만에 결혼이라니, 기가 차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영이 출근길이라는 사실을 자각했을 땐 이미 내려야 할 역을 한참 지난 뒤였다.
월요일 아침부터 삼십 분 지각을 한 자영은 형용할 수 없는 상심으로 이성의 모터가 작동하지 않았다. 사무실 책상에 앉은 뒤에도 무얼 해야 하는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는 듯 멈춰 있었다. 마케팅 과장은 시안 작업이 완료된 파일을 요구하였으나 그조차 자영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결혼? 나랑 헤어지고 6개월 만에 결혼을?'
대답이 없자 과장은 직접 자리로 다가왔다. 파티션에 팔꿈치를 기댄 그가 눈썹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이봐, 자영 씨.”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던 자영은 고개를 들었다. 부장은 월요일 아침부터 반쯤 정신을 놓고 있는 건 문제가 있지 않느냐며 작업 완료된 시안을 메일로 발송하라고 재차 요구했다.
“네. 죄송합니다. 지금 보낼게요.”
자영은 생선의 살과 뼈, 내장을 가르고 나누듯 마음속의 자리 잡은 착잡함과 씁쓸함을 빼내고, 업무에 충실한 집중력만을 남기기 위해 애를 썼다. 월요일은 쌓여 있던 업무를 처리하느라 비교적 다른 날보다 시간이 빨리 흘렀다.
점심시간, 여자들끼리 나누는 대화 주제는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결혼과 이직, 연애라는 꼭지 점에서 고만고만한 하소연과 넋두리가 웃돌 때면 자영은 말없이 밥만 먹었다. 서른의 중반에 가까워지고부턴 청첩장을 받는 횟수만큼 축의금으로 나가는 지출도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늦봄에는 그런 소식들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자주 들려와서 마음이 더욱 착잡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주기적으로 만남을 이어가던 동료는 삼 개 월 만에 결혼 소식을 전했다. 동료들은 호들갑을 떨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어머, 과장님 진짜 축하해요! 식은 언제예요?”
“남편 분은 어떤 일 하는 분이세요?”
동료의 결혼 성공담에 직원들의 관심은 높았다. 동료는 잠자코 있는 자영의 사정을 알은척하며 결혼정보회사 가입을 추천했다.
“네, 뭐.”
“자영 씨 관심 있으면 나 담당하는 매니저님 소개해 줄 수 있으니까. 내 소개로 가입하면 할인도 돼.”
자영은 분명 얼마 전까지 늦봄의 흰색 드레스를 입는 모습을 상상했다. 헤어진 애인은 다정한 타입은 아니었지만 서로의 존재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과 의미가 크다고 믿어왔다. 계속 만나다 보면 언젠가 이 남자와 결혼하게 되리라 생각했으나 그 시기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낸 건 그녀였다.
우린 결혼 언제 하면 좋겠어?
글쎄, 아직은 때 이르지 않아?
그는 막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간 결혼이라는 화두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한 막연한 태도에 자영은 심각하게 물었다.
혹시 나랑 결혼할 마음 없어?
언젠간 하겠지만 급할 거 없잖아.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 대해 애인은 성급하다고 평했다. 그 뒤로도 두 사람 사이는 표면상 문제없이 유지되는 듯했다. 애인과의 데이트 횟수는 줄었지만, 간혹 자영의 푸념이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함께 시간을 보내주었다. 자영은 애인의 짜증과 다분히 귀찮아하는 태도에 대해 ‘일이 피곤해서’라는 이유로 이해하려 애썼지만, 모든 건 ‘마음이 식은 증거’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사내의 여러 소문을 옮기고 다니는 전 부장은 자영의 애인과 선후배 사이였다. 그를 통해 자영의 이별 사실도 사내에 퍼지게 되었다. 불편한 직장생활의 굴레는 나사 한쪽이 빠진 듯 위태로웠지만, 불완전한 형태로도 어찌어찌 삐그덕거리면서 굴러갔다. 변덕스러운 클라이언트의 요구로 반복되는 시안 수정은 일상이었고, 마감을 앞두고 잔업을 위해 야근을 하는 날은 거의 초주검이었다. 그날도 자영은 마감을 하고 퇴근을 서둘렀다. 그때, 자영은 전 부장과 복도 앞에서 마주쳤다.
“자영 씨, 오늘 퇴근이 늦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전 부장은 지하철역 근방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말했다. 예의를 차리며 적당한 빈말로 거절하고 싶었으나, 성의를 무시당했다고 여기면 유치한 짜증으로 상대의 비위를 긁는 타입이었기에 내키지 않는 호의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 부장의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자영의 이별에 대해 유감을 표했고, 달리 그녀는 할 말이 없어 '네, 네'라는 짧은 답만 반복했다. 역에 도착할 무렵 황급히 인사를 하고 내리자, 부장은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아, 자영 씨, 내가 잊고 말 안 할 뻔했네. 내가 자영 씨를 꽤 괜찮게 봐서 다른 지인을 통해 들어온 작업에 추천했는데, 미팅 한 번 나가보는 거 어때? ”
그런 호의는 베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부장은 제 할 말만 해댔다.
“성철이와 헤어지게 된 것에 대해 나도 책임감이나 미안함 같은 걸 느껴서 그래. 뭐라도 도움 될 만한 건 해주고 싶고. 알다시피 내가 그 녀석이랑 대학 때부터 막역한 관계잖아. 자영 씨와 얼마나 오래 만난 사이인지 잘 아니까. 회사에서 나만큼 자영 씨 사정 잘 아는 사람 드무니까 힘든 거 있으면 편하게 말하라고. 부담 느낄 필요 없이 편안하게 만나 봐.”
떠밀리듯 만남에 나가게 된 자영은 나간 즉시 후회가 밀려왔다. 한사코 거절해도 계속되는 제안에 지쳐 나간 자리는 부장이 말했던 것과 달리 업무 미팅이 아닌 맞선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