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한눈에 보아도 남자는 지긋한 중년이었다. 조명에 반짝이는 숫돌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올무에 잘못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업무 미팅이라고 듣고 나온 자리인데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요.”
자영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말한 뒤 남자는 뒤따라 왔다. 택시를 잡아타고 돌아가려 하자 손목을 쥐어 잡으며 작색 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면상을 보고 바로 가는 건 너무 한 거 아니에요?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남자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소개팅이나 맞선에 전혀 관심 없는데, 부장님께서 오해를 하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돌아서서 서둘러 가는 자영의 귀로 거슬리는 음성이 송곳이 되어 또렷하게 들려왔다.
“남자가 버린 이유가 있네. 하자 있다는 건 감안하고 나왔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더 이상 어린 나이를 매력으로 내세울 수도 없는 주제에 무슨 자신감인지. 참나.”
자영은 애써 감정의 끓는점을 네리 누르며 택시를 잡아탔다. 예고 없는 맞선 자리와 남자의 따가운 일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버렸다,라는 표현에 집중되자 생각이 많아졌다. 그 말을 통해 추리할 수 있는 건 적어도 부장이나 회사의 다른 직원들의 생각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직접적으로 자영의 이별을 화제에 올리지 않았지만, 다른 이의 소식에 귀가 밝은 전 부장이 조용히 넘어갔을 리 없었다. 사내에는 이미 자영이 전 남자친구에게 버려졌다는 소문이 알게 모르게 퍼졌을 것이다. 자영은 바로 다음 날 출근했을 때, 부장에게 따져 물었다.
“부장님, 어제 그 만남에 대해 왜 저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신 거예요? 제 의사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그런 자리를 마련하는 건, 저한테나 소개받는 상대한테나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 못하셨어요?”
부장은 자영에게 꽉 막혀 있는 사고로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사람 참 못 쓰겠네. 상철이가 술자리에서 말끝마다 자영 씨에 대해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면이 있어서 괴롭다는 말을 했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딱 됐어. 거 상사가 배려해서 그런 자리 마련해 줬으면 눈치껏 사근사근 굴어야지. 거기에서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자네 때문에 내가 지인 앞에서 면이 안 선다고 면이."
전 부장은 자영의 전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된 일이 모두 그녀의 책임이라는 듯 말했다.
“소개해주실 거면 적어도 제 취향에 대해 물어보셔야 하지 않나요? 한눈에 봐도 저보다 족히 열 살은 많아 보이는 분과 막무가내로 약속 잡고 나가라고 하는 건 과장님 쪽에서 배려가 없으신 거죠. 애초에 받을 생각도 없는 소개팅이었지만 제 의사와 상관없이 그런 자리 주선하지 마세요.”
내리 누르기 어려운 이 감정은 나이 지긋한 노총각을 자영과 한 세트로 엮으려 했다는 것이 끔찍하게 싫다는 본능의 발동이었다. 숱 없는 머리와 담배 쩐 내가 나는 셔츠, 단추가 튕겨져 나올 만큼 부풀어 오른 배는 재앙처럼 느껴졌다. 전 부장은 팔짱을 낀 채로 혀를 끌끌 차 댔다.
“이런 식으로 제 의견과 무관한 만남 함부로 잡지 마세요.”
“아니 자영 씨, 아직 뭘 모르나 본데, 지금 본인 나이에 대해 아직 실감을 못한 거야? 아직도 이것저것 재고 땨지고 그럼 안되지. 지금도 결혼 못한 여직원이 회사에 수두룩한 거 보고도 정신 못 차렸어? 자네도 그 친구들처럼 퇴물 되지 않으려면 빨리 누구한테는 가야지. 안 그래?"
서른 살 때부터 자영은 나이에 대한 선 넘는 조언과 질문을 자주 들었다. 단련된 줄 알았는데, 들을 때마다 바닥에 물이 고이듯 마음의 괘가 깊어졌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위기의식을 느껴야 한다고 말하던 언니들의 경고대로, 여자가 나이가 든다는 건 매력이 떨어진다는 의미였다. 마지막까지 매대에 남아있는 처치 곤란의 채소 취급을 받는 것만 같아 자영은 기분이 나빴지만 반박하거나 따지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장기 연애를 했는데, 남자 쪽에서 결혼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건 사실문제가 있는 거거든. 그 이유에 대해 자영 씨는 아직도 모르지? 나이 먹고 어필할 게 없으면 성격이라도 좀 죽여. 사근사근하게 굴어야 그나마 남자들 눈에 들 수 있다고.”
전 부장은 식은 커피를 들이켠 뒤 종이컵을 와락 구겨 휴지통에 던져 넣고 자리를 떠버렸다. 부장의 말은 날파리처럼 자영의 주위를 끈덕지게 맴돌았다.
자영은 온몸에 힘이 빠졌다. 서러운 마음을 푸념처럼 늘어놓고 싶었지만 전화할 사람조차 없었다. 서주 선배는 한창 학교가 끝나고 돌아온 아이와 남편과 식사를 준비하고 있으리라.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도 연락을 받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 쪽에서 결혼 얘기를 꺼내지 않은 건 다 이유가 있지 않겠어?”, “결혼 못한 퇴물이 회사에 수두룩한 거 보고도 정신 못 차렸어?” 따위의 말이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떠올랐다. 이런 불안감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자영은 지난 시절을 곱씹었다. 서른을 기점으로 여자는 대개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되었다. 결혼한 여자와 결혼하지 못한 여자라는 두 선택지 중 자영은 후자였고, 이는 결혼시장에서 도태됐다는 의미였다. 분류되는 두 가지 형태의 삶은 각자 기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보수적인 오너가 경영하는 자영의 직장은 성비로 따졌을 때 남자의 비율이 높았다. 이곳에서는 여성들에 대한 불쾌한 농담이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취급됐고 일정 정도 나이가 찼을 때 대부분의 여 직원은 결혼을 이유로 퇴사를 택했다.
부장은 분명 그가 했던 말이 자영을 배려한 진심 어린 조언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직 결혼하지 못한 미혼 여성을 보는 시선에는 안타까운 동정과 히스테릭한 노처녀를 향한 조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술에 찌들어 회식과 게임이 낙이 된 노총각 사원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서른 중반의 미혼 여성에 대해 신랄한 시선으로 보는 건 꽤나 야속하고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더라도 이곳에서 대놓고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건 곤란했다. 서른여섯. 대학 때 동아리 선배를 만난 것을 빼면 전 애인과의 연애가 전부였다. 이대로 계속 만나다 때가 되면 남들처럼 결혼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나의 어떤 부분이 그를 지치게 했을까. 뒤늦은 후회와 반성은 차츰 원망으로 바뀌었다.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빠르게 변모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던 자영의 귓가에 지하철 안내 음성이 들렸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전동차가 역 구내로 들어올 때, 자영은 걸음을 옮겼다. 혼잡한 퇴근 시간이 지난 뒤라 구내는 한산한 편이었다. 스크린 도어가 설치되지 않은 곳이라 나쁜 마음을 먹으면 철로로 뛰어들 수 있을 만큼 개방된 곳이었다.
“그놈의 결혼 얘기 그만할 수 없어?”,
“너랑 계속 살다 간 내가 불행해질 것 같아.”
그가 진력이 난다는 투로 말할 때 자영은 어떤 답도 할 수 없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둘 사이에는 끈끈한 결속력과 애정이 존재했고, 미래를 함께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랬던 남자가 결혼 이야기를 피하고, 자영과의 만남에 피로를 느낀 건 누구의 잘못일까. 자영은 자신과의 연애 관계에 대해 애인이 전 부장에게 언급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 부장이 아예 없는 이야기를 꺼냈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정말 그렇게까지 최악인 남자를 몇 년 도안 만난 거였나.'
자영은 부장의 업신여기는 시선이 떠오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만나는 연인에 대해 타인에게 안 좋은 험담을 했다는 건 뒤늦은 배신감이 일게 할 만한 요소였다. 내가 알던 그는 훨씬 신중하고 입이 무거웠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걸까. 과열된 머리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었다. 그 순간, 피곤에 지쳐 있던 자영의 몸은 중심을 잃고 옆으로 휘청였다. 반대편 손을 허공으로 뻐으며 무언가에 지탱해 몸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지만 손에 집히는 건 투명한 공기였다. 빠른 굉음을 내며 철로를 달리던 지하철의 번뜩이는 불빛이 자여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강렬한 빛을 보자 자영의 눈이 저절로 찌푸려져 감겼다. 이대로 몸이 조금 더 기운다면 강한 불빛에 몸 전체가 삼켜질 것만 같다. 온몸이 강렬한 빛에 휘감겨 결박되는 상상을 할 때 공기를 가르며 누군가의 억센 팔이 끌어당겼다. 쌩- 눈앞에서 바람을 가르며 전동차가 멈춰 섰다. 급정차한 전동차의 문이 열리자 비로소 자영의 정신이 돌아왔다.
“미쳤어요?”
자영은 고개를 돌려 팔을 잡아 끈 남자를 보았다. 남자의 듬직한 손은 자영의 두 팔을 여전히 꽉 쥐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가 손에서 빠져나가 흩어지지 않도록 그러쥔 손아귀의 힘이 강하게 느껴졌다.
“미치지 않고서야 전동차가 들어오는데, 가까이 다가갑니까?”
죽는다면? 헤어진 남자친구는 내게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가질까? 지긋하게 나이 먹은 노총각을 소개해주며 주제를 모른다고 비웃던 과장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할까? 자영은 뇌리를 스치는 질문과 생각에 눈앞에 있는 남자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말 안 들려요? 당신이 벌이려 했던 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이해 안 돼요?”
남자는 재차 물었고 전동차는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고 출발했다. 자영은 어깨를 움츠렸다. 눈앞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전동차가 멈출 때의 기운 때문에 등 뒤가 서늘했다. 자영의 몸이 작은 경련을 일으키자 남자는 이상한 낌새를 감지하고선 부축하여 자영을 의자에 앉혔다. 그는 자판기에서 생수를 구매하여 건넸다.
“우선 이것부터 마셔요.”
자영은 생수를 단숨에 삼분의 이 정도 비워냈다. 짝짝 소리를 울리며 부딪치는 캐스터네츠처럼 두서없는 리듬으로 뛰던 심장 소음이 잦아들었다. 자영은 생수를 건네준 남자를 찬찬히 보았다. 남자는 호리호리한 몸에 키가 커서 목을 높이 들어 올려야 얼굴이 바로 보였다. 둥근 안경테를 쓰고 있는 그는 정색하거나 무표정일 때 차가운 인상이었는데, 그건 아마 굳게 다물고 있는 얇은 입술 때문인 것 같았다. 단정한 셔츠를 바지에 넣은 깔끔한 차림새에 커다란 백팩을 메고 있어서 대학원생 같은 인상이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됐어요?”
“고맙습니다.”
“나쁜 마음먹었던 이유가 뭐예요?”
남자는 생수병을 만지작거리며 숨을 고르는 자영에게 물었다.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떠오르는 답은 없었다. 단지 온몸에 힘이 빠질 만큼 지쳐 있었고, 연일 반복되는 야근에 피로 누적 상태였다. 현기증과 두통이 동반되어 몸의 균형을 잃었다. 우연히 마주친 남자의 눈빛이 날카로운 의심이 깃든 점이 어이가 없어 자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도와준 건 고맙지만 그쯤 해요. 그쪽이 생각하는 나쁜 생각을 이행할 기력도 없어요.”
지하철이 역으로 들어온다는 방송이 들렸다. 자영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승강장으로 다가갔다. 모르는 남자에게 친절하게 답할 기력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귀찮고 성가셨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혼자 갈 수 있어요? 방금 전에도 휘청였잖아요.”
“끄떡없어요 이래 봬도 사흘 밤낮을 야근해도 다음날 출근 시간 지킬 만큼 체력이 좋거든요."
“그렇게 건강한 사람이 두통으로 휘청이진 않죠.”
“건강한 사람도 지끈 거리는 두통에는 장사 없어요. 단지 머리가 띵한 것뿐이니까 우울증 환자 취급 마세요.”
자영은 일부러 꼿꼿하게 서서 열린 지하철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자영의 뒤를 따라 남자가 지하철을 탄 뒤에 문이 닫혔다.
“어디서 내려요?”
“그건 왜요?”
“역까지는 가줄게요.”
“전 알아서 갈 수 있어요.”
척 보기에도 어린 티가 나는 남자의 호의가 자영은 성가시고 부담스러웠다.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지만 남자는 집요했다. 자영이 홧김에 철로로 뛰어들 거라고 진지하게 염려하고 있는 듯했다.
“개찰구 나가는 모습까지만 볼게요.”
“왜 계속 상대는 원치 않는 책임감을 느끼는 거예요? 내 두통이 그쪽 탓은 아니잖아요.”
“두통이 또 일어서 계단에서 발이라도 접질리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남자는 자영의 계속되는 거절에도 움츠러들거나 의기소침해지지 않았다. 젊은 남자의 저돌적인 패기인가? 내게 관심을 갖고 만남의 기회를 잡으려는 수작인가? 자영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착각일 거라고 단정 짓고 잡념을 걷어냈다. 뭐가 아쉬워서 젊고 파릇한 남자가 나이 많은 여자에게 관심을 느끼겠는가. 한눈에 보기에도 미인일 정도로 눈에 띄는 외모나 매력을 겸비한 타입이 아니라는 것을 자영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나이 들어 도끼병 드는 건 여러모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앞에서 불운한 사고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양심적 타입의 청년일 뿐일 것이다.
남자는 기어이 자영의 집 근방의 개찰구까지 데려다주었다. 자영은 개찰구 앞에서 낯선 남자의 배웅을 받는 일이 이상했지만 고맙다는 말을 마지못해 건넸다.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돌아선 자영의 등 뒤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저 기억 안 나세요?”
돌아보자 남자는 아직도 모르겠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 저를 안다고요?”
남자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두꺼운 안경에 가려져 있던 둥근 눈매가 휘어졌지만 자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본 적 있어요. 미술관에서.”
근래에 미술관에 갔던 적이 있던가. 떠올려 봤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전 애인과 취미가 달라 전시회는 거의 가지 못했다. 자영의 연인은 평면적인 그림을 들여다보는 일이 왜 재미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던 남자였다. 미술관은 연인이 많다 보니 혼자 가는 게 꺼려져서 보러 가지 않은지도 꽤 오래됐다.
“착각하셨을 수도 있어요. 기억에 남을 법한 인상이 아니라 헷갈리신 거겠죠.”
“마그리트의 작품 앞에서 한동안 꽤 오래 서 있었잖아요.”
남자의 말에 자영의 눈이 커졌다. 뇌리에 미술관에서 봤던 어떤 그림이, 그 앞에서 나눴던 짧은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설마 석고상 앞에서 설명해주시던?"
"맞아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 그곳에서 전시 해설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다음을 기약하는 것만 같았다. 여운을 곱씹으며 자영은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