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은 재미없는 몇 번의 주말을 견디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낯선 번호로 연락이 오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전송하지 못할 문자를 공들여 작성했다가 삭제하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 모든 일은, 그의 결혼 소식을 듣는 동시에 무의미하고 억지스러운 자기 합리화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미 그는 돌아올 마음이 진즉부터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원망과 배신감 따위가 자영의 마음속을 멱차 올랐다. 재회의 시그널을 높여준다는 주파수를 배경음악 대신 틀어두거나 헤어진 상대의 미련을 자극하는 법 따위를 검색하며 시간을 보낸 건 생급스러운 착각이었다. 회사에선 전남자친구의 동문인 부장과 마주치는 일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친밀한 사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영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보며 식장 들어가기 전까지 제 짝은 모르는 법이라는 말을 했다. 한갓진 그 말은 위로인지 격려인지 알 수 없는 눅눅한 말들이었다. 자영은 전남자친구가 행복한 미래를 도모하는 때에 저 혼자 시름시름 앓는 일에 부아가 치밀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섭생법이라도 연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의욕은 없었다. 주변 동료와 친구들은 ‘세상에 반은 남자’ 라거나 ‘네 가치를 몰라주는 남자와 결혼했으면 고생길이 훤했을 거다’라는 위로를 건넸다. 네가 얼마나 잘했는데, 그렇게 떠날 거면 왜 네 젊은 청춘을 이용만 한 거냐며 자영을 대신해서 목청 높게 소리쳐주는 친구와의 술자리는 궁색했지만 잠시나마 위안이 됐다. 눈물 콧물 쏙 빠지게 울고 난 뒤에는 후련했지만 인사 불성된 친구를 끌고 집으로 가는 일은 체력적으로 힘들어 술로 마음을 다스리는 일도 그만두었다.
이따금 지하철에서 만난 남자는 자영의 마음에서 감치며 잊히지 않았다. 자영은 퇴근길에 그와 만났던 4-3 환승 지점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모르는 인파 사이에서 남자의 웃는 얼굴을, 그때 느낀 여운을 눈으로 좇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스크린 도어가 없는 위험천만한 승강장 통로에서 휘청인다면 단단한 손이 안정감 있게 붙들어주지 않을까 상상한 적도 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안전 서행’이라는 문구가 설치된 표지판 주위를 서성여도 관심을 갖는 이는 없었고, 자칫 나쁜 마음을 먹거나 지친 몸의 기력을 놓아버려 발을 헛디뎌도 발 빠르게 도움을 줄 만큼 이타적인 타인은 보이지 않았다. 하루의 피로에 지친 이들의 시선은 휴대폰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연히 남자를 다시 만난다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이름 정도는 물어볼 걸 그랬나, 옅은 후회를 했다. 남자와 관련한 일은 서주 선배 외에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작은 해프닝으로 끝날 만한 일에 부푼 기대를 불어넣고 싶지 않았다. ‘호의로 도움을 줬을 뿐인데, 착각하는 아줌마들 있잖아. 노처녀로 남는 건 타당한 이유가 있지. 주제넘는 착각 때문에 호의도 함부로 베풀면 안 돼.’ 따위의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마음을 다잡았다. 지나가던 시민의 우연한 도움에 큰 의미 부여를 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단념해도 옅은 기대감은 뿌리 째 뽑히진 않았다.
‘미술관에 아직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자영은 떠난 남자친구에 대한 미련과 슬픔의 중심부에서 작은 호기심이 싹트는 것을 의식한 뒤에 놀랐다. 서주 선배가 지나가듯 했던 ‘그 남자가 괜찮을 수도 있어.’라는 말에 기대를 거는 자신이 어이없게 느껴졌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심각해져 아쉬운 대로 요긴한 상대를 찾으려는 자신의 욕구가 기회주의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던 전남자친구가 정작 결혼하고 싶은 미래의 반려자는 본인이 아니었다는 점에 대한 배신감과 부아, 겨우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청첩장을 돌렸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은 대단히 커서 중심부를 제대로 가격 당한 상태였다. 한 마디로 재기 불능, 무기력에 침잠해 있었는데, 그런 때에 낯선 남자는 고여 있는 자영의 마음을 덤벙하고 깨우며 표면에 잔상이 오래 남는 동심원을 그렸다.
퇴근길, 방향이 비슷한 동료와 자영은 걸어갔다. 곧 남편 될 사람이 근방으로 데리러 오기로 했다고 말하는 동료의 얼굴빛이 화사했다. 사랑받는 여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투명한 생동감이 소리 없이 자영과 동료 사이에 경계선을 그렸다. 그 너머로 범접하기엔 자신의 안색은 어둡고 우중중하다고 느껴지자 자영은 저절로 마음이 위축됐다.
“결혼할 사람이다, 싶었어요?”
건널목에 서서 신호를 기다릴 때 자영은 물었다. 동료는 어째서 그런 질문을 불쑥하느냐며 얼굴을 붉혔다.
“뭐, 첫눈에 마음에 들긴 했어. 이 사람 만나려고 그간 시행착오를 겪은 게 아닌가 싶었지.”
“잘됐네요. 좋은 사람 꼭 만나고 싶어 하셨잖아요.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해요.”
자영의 말에 동료는 그간의 맞선과 소개팅을 떠올리듯 지난한 표정을 지었다. 가늘어진 동료의 눈은 고생 끝에 맛보는 결실에 대한 충만한 기대감이 느껴졌다.
“인연 만난다는 게 보통의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것 같아. 어찌 저찌해서 서로 마음 맞아 사귄다고 해도, 결혼은 연애와는 전혀 다른 문제거든.”
어쩌면 자영은 기혼자나 결혼을 앞둔 누군가에게 남들처럼 평범한 사람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비법을 전수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의연한 척했지만, 역시 힘들지?”
동료는 딱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냥 괜찮을 순 없는 것 같아요.”
“사람 잊는데 제일 좋은 건 새로운 인연밖에 없어. 결혼정보회사 가입 진지하게 고려해 봐. 아니면 내 주변에도 임자 없는 남자 있는지 찾아보고 일순위로 자영 씨 소개해줄게.”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듯해요.”
“때 기다리다 금방 마흔 된다.”
공포 영화의 예고 카피 같은 말을 동료는 스스럼없이 해댔다. 그 말에 자영은 움찔거렸다. 장기 연애를 통해 남은 건 이별의 쓰디쓴 괴로움과 돌이킬 수 없는 청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위기감은 가중되었다.
“이런 때일수록 피부나 몸 관리도 중요해. 나이 들수록 용모 관리 잘해야 기회가 찾아와. 나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피부 관리랑 필라테스 빠뜨리지 않잖아. 이건 거의 생존을 위한 거지만 필사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돼. 우린 이십 대가 아니니까.”
“알죠.”
자영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거칠어진 피부결과 눈에 띄게 많아진 눈가의 잡티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하다 못해 네일 관리 같은 걸 받아봐. 기분 전환에도 도움이 될 거야.”
그 사이 동료와 웨딩마치를 함께하게 될 남자의 차가 당도했다. 동료는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 자영에게 인사한 뒤 홀연히 떠났다.
“관리라.”
섭생법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것과 상통하는 조언에 자영은 신음을 토해냈다. 빨간 불이 파란
불로 바뀌어서 걸음을 옮겼다. 결혼정보회사 홍보 이미지를 기롱 하듯 보던 자영은 결혼의
목표를 실현한 동료의 조언에 마음이 동요하는 자신이 어이없게 느껴졌다. 공허감을 느끼는
자영의 입가에 쓴웃음이 감돌았다. 느릿한 걸음을 옮기던 자영이 역으로 향하는 길에 그곳
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자주 들르는 카레 집과 빵 가게 옆에 새로운 가게가 생긴 것을
오늘에서야 알게 됐다. 골목 어귀에서도 몇 걸음 들어가야 보이는 간판은, 작정하고 찾아오는
사람도 발견하기 어려울 만큼 후미진 곳에 있었다. 속눈썹, 네일 간판을 본 자영은 가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적이 드문 골목의 방문해 본 적 없는 낯선 가게는 혼자 들어가기가
꺼려졌지만 미지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저벅, 안으로 들어가자 비좁은 계단
안쪽은 바깥보다 음침하고 어두웠다. 자영은 벽을 지탱하고,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디디며
계단을 올라갔다. 가파르고 좁은 계단은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넘어질 만큼 가팔랐다.
신중하게 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에는 커다란 철문이 보였다. 이곳까지 속눈썹 연장이나
네일을 받으러 오는 손님이 있을지 의문스러웠지만 이왕 발을 들였는데, 돌아가는 건 어쩐지
아쉬웠다. 자영은 문손잡이를 아래쪽으로 밀어 당겼다. 안으로 들어서자 을씨년스러운 건물
외관과 다르게 따뜻한 무드등과 조명, 바닥에 깔려있는 두툼한 러그가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계세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자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고요한 공간에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바 테이블에 나란히 정돈되어 있는 의자는 비어있었고 안쪽에 문이 열려 있는 방에는
4개의 베드가 보였지만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직 영업 준비를 끝마치지 못한 곳에
마음대로 들어오는 실례를 범한 게 아닐까 싶었다. 멍하니 가게 안을 살피던 자영은 괜히
왔다 싶은 마음에 서둘러 빠져 나가려 문쪽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가게를 빠져나가려 문을 열었을 때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발목을
덮는 청록색 벨벳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보였다. 이곳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목에
검은색 초크를 매고 있었다. 대개 네일이나 속눈썹, 헤어 등을 관리하는 게 본업인
이들은 미에 대한 기준이 까다롭거나 자신을 가꾸는 일에 부지런한 것 같다고 자영은
생각했다. 가까이 다가온 주인은 척 보기에도 170이 넘는 장신에 가슴을 젖히거나 억지로
목을 늘린 것도 아닌데도 자연스럽게 긴 목이 눈에 띄었다. 어깨를 덮는 파마머리는 통 치면
용수철과 같이 가볍게 튀어 오를 것처럼 탄력 있었다. 여위고 마른 몸에 윤기가 흐르는
파마머리와 먼지가 붙지 않은 말끔한 옷차림은 공들인 티가 났다. 퇴근 후의 피곤을 뒤집어
쓴 자영은 꾀죄죄한 자신의 행색이 민망하게 느껴졌다.
“아, 자주 다니는 거리인데요. 우연히 간판을 보고 들어오게 됐어요.”
“잘 오셨어요.”
여자는 반색하며 자영을 반겼다. 여자는 원목의 바 테이블로 안내해 준 뒤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다.
“최근에 개업하신 거죠? 오가는 길에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자영은 물었다.
“지나치고 못 볼 때가 있죠. 익숙하다고 생각한 것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수 있어요.”
“그렇군요. 주의 깊게 안 봐서 몰랐나 봐요.”
자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여자가 건네준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한 입 마셨을 때 코 주변을
에워싸는 장미향이 그윽했다. 자영은 생각했던 것보다 진한 향에 깜짝 놀라 본래 목소리보다
한 톤 높은 음성이 튀어나왔다.
“주신 차, 너무 맛있는데요.”
저도 모르게 높은음이 흘러나온 것이 민망하였던 자영은 손으로 입을 감추었다.
“입에 맞아서 다행이네요. 오늘은 어떤 이유로 오신 거예요?”
“기분 전환도 할 겸 속눈썹 연장을 하고 싶어서요.” 자영은 말했다. 호오, 주인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는 건 마음 상태가 마냥 유쾌하지 않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맞나요?”
“뭐, 그렇죠.”
“그럴 땐 의식적으로 기분을 바꿔놓을 필요가 있긴 하죠. 제대로 잘 오셨네요.”
“그런데, 진짜 이런 걸 한다고 기분이 나아지는지 모르겠어요. 해본 적이 없어서.”
“시도해 본 적이 없다면 도움이 될 거예요. 감정은 의외로 단순한 지점에서 꼬이고, 생각지 못한 지점에서 풀릴 때가 있어요. 가령 방금 손님이 마신 따뜻한 차나 방문해 본 적 없던 새로운 가게, 속눈썹을 가꾸는 일 같은 것이 꼬이고 엉킨 것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일이지요.”
주인은 안쪽의 베드가 놓인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자, 이쪽에 누워주세요.”
자영이 자리에 눕자 주인은 힘이 들어간 단단한 어깻죽지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릴랙스, 긴장할 필요 없어요. 잠깐 누워 있다가 깨면 끝나 있을 거예요.”
자영은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는 캄캄한 시야에서 희미한 움직임이 눈앞을 왔다 갔다 움직였다. 몇 차례 흰점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가 이내 자취를 감추면서 몸의 긴장이 풀렸다. 응축되고 굳어있던 응어리가 말랑하게 풀리고, 예민하게 당겨 놓았던 신경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누웠다 깨어나면 모든 걱정이 해소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뜻하지 않은 행운 같은 건 어떤 얼굴로 어느 시점에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에요.”
주인은 웃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속눈썹을 연장했다고 삶이 갑자기 바뀌는 일은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마블 영화의 히어로처럼 특별한 능력을 지니게 되는 일을 잠깐 상상했지만. 말도 안 되죠. 속눈썹이 무슨 토르의 망치나 해리포터의 투명 망토도 아니고.”
“만약 당신이 원하는 게 실현 가능하다면 어떤 능력을 갖고 싶은데요?” 자영은 “누군가를 지치거나 질리게 만들지 않는 매력적인 여성성‘이라고 답했다.
“보통은 부자가 된다거나, 남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능력을 갖게 해 달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재미있는 대답이네요.”
“사람은 자신이 갖지 못한 걸 갖고 싶어 하잖아요. 어렸을 때도 예쁘다는 소릴 들어본 적은 거의 없지만 적어도 귀염성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못해요. 나이가 들수록 매력도가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요. 피부가 노화되고 체력이 떨어지는 것만이 노화의 증거가 아니에요. 이젠 아무렇지 않게 아줌마,라는 소릴 듣는 경우도 있어요. 결혼도 못한 여자한테 아줌마라니, 그런 말 들으면 그날 하루는 엉망이 된다니까요.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순조롭게 풀리지도 않지만요.”
자영은 절망적이고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은 어딜 가든 하소연할 일만 느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나이는 상대적 기준이에요. 나이 뒤에 0이 두 개 이상 붙게 되면 더 이상 의식하지 않게 돼요. 아니, 헷갈리고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이 더 정확하지만. 내가 작년 473세의 생일을 기념해서 무얼 먹었는지 떠올리면 먹었던 음식은 떠올라도 나이는 가물가물하다니까요.”
주인은 그렇게 말하며 호호 웃었다.
“사장님은 꼭 400년 이상 살아본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자영의 말에 주인은 붉게 바른 입 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경험해 본 바로는 맞더군요.”
“시간을 통과해야만 배울 수 있는 게 있어요. 경험과 시간을 통해 체득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속전속결로 빠르게, 또는 욱여넣는 식으로 대충, 같은 방식은 통하지 않아요. 400년의 시간을 괜히 견딜 수 있던 게 아니에요. 일종의 시간의 맷집을 갖게 된 거죠.”
“시간의 맷집이요.”
자영은 중얼거렸다. 이리저리 비척거리며 스러지거나 다른 이들에게 상처받고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갖춰야 할 마음의 맷집에 대해 생각했다. 주인은 ‘시간의 맷집’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마음의 맷집이 단단해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주인이 말한 강한 맷집을 갖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걸까, 자신은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영의 마음에 무거운 구름과 같은 근심이 뒤덮었다. 누군가를 잃고 관계의 균형점이 사라진 뒤에 홀로 남아 있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혼자가 된 뒤에는 그 사실을 공연히 의식하게 되어 비참한 기분에 젖곤 했다. 무언가를 먹거나 새로운 일을 하고 싶은 의지도 생기지 않는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고, 헤어진 애인을 자주 원망했다. 누군가를 만나 속전속결로 결혼이라는 문제에 대해 답을 얻고 싶은 홧홧한 마음이 들었지만 요원한 꿈이었다. 그가 했으니 나도 해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사람들을 의식해서 하는 결혼은 목적성 없이 조야한 물건을 사 모으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만 뒤처지는 것 같아 조급했다.
“충분히 시간 동안 흘려보낸 뒤에 남는 것들이 있어요.”
느슨해진 자영의 몸은 둥글고 속이 깊은 그릇으로 유연하게 모양을 바꾸었고, 오목한 홈으로 주인의 대답이 들어와 담겼을 때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400년이라는 시간을 사는 인간이 있다는 것에 합리적인 의심이나 의아함을 느낄 정도로 의식이 기민하게 곤두서 있지 않다는 점이 솔직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드는 부드러운 윤활유의 역할을 해주었다. 매끈한 대화의 흐름은 자영의 불안을 메꾸어주었다.
“전요, 시간이 지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게 있을 거라 믿었어요.”
“살아있는 건 변하기 마련이에요.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건 없어요.”
투명하지만 단단한 끈의 연결성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자신을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고 자영은 생각했다. 그 힘은 의식이 굳게 여닫히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 덕분에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미리 점치거나 의심하는 마음은 힘을 잃고 벌어진 틈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한편으로는 다행인 거예요.”
“어째서요?”
“살아있는 것만이 누릴 수 있는 아름답고 놀라운 힘은 변화에 있어요. 모든 생명체는 이전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뀌어 가려는 습성을 갖고 있어요. 나쁜 쪽으로 변화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고,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들은 더 나은 방향으로 자석에 이끌리듯 움직이고 있어요.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생각은 말아요. 꽤 오랜 시간을 두고 세상을 관찰한 경험에서 얻은 결과예요.”
“아뇨, 나쁜 쪽으로 변하는 어그러진 관계도 있어요.”
비감한 어조로 말했을 때 캄캄한 자영의 시야에서 투명한 선이 떨어지는 유성과 같이 사선을 긋고 사라졌다.
“기대했던 쪽으로 이어지지 않아서 상심한 건가요?”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는 자영의 감추어진 예민한 속살을 건드렸다. 왈칵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으며 자영은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깊은숨이 끊어진 부분을 매듭지어 하나로 연결되도록 만들었다. 호흡을 천천히 이어간 덕분에 차오른 감정을 내리누르고 침착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참 쉽게 말해요. 사람마다 인연이라는 건 따로 있을 수 있는 거라고. 장기 연애가 결혼으로 당연히 이어지는 건 아니니 마음 추스르고 좋은 인연을 만나면 된다고요. 내가 결혼 얘기를 꺼냈을 땐 부담스러워하며 피하던 사람이 몇 개월 만에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은 지금도 충격이에요. 그간 내게 보여줬던 그 사람의 언행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결정이었거든요. 제가 결혼 얘기를 꺼낼 때마다 숨이 막힌다고 했어요.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말만 믿고 10년을 혼자 기다렸네요. 바보같이. 장기 연애는 일종의 저주 같다고 느껴요.”
자영은 말했다. 두 손의 깍지를 끼고 힘을 주어 잡은 손이 회한으로 떨렸다.
“뭐 어쩌면 제 잘못일 수도 있죠. 그 사람에게 결혼에 대한 부담을 안겨주지 않았더라면, 연인 사이더라도 긴장감 있는 관계가 유지되도록 외모나 몸매에도 신경도 좀 써야 했고요.”
자책하는 말들만 이어졌지만 주인은 잠자코 자영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그 사람은 저를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면서 이젠 나이가 얼굴에 보일 때인데, 관리 너무 안 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하곤 했어요. ‘머지않아 끝날 수도 있으니 경계심을 가져.’라고 하더군요. 당시엔 기분 나쁜 농담이라 생각했는데, 그때부터 저랑 헤어질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건 저주가 아니라 폭언에 대한 상처예요.”
“그렇지만 나도 그 말에 수긍할 때가 있어요. 거울을 볼 때마다 늘어나는 기미나 잡티도 그 사람의 말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요. 나이는 들고 여성적인 매력으로 어필할 만한 건 별로 없어요. 대단히 뛰어난 용모나 능력을 갖춘 것도 아니니까.”
“지나치게 자신감이 떨어져 있네요.”
“이 저주에서 빠져나오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설령 그게 저주라 해도 푸는 방법은 있어요. 저주나 주문은 그것을 믿는 사람 안에서 효력을 발휘해요. 아니라는 걸 알면 되는 거예요.”
“당장 어떻게요?”
“이 가게를 나가는 때부터 달라질 수 있어요. 당신의 매력과 가치를 전혀 몰라주는 남자가 알아서 정리된 건 잘된 일이에요.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는 생각에 속지 말아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될 거예요.”
“그렇지만 서른여섯의 지극히 평범한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남자가 있을까요?”
“있어요.” 주인은 말했다.
“세상에 많은 남자들에게 전부 사랑을 받을 필요는 없잖아요.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해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만나면 되는 거죠. 서울 한복판에 그런 인연 하나쯤은 있어요.”
한 시간 뒤 자영은 만족하며 가게를 나왔다. 가게를 들어가기 전과 후의 차이는 미세하였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뒤 기분이 좋아졌다. “원래도 충분히 예뻤지만 훨씬 좋은데요.” 주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째서 자주 거울을 보지 않았느냐는 그녀의 물음에 자영은 머쓱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거울을 본 게 어색하지만 싫지 않았다.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눈가에 그늘을 드리울 만큼 길고 유연한 속눈썹은 밀생 한 숲처럼 빼곡했다. 어째서 동료가 기분 전환으로 속눈썹 연장을 추천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정하고 솔직히 말하려고 하면 자존심이 태동해서 방어적인 말들만 나오기 일쑤였는데.’ 자영은 초면의 어색함을 잊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멱차 오르던 억울함과 화기가 가라앉아 마음이 편안했다.
“의식적으로 기분 전환을 하는 게 필요하다는 말 맞네요. 기분이 한결 나아졌어요.”
자영의 말에 주인은 미소 지었다. 창밖으로 희붐한 가로등 빛이 보였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 채 흘러가버렸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공간에 관숙해지자 처음 이곳에 방문했을 땐 보이지 않던 소품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가게를 둘러보던 자영은 말했다.
“신기하네요.”
무엇이?라고 묻듯 주인은 자영을 바라보았다. 다시 본 주인은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에서 특별한 능력을 소유한 아이들을 지키는 ‘그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적잖이 깊은 눈매는 속을 길어낼 수 없을 만큼 밀도가 높아서 피안의 세계로 가는 지혜를 구하면 알려줄 것만 같았다. 헌칠하게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은 편안한 균형감이 느껴졌다. 온후한 입가의 미소는 어떤 목적을 꿰뚫는 확신의 빛이 서려 있어서 일단 그녀의 말을 믿으면 기대하지 못했던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생기게 만들었다. 자영은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느끼는 신뢰에서 4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아냈다는 말이 거짓이나 놀리는 말이 아닌 진지한 사실이라고 느껴졌다.
“늘 다니던 거리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도, 이런 시기에 이곳을 발견했던 것도 신기해서요.”
“필요에 따라 보이지 않던 게 눈에 들어올 때가 있죠. 의식하지 않으면 안 보일 때가 있고요.”
고맙다는 뜻으로 자영은 웃었다.
“가게 근사해요. 저 호랑이 그림도.”
자영의 시선이 머문 곳에 한쪽 눈썹이 없는 호랑이의 초상화가 눈에 띄었다. 주인은 매혹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전설에 따르면 호랑이의 눈썹은 영험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요. 그 눈은 진실을 꿰뚫어 보게 만드는 힘이 있고, 그 눈썹을 가진 자는 누구에게든 매력을 발산하고 마음을 살 수 있어요. 그 사람만이 갖고 있는 특수한 힘과 분위기에 사람들이 홀리듯 매료될 수밖에 없는 에너지를 주는 거예요. 사람의 마음의 흐름을 바꾸는 힘이라고 할까요. 분명 전과 다른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예요.”
자영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그게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물었다.
“매력적인 여성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거라는 뜻이에요.”
마법의 주문 같은 말에 자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제 눈썹에 붙인 게 호랑이 눈썹이라는 건가요?”
“겪어보면 알겠죠.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말고 잡아요.”
자영은 계산을 치르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문을 열고 나가려 할 때, 주인은 당부하듯 말했다.
“오랫동안 한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고 유지해갈 수 있었다는 건 다른 누구와도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에요. 자영 씨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분명 만나게 될 거예요.”
주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한 적이 있던가, 자영은 생각했지만 대화 중간에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