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비니야 Oct 27. 2024

6. 우리가 차마 말하지 않는 것들

장마철이 끝난 뒤에도 자영의 가방 한 칸에는 우산이 담겨 있었다. 우산을 돌려주기 위해 편의점에 갈 때마다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에 들른 편의점에는 창백한 인상의 낯선 남자가 있었다.  자영은 캔맥주를 들고 계산대 앞으로 향했다. 계산을 해주는 남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말총머리를 높게 묶고 여자분은 그만두신 건가요?”

“인수인계 해줄 때 계셨던 분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분은 저도 못 본 지 좀 됐어요.”

자영은 우산이 담긴 가방 안쪽에 손을 깊숙이 넣으며 고민했다. 그녀가 혹시 오게 될 날에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할까 생각하다 이내 그만두었다. 호의를 베푼 여자에게 직접 돌려주며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출근하는 길,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으로 돌진했다.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범석과 대화를 나누는 부장을 마주쳤다. 세 사람이 탄 엘리베이터에는 어색함이 풍선처럼 팽배했다.  대화하던 두 사람은 자영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뒤로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러운 침묵이 거북하여 자영은 닫힌 문틈만 응시하고 섰다.  일전에는 먼저 인사를 건네며 살갑게 말을 걸던 범석은 시선을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 자영 또한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어색한 가운데 부장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자영 씨 요즘 안색이 좋은데, 무슨 좋은 일 있어?”

“아뇨. 늘 비슷한데요.”

“연애라도 하는 거 아니야? 안면이 화사해졌어.”

부장은 어색한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말을 했다. 쏟아지는 우박처럼 떨어진 말들은 자영의 마음 지붕 위를 우둑대며 흩어졌다. 자영의 곁에 선 범석은 ‘연애’라는 단어에 반응한 듯 표정이 경직되었지만 아무 말도 덧대지 않았다. 자영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그곳을 빠져나왔다.  회의 때도 범석의 태도는 전과 달랐는데, 그는 자영의 의견에 더 이상 지지하는 첨언을 덧붙이지 않았다. 호감을 나타내는 징조로 여겼던 행동이 일절 중단된 점이 이상했다. 넌지시 심중을 떠보던 과장의 태도 또한 마음에 걸렸다. 진지한 고백을 은연중에 기다리고 있던 자영은 부장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됐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속눈썹의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보았지만 아직까지 문제는 없었다.

‘도대체 왜 태도가 바뀐 거지.’

손거울에 얼굴을 비춰볼 때, 옆자리의 동료가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자영 씨 요즘 좋은 일 있죠?”

자영은 얼굴을 붉히며 보고 있던 거울을 내려놓았다. 

“치장하거나 꾸미는 것에는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신경 쓰는 게 보여서요. 혹시 사귀는 사람 생긴 거 아니에요?”

속눈썹의 변화가 있기 전까진 자영은 외형을 가꾸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꾸며봤자 눈에 띄게 예뻐질 거라는 기대나 의욕이 없어 민낯에 가까운 얼굴을 고수했다. 안간힘을 써도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 바엔 ‘꾸미면 더 괜찮을 것 같은데.’라는 말을 듣는 편이 더 나았다. 동료는 왕일하는 자영의 변화에 대해 칭찬하며 부러워했다. 

“요즘 자영 씨 모습 보면 서주 팀장님 생각나요.”

의식하여 선배의 스타일을 따라 하던 자영은 움찔 놀랐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의도에 적격 한 칭찬을 들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적극적으로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선배는 저희한테 동경의 대상이었잖아요. 선배에 비하면 전 한참 부족하죠.”

“분위기가 닮았어요. 두 사람이 친해서 더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지만.”

“극찬이에요.”

자영은 은근히 기뻐하며 웃었다.

“아, 근데 오늘은 왜 커피가 없어요? 마니토, 요즘 활동 안 해요?”

마니토의 정체가 범석인 것을 모르는 동료는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자영은 어색하게 “글쎄요.”라고 대답하며 말끝을 흐렸다. 범석의 달라진 태도는 자영의 마음에 종일토록 걸렸다. 과장이 범석을 짬짜미 하여 둘의 관계를 엉망으로 흐트러뜨린 건 아닐까. 

 복잡한 생각을 이어가던 자영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한 번 더 들렸지만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보이지 않았다. 안면이 있을 뿐 서로의 인적 사항을 모르는 젊은 여성과의 짧은 대화는 다 안다는 태도로 넘겨짚는 무례함이 없어 편안해서 아쉬움이 짙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범석에게 퇴근 잘했느냐는 문자를 남겼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속눈썹의 변화로 삶의 순조로운 변화가 이어지던 완만한 행로에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생겼다는 위험한 직감이 들었다. 그럴 때일수록 자영은 속눈썹의 뿌리의 탄력을 단단히 유지하기 위해 영양제를 꼼꼼하게 발랐다. 그러다 한 가닥이 빠져 눈가에 떨어지자 자영의 입에서 짜증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빠지면 안 되는데.”

자영은 빠진 속눈썹을 휴지에 소중히 올려두었다. 언제까지고 속눈썹이 지속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거라는 위기의식이 들자 마음은 초조했다. 진척 없는 관계에 속도를 높일 수 있어야 했다. 자영은 서주 선배라면 고민 상담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를 할 순 없었다. 뒤늦게 ‘아이가 칭얼거려서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내용의 문자를 받았다. 고민하던 자영은 매사에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선배라면 범석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 후 범석에게 단도직입적으로 거리를 두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자. 자영은 결연한 계획을 세웠다. 


*


먼저 남자에게 고백해 본 경험은 없었다. 중학교 때 동아리 선배에게 초콜릿을 선물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트라우마가 된 뒤로 시도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호감 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주저하다 마음을 단념하기 일쑤였다. 10년을 사귄 남자친구와 관계가 발전하게 된 것도 상대의 고백이 계기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손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수동적으로 누군가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태도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자영은 마음을 고쳐먹으며 위축된 어깨를 일부러 당당하게 펴냈다. 전과 달리 아름답다거나 매력적이라는 말을 듣는 근사한 여성이 되었으므로 승률은 분명 있으리라 희망적인 미래를 예상했다.

 다음날, 회의가 끝난 뒤돌아서는 범석을 불러 세웠다. 자영은 커피를 건네며 잠깐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둘은 옥상 테라스 의자에 어색하게 앉았다. 며칠 전 술을 마셨을 때 계속해서 만날 수 있냐고 묻던 그의 태도가 일변한 것은 여러모로 석연치 않았다. 

“혹시 저한테 화난 거 있어요?  실수한 게 있다거나.”

“아니요, 그런 건 없어요.”

사무적인 어투로 범석은 답했다. 자영이 건넨 커피는 일절 손도 대지 않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상태였다. 

“계속 저를 피하시는 것 같아서요. 분명 얼마 전까지는 계속 만날 수 있느냐고 묻기까지 하셨는데 달라진 태도가 저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워요. 혹시 제가 실수한 게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자영 씨. 진지하게 생각해 봤는데, 저희는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같은 회사인 것도 걸리고, 어리지 않은 나이에 섣부른 시작은 서로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아요.”

당황한 자영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분명 그는 자영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왔었다. 한데 갑자기 변모한 태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감정의 격차가 급격히 벌어진 원인을 알고 싶었다. 

“제가 신중하지 못했어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신중함 없이 가볍게 저에게 접근했다는 건가요?”

자영은 범석과 대화할수록 점점 더 답답함을 느꼈다. 그가 언급하는 말들은 변화한 태도를 설명할 충분한 근거로는 부족했다. 

“사내에서 사적으로 긴밀하게 엮이는 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데, 동료 사이에 얼굴 붉히거나 불편한 일 만들고 싶지 않고요. 미안합니다”

범석은 다음 회의 때 보자는 말을 남기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혼자 남은 자영은 손도 대지 않은 커피가 놓인 빈자리를 바라봤다. 뜨거운 오후 햇살에 얼음이 녹아 컵 표면을 타고 눈물처럼 물기가 미끄러져 흘렀다. 


기대했던 일들이 허술하게 망가지자 자영은 맥이 빠졌다. 옥상에서 빠져나오려 할 때 뒤편 테라스 쪽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담배를 피우며 오후 시간을 죽이는 흔한 직장인들의 사담이라 생각하며 넘기려다 익숙한 목소리가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자영 씨는 걸리는 게 많지.”

자영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갔다. 테라스엔 서너 명의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부장은 입에 담배를 문 채로 거드름을 피우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자영 씨를 좀 아는데.”

“과장님은 어떻게 아세요?”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파릇한 남자 사원이 눈을 빛내며 묻자 과장은 그 반응에 힘입어 즐겁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 친한 후배가 자영 씨랑 오래 교제했어. 10년이나.”

10년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그 정도면 거의 결혼 생활한 거 아니냐는 뉘앙스로 감탄을 내뱉었다. 장기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의아하다는 질문이 나오자 과장은 옳다구나 싶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니까. 이유가 뭐겠어? 남자 쪽에서 그 정도 만나고도 결혼을 안 한다는 건 그쪽에 문제가 있다는 거지. 성격이든, 뭐든. 연애할 여자, 결혼할 여자는 따로 있는 법이야.”

자영은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범석이 거리를 두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을 때 과장과 대화를 나누던 범석의 모습이 연이어 떠올랐다.

자영은 옥상 문을 박차고 계단 아래로 빠르게 내려갔다.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마지막 칸으로 들어가 눈물을 쏟았지만 진정되지 않았다. 붉은 기가 번진 눈을 휴지로 닦고 나와도 수습 불가능할 정도로 감정은 격해졌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매만지는 바람에 속눈썹 몇 가닥이 빠졌다. 다른 남자 사원들이 자신을 앞으로 어떻게 볼까, 막막한 걱정이 밀려왔다. 오래 연애한 게 수치스럽거나 부끄러운 일이라도 되는 듯 뒷담 화하는 남자들을 떠올리면 억울하고 서러웠다. 이런 약해진 모습을 그들 앞에서 보이는 게 싫었지만 감정을 숨기고 오후 업무를 마칠 자신은 없었다. 자영은 컨디션 저하를 이유로 오후 반차를 낸 뒤 회사를 빠져나왔다. 가방은 사무실 자리에 있었지만 과장과 마주치는 게 싫어서 들어가지 않았다. 빈손으로 회사를 빠져나온 자영은, 막상 무얼 해야 할지 막막했다. 계획에 없는 이른 퇴근에 여가 시간이 생겼지만 정해진 계획은 없었다.  자영은 어슬렁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서주 선배를 떠올렸다. 아이들이 학교와 유치원에 갔을 시간이니 집 근방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만나 선배에게 하소연을 하면 기분이 나아질 것만 같았다. 서주가 사는 동네로 향하기 위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을 때 ‘무료 전시 티켓’을 선착순으로 나눠주는 이벤트 행사가 눈에 띄었다. 전시회 홍보물을 보며 자영은 문득 그 남자를 떠올랐다. 아직 미술관에서 일하고 있다는 그 말은 공허한 자영의 내면을 진동하듯 울렸다. 연애가 도대체 뭐라고, 기대했던 관계가 어그러지자마자 기억 속에 다른 남자를 떠올리는 건 여러모로 사랑이나 진지한 애정과 거리가 먼 목적지향적인 기회주의인 면모일 뿐이었다. 매사에 진심을 다하던 서주 선배에 비한다면 자신은 어설프고 나약한 타입이라 생각하자 자영은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거리 한복판에 서서 이쪽을 보는 자영의 시선이 눈에 띄었는지 홍보하던 남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앞으로 3개월 간 손보미 작가님의 전시회가 열릴 예정인데요. ‘사랑과 연애’라는 주제를 담은 다양한 그림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랑이요, 중얼거리는 자영의 말이 시끄러운 자동차 엔진소리에 사그라졌다.  의식하려 애쓰지 않아도 자영의 마음엔 ‘사랑’에 대한 불신만큼이나 집요한 열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사랑은 자영의 예민한 심부를 건드리는 단어였다.  불편하다. 자영은 그 단어가 자신의 삶에 적용된 적이 있는지 떠올렸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10년 간의 연애도, 호감 가는 남자와의 만남도 어그러졌다. 그 안에 사랑이라는 게 있었나 생각했지만 당사자인 자영조차 그들에 대한 마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규정 내리기 어려웠다. 사랑받고 싶었지만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는지는 모르겠다. 맑은 하늘에 난데없이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들이치는 격정적인 감정 또한 짙은 호감은 맞지만 사랑이라 볼 수는 없었다. 그것이 사랑이었다면, 서로를 알아갈수록 왜 점점 더 관계의 결속력이 단단해지기보다 권태롭게 변하는 걸까. 10년이면 할 만큼 했다,라는 사람들의 위로도 자영의 귀에는 넘겨짚는 안일한 위로로 들렸다. 사랑이나 연애 따위, 결혼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돼버린 것 같다. 자영은 결혼을 미션 수행처럼 여겨 성취하고 싶어 했던 마음을 자각하며 공허했다. 

‘그토록 결혼을 원했던 이유가 뭔지도 모르겠어.’

각고의 노력 끝에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면 행복할 것 같으냐고 물어본다면, 자영은 그 마저도 이젠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취직하고, 연애하고, 누군가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사랑하는 남자를 꼭 닮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 평탄하게 성장하여 자립한 어른의 삶이란 자신의 부모 세대가 그러했듯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자영은 믿어왔다. 갖은 애를 쓰지 않아도 물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흘러가듯 해가 지면 달이 떠오르듯 순조로운 전개로 이루어진 평범한 일상이 자영의 꿈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남들만큼 살고 싶다, 대단히 호화롭고 반짝이지 않아도 좋으니 지친 마음을 쉴 수 있는 가족을 만들고 싶다. 호랑이 눈썹을 붙인 뒤에 자영은 사람들의 달라진 시선에 자존감을 회복했지만 연애를 하려는 시도가 순조롭지 않다는 지점이 환부를 아프게 찔렀다. 전 남자친구는 평생의 짝을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런데 난 뭘까. 지금이라도 그가 다시 돌아와 주길 바라는 걸까. 설령 마음을 돌이켜 남자친구가 돌아온다고 해도 다시 결속될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함께 쌓아왔던 세월이 헤어지자는 말로 말끔하게 종결된 점에 대해서도 회의감이 일었다. 10년을 만나더라도 부부 관계가 아닌 연인 사이는 결속될 명분이나 이유가 부족했다. 차라리 임신이라도 했더라면 그와 결혼할 수 있었을까? 도 넘은 상상이 날개를 피고 고공행진하자 자영은 끝 모르는 생각들을 끊어냈다. 

“괜찮으세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자영은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남자가 걱정과 염려가 기듯 표정으로 묻자 다시금 지하철에서 만났던 존재가 뇌리에 떠올랐다. 남자는 자영의 조심성 없는 행동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일에 대해 진심으로 화를 냈다. 일면 없는 여자가 발을 헛디뎌 사고가 나든, 넘어지든 그게 그 사람에게 중요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자영의 머릿속엔 다시 그 남자의 존재감이 확장되어 커졌다. 

“네. 괜찮아요.”

자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혼탁한 우울을 뒤집어쓴 자영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랑’에 대한 전시 팸플릿을 마지막으로 건넸다. 목에 걸린 명찰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때 그 남자의 번호는 아니더라도 이름이라도 물어봤으면 좋았을 것을, 미련한 아쉬움이 밀물처럼 밀려와  목 끝까지 차올랐다. 마음의 표면이 흔들리며 감정의 물비늘이 찰랑, 흔들렸다. 자영은 고맙다는 말을 던지듯 한 뒤 거리를 벗어났다. 


*


버스 창으로 푸르른 녹음이 상쾌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하다 보니 평일 오후의 햇살을 받는 일은 오랜만이었다. 도시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피톤치드가 충분히 생성될지 모르지만, 미약한 숲의 기운마저 그리웠다. 딱딱한 사무실 책상 의자에 앉아 파티션으로 가려진 직사각형에 매몰되어 있을 땐 느껴보지 못한 해방감이었다. 자신을 보는 과장의 음흉하고 기분 나쁜 시선도, 범석의 달라진 태도에서 느낀 타격도 물이 마르듯 부숭해졌다. 자영은 손에 들려있던 팸플릿을 훑어보았다. 사랑과 연애에 대한 전시라, 사랑을 주제로 전시를 여는 작가라면 충만한 사랑을 남부럽지 않게 받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전시장을 가득 채울 그림의 주제로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선택하진 못했을 것이다. 자영은 얼굴도 모르는 예술가를 떠올리며 묘한 시샘을 느꼈다.

‘당신은 충만히 사랑받았으니 할 수 있는 말이야.’ 

그럼에도 결코 사랑은 포기할 수 없었다,라는 카피를 읽다 자영은 팸플릿을 접어 가방 안쪽에 밀어 넣었다.  자신이 원한 게 사랑인지, 남들만큼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안심하고 싶은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주변 사람들 중엔 결혼하지 않고도 오랜 연인 사이로 꾸준히 잘 지내는 이들도 있고, 첫사랑과 결혼한 뒤 2년 만에 파경 소식을 전한 동창도 있었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건 상대의 매력이나 대화 코드, 애정보다는 집안 수준이나 조건, 경제력이 언급되는 걸 보면 사랑의 형태가 반드시 결혼으로 귀결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결혼하고 싶었던 건 이유는 뭐였을까? 그냥 난 남들만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앞지른 욕심을 부렸던 건가.’

자영은 차창에 머리를 기대며 골똘히 생각했다. 이런 비슷한 기분을 과거에도 느낀 적이 있었다.  미대 진학을 꿈꿨지만, 비싼 등록금으로 포기해야 했을 때 유사한 조급증이 그녀를 괴롭혔다. 친구들보다 뒤처지게 될까 봐, 자신은 평범하게 대학생활을 하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아 두려웠다. 대학 생활을 시작한 친구들 무리에 속하지 못하는 게 두려워서, 동 떨어진 섬처럼 부유하는 게 싫어서 빠듯한 가정 형편을 알면서도 밀어붙여 대학을 갔다.  그러나 결혼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것도, 고집을 부려서 성취 가능한 문제도 아니었다. 자영은 서주 선배처럼 여러 사람들 속에서도 자신의 색깔과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은근히 들면서도, 주변 색들과 어울리지 않는 치기 어린 배색으로 겉돌고 싶진 않았다. 남들 사이에서 조금 더 빛나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판이하게 다른 색은 싫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서주 선배는 성공한 인생이었다. 회사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출중한 리더십과 업무실력을 겸비한 커리어우먼으로 활약하다 능력 있는 남자와 결혼하여 가정까지 이루었다. 남들보다 뛰어난 매력과 실력이 갖추었지만 겸손했고 주변 평판도 좋았다. 평범한 이들의 기준에 부합할 만한 포지션에 위치하여 안정적인 커리어로 사회에서 인정받은 뒤엔 현재, 가정에 충실하게 살고 있는 점이 그야말로 완벽했다. 

 자영이 상념에 젖은 사이 목적지를 알리는 안내가 들렸다. 버스에서 내린 자영은 주상복합단지 쪽으로 걸어갔다. 외근을 나왔을 때 가끔 선배를 보러 집 근처로 놀러 온 적이 있어서 주소는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영의 달라진 모습을 선배는 모르고 있다. 바뀐 면모를 보면 서주 선배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했다. 동료의 말처럼 본인과 비슷한 분위기를 띄게 됐다고 선배가 말해주려나, 그런 말을 듣는다면 의기소침해진 마음이 물먹은 스펀지가 본래 형태로 회복하듯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영은 생각했다. 근방에 왔을 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 연결음이 이어지다 중단됐다.

[선배, 혹시 바빠요?]

깜짝 방문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영은 서주의 행동반경을 묻는 질문을 문자로 전송했다. 

서울의 중심가에 위치한 이곳은 입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헬스클럽과 카페, 음식점 등이 지하에 밀집되어 있어 생활이 편리한 주상 복합 단지였다. 아이들을 등원시킨 뒤에 오후의 여유를 누리는 주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개중에는 서주 선배와 비슷한 연배 거나 자영보다 훨씬 젊은 나이의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혼자들 사이의 공감대를 이루는 대화가 이어지는 것을 멀찍이 떨어져 보며 자영은 그들과의 좁혀질 수 없는 격차를 의식했다. 만약 범석과 결혼을 했더라면 이런 큰 규모의 아파트를 자가로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단란한 가족사진을 걸어둔 거실, 아일랜드 식탁이 비치된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다 자영은 허무를 느꼈다. 이미 망가진 관계는 회복 불능이었고, 과장의 말에 성급하게 판단 내린 범석은 믿고 신뢰할 만한 진중한 남자는 아니었다. 자영은 이내 실현 불가능한 기대감을 지워냈다. 일정에 없던 방문이라 서주에게 선물하려 했던 립스틱을 두고 온 게 뒤늦게 떠올랐지만 다음에 전달해 주기로 하고 연락을 기다렸다. 그 사이 기혼자들로 이루어진 모임 자리에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그건 분명 서주 선배였다. 그녀는 안 본 사이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 귀 밑까지 오던 단발은 짧아져 쇼트 커트 스타일이었다. 모임이나 그룹의 중심에 있던 서주는 전과 달리 조용히 앉아 있더니 무리에서 살근 살짝 빠져나갔다. 전과 다른 분위기는 낯설었다. 자영은 서주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한 채 조용히 따라나섰다. 선뜻 선배의 이름을 부르기 어려운 분위기가 감돌아 기척을 죽였다. 서주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 꽤 오래 거리를 걸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거주지와 상당히 떨어진 인적 드문 공원이었다. 흡연 구역 표시가 설치된 벤치에 앉은 서주가 담배를 꺼냈다. 담배를 입에 문  옆얼굴은 회사 옥상에서 봤을 때와 비슷했지만 바람을 닮은 푸른 생기가 사라지고 무채색으로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서주는 한 동안 담배만 태우며 우거진 수풀과 이따금 흔들리는 가지의 나뭇잎을 응시했다. 견고한 커버가 덧씌워져 있는 듯이 단단한 거리감이 느껴져 자영은 서주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말도, 늘 비슷하게 지낸다던 서주의 답도 실은 본심이 아닐 수도 있다고 자영은 생각했다. 

선배는 어쩌면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야 할 만큼 말 못 할 사정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

가까운 후배에게 말하지 못할 어려운 고충을 겪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자각하자 푸념만 늘어놓기 바빴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자영은 서주에게 연락하는 대신 조용히 돌아섰다. 서주가 혼자 사색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존경하는 선배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일 것이다. 자영은 완벽하고 견고해 보였던 서주의 삶이 견디는 것에 가까울 만큼 버거운 지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네가 지나치게 나를 과대 평가해 줘서 고맙지만 난 평범한 주부일 뿐이야. 문득 선배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그때 서주가 했던 말에는 지친 마음의 소거된 기운이 물씬 배어 나왔다. 평범한 주부,라는 말이 체기가 있는 속처럼 불편하게 걸렸다. 선배의 말 못 할 괴로움에 대해 덮어놓고 그녀라면 괜찮을 거라고 넘겨짚어서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었다. 자영은 응석 부리듯 제 할 말만 했던 통화가 못내 마음에 남아 미안했다. 

 자영은 천천히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배에게서 본 적 없던 면을 발견한 건 마음 한 구석에 묵직한 납덩이를 떠안은 것과 같은 둔중한 진통이 일게 했다. 자영은 마음의 찌르는 통증을 안은 채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불러내 만날 사람도 없었다. 결혼을 한 친구들은 학부모회 모임이나 집안 일로 바빴고, 그나마 자영과 비슷한 처지로 미혼자의 영역에 남아있는 친구들은 사무실에 있을 시간이었다. 순식간에 공중으로 붕 떠버린 오후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막막한 기분에 사로잡혔을 때, 불쑥 가고 싶은 곳이 떠올랐다. 주말에는 단란한 연인들 사이에서 의식하지 않으려 애써도 위축되는 공간이었지만 평일 오후는 다를 것이다. 어물쩍거리며 주저하던 마음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궁금증을 해소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서주 선배의 짙은 담배 연기가 자신의 한숨과 비슷한 색이라는 점도 걸렸다. 이런 무거운 상념을 단숨에 지우고 싶었던 자영은 불현듯 일어난 용기에 기대어 미술관으로 향했다. 

이전 05화 5. 달콤한 허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