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은 준원과 헤어진 뒤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집 앞 편의점에는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며 자영을 무시하던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있었다. 통유리벽으로 그의 육중한 몸의 움직임이 또렷이 보이자 자영은 얼굴을 찌푸리며 혀를 샐쭉 내밀었다. 그는 물건 정리로 바쁜지 안쪽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자영은 한동안 서서 편의점 쪽을 멀거니 바라봤다.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자들을 (회사의 부장을 포함하여) 가까이 두는 건 불쾌한 상처가 잔상처럼 남는 일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는 점 때문에 곤란했다. 자영에게 우산을 빌려줬던 여자는 일을 그만둔 걸까.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된 뒤로는 굳이 이곳 편의점으로 발걸음이 향하지 않았다. 대놓고 무안을 주며 자영을 아줌마라는 범주에 싸잡아서 평가한 남자를 보고 싶지 않았던 것도 발길을 끊은 이유 중 하나였다. 아마 그는 귀찮은 손님들 중 한 명에 불과한 자영을 기억조차 못할 것이다. 정작 상처를 준 이들은, 그깟 일로 왜 정색을 하느냐고 반문하거나 심각할 것 없다는 투로 말하며 쉽게 잊곤 했다. 자영은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상대의 마음을 가늠하기 위해 애쓴다고 믿어왔다. 내가 무심코 던진 언행이 날카로운 돌멩이가 되어 누군가의 가슴에 매다 꽂힐 수 있으므로 조심하려 했다. 조금만 헤아리고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될 일 아닌가. 문득 자영은 남자친구의 사소한 농담에 상처받았던 일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다. 해가 갈수록 관리 안 된 배가 부풀고, 정수리가 휑뎅그렁하게 변하더라도 ‘관리 좀 하라’는 말 한 번 남자친구에게 한 적 없었는데, 그는 자영이 점점 나이 든 티가 난다며 촉이 있는 농담들을 다트 판을 명중시키듯 던지곤 했다. 회사에서도, 연인에게도 따뜻한 말을 들어본 일이 거의 없다는 점을 자각하자 서글펐다.
‘젠장. 추억보다 비참했던 일만 떠올라. 나 이런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했던 거야?’
비난과 평가, 가식 없이 변함없는 인간관계는 ‘가족’이 유일하다 믿었다. 그 믿음이 어렸을 때부터 빨리 가정을 이루고 싶은 이유였다. 그런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기시감이 밀려왔다. 좋아하는 선배를 통해 투영하여 본 환상은 실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묵직한 중압감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완벽해 보였던 선배도, 능력 있고 멋진 남편과 귀여운 아이를 둔 그녀도 어쩌면 나와 비슷한 외로움을 느끼는 건 아닐까? 그때, 준원이 했던 말이 채기로 얹힌 속을 달래주는 부드러운 손길처럼 떠올랐다. 그는 헤어질 즈음에 말했다. “겉으로 봤을 땐 다들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그런 척하는 걸 수도 있어요. 그 멋진 선배도 태연한 척하려고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는 어떤 상황일 수 있잖아요. 안녕하지 못한데도 어쩔 수 없이 체면 때문에, 또는 생계 때문에. 남들만큼 평범하게 살아보려고 남들 틈에서 튀지 않는 보호색이 되려고.”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남들처럼, 딱 남들만치. 남들과 비슷한데 개중에서 1.5배 정도 더 빛나 보이면 더 좋고요. 대놓고 거슬릴 만큼 불편하지 않는 톤 앤 매너를 유지하되 은은히 광택이 도는 큐빅처럼. 딱 그 정도의 찬란한 평범함.”
“누군가에게는 당신도 그런 사람일 수 있어요.”
“그럴 리 없어요.”
자영은 자조적으로 대답했다.
남들 다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나한텐 없다고 느껴지고, 내가 가진 건 번잡하고 하찮은 꼬리표처럼 느껴져요. 우린 누군가가 정한 건지도 모르는 평범함에 도달하려고 안간힘을 쓰잖아요. 어쩌면 이미 도달했을 수도 있어요. 그 기준을 계속해서 상향하는 바람에 본래 정해둔 기준을 잊었을 뿐이지.”
“애쓰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자영은 고개를 돌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평범하게 사랑하고 싶어요.”
체면에 걸린 듯 조용히 읊조린 말이었다.
“갖은 힘을 쓰며 애쓰지 않더라도 물 흐르듯 나를 맡길 수 있게.”
마지막에 자영은 말했다.
“내가 속눈썹이 없더라도 나이가 들고, 초라하게 늙더라도 기꺼이 안기고 싶다고요.”
마지막에 터놓은 응어리진 감정을 떠올리자 자영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사람이야말로 신묘한 힘으로 상대의 마음을 길어내는 능력이 있는 건 아닌지 자못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술기운에 기대어 터놓은 한탄이라 치더라도, 범석과 식사나 술자리에서는 오간 적 없던 대화였다. 그야말로 어떤 신통한 힘에 이끌린 기분이었다.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며 혼자 갈 수 있다고 씩씩하게 말했을 때, 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가 멀어진 뒤에 자영의 걸음걸이는 느슨하게 풀린 매듭처럼 긴장감과 힘이 빠져 휘청였다. 몰려든 취기를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숙취 해소제가 간절했다. 아르바이트생의 눈치 따윈 볼 게 뭐람 싶어서 껄끄러운 마음을 지우며 자영은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반가운 얼굴을 잠시 기대했지만 말총머리를 높이 묶은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지 창구 안쪽의 제품을 넣어두는 창고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만 들렸을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자영은 매대에 놓여 있는 숙취 해소제를 집었다. 힐긋 창고 쪽을 보자 삼각 김밥, 도시락, 유제품 등이 담긴 상자가 쌓여 있는 곳에서 남자는 큰 몸을 공처럼 한껏 말아 숙이고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손님이 왔는데도 뭐 하는 거람.’
자영은 지면에 닿는 구두 소리가 크게 울리도록 때깍거리며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는 부랴부랴 계산대 쪽으로 다가왔다. 서둘러 자영을 향해 오던 남자의 주머니에서 빵 봉지가 떨어졌다. 그의 비대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작은 봉지에는 귀여운 몬스터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자영은 떨어진 빵 봉지를 집어 건네며 말했다.
“방금 떨어뜨리신 것 같은데요.”
“엇, 다른 손님이 구매하시려다 실수로 두고 가신 건가 본데요.”
남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빵 봉지를 채가듯 가져갔다. 역시나 그는 자영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캐릭터를 좋아하는 건가.’ 자영은 빵 봉지를 보며 생각했다. 그 빵은 유행의 시류에 까막눈인 자영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서주 선배의 딸아이가 노래를 부르며 먹고 싶어 했다던 빵인데, 높은 경쟁을 뚫고 사줬는데도 봉지 안에 있던 스티커가 원하던 캐릭터가 아니라며 응석을 부려서 골치 아프다는 소리를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열띤 인기를 얻은 빵이라 편의점에서 보기 힘든 제품인 건 분명했다. 신선 제품이 입고되는 이른 새벽이나 아침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편의점 앞에 대기해야 겨우 구매할 수 있다고 전해 들은 적이 있어 관심이 기울었다. 어쩌면, 서주 선배를 만날 때 그녀의 딸아이에게 선물할 간식으로 열띤 호감과 인기를 구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 다시 선배에게 연락을 하거나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은 없지만 어떻게든 만나게 될 일은 생길 수 있었다. 준원의 말대로 서주 선배는 태연한 척해야 하지만 버거운 고충을 겪고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에 대한 자신의 앞지른 판단은 그야말로 월권이었으며 선배에 대해 스스로 만든 환상이 깨지는 것에 대한 지나친 과민함이었을 뿐이었다. 자영은 서주 선배를 떠올리며 계산대 한쪽에 놓인 빵을 가리켰다.
“저 빵, 제가 살게요.”
남자는 곤란한 표정으로 둘러대듯 말했다.
“아, 이건 다른 손님이 구매하신 거라서요.”
“방금, 다른 손님이 구매하려다 두고 간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자영이 따지듯 물었을 때 남자는 얼렁뚱땅 둘러대듯 근거 없는 허언을 늘어놨다.
“아 저 그게, 유통기한 임박 제품이라 곤란하겠는데요.”
“유통기한 아직 충분하던데요.”
자영은 지지 않고 말했다.
“아, 물론 그렇긴 한데, 다들 구매하려고 하는 인기 품목이라 예약자가 많아요. 요즘 이거 없어서 못 팔아요.”
손사래까지 치며 팔 수 없다는 말은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말의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말들을 하던 아르바이트생은 허둥대며 빵을 팔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편의점에서 상품을 예약 판매한다는 말을 어이가 없었지만, 그의 불룩한 겉옷 주머니가 눈엣가시처럼 거슬렀다. 자영은 더는 그 남자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으므로 더 묻지 않고 구매한 숙취 해소제만 집었다.
“방금 이 편의점에서 계산까지 깔끔하게 한 거 확인했으니 먹어도 되겠죠?”
자영은 남자가 보는 앞에서 여봐란듯이 뚜껑을 까 단숨에 병을 들이켰다. 빈병을 계산대에 툭 올려둔 뒤 유유히 편의점을 나왔다. 무시하는 언행을 일삼던 남자 아르바이트생의 당황한 얼굴을 떠올리자 공연히 우쭐해져 통쾌감마저 들었다. 힐긋 다시 돌아본 유리벽으로 황급히 빵봉지를 주머니에 챙겨 넣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예약자가 본인 자신인 건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석연치 않은 의문이 들었지만 자영은 이내 몸을 돌렸다. 알게 뭐람, 대놓고 무안을 주며 불쾌한 언행을 일삼는 남자에게 나름대로의 작은 복수를 했다는 것에 만족했다.
빵을 사지도 못했고, 회사에서 맨몸으로 나온 탓에 가방조차 없었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온기로 차올랐다.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터놓는 건 그 자체로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휴식이라고 느껴졌다. 자영은 예정에 없던 연차와 전시회, 정종처럼 마음을 감미롭게 대우는 준원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스륵 잠들었다.
*
자영은 아침에 일어난 뒤에는 밀려오는 숙취처럼 지난밤의 일들이 떠올랐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거리를 걸을 때 준원은 물었다.
“다음에 새로운 전시 보는 거 어때요?”
술김에 본능에 이끌린 유혹의 말이 아닌 다른 만남의 고리를 제안한 점이 좋았다. 다음을 기약한다는 건 진중한 신뢰를 쌓아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그가 보자고 한 전시는 거리에서 홍보하던 바로 그 주제, 사랑이었다. 처음 시작하는 연인 사이의 만남 매개 중 하나로 전시회의 공간이 주는 분위기는 낭만적이었고, ‘사랑의 온도’라는 주제는 둘 사이의 순조로운 출발을 예견하는 즐거운 키워드로 느껴졌다. 함께 대화를 나누며 즐거움을 느낀 존재는 오랜만이었다. 사랑에 대한 기대를 접어두고 불신했던 마음에 희미한 불꽃이 피어났다.‘연애 불능 상태’로 빠지지 않게 된 건 다행이라며 자영은 안도했다. 장기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무능한 실패로 느껴져 괴로웠던 마음은 관계에 들인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보상감이 지나치게 앞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간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만나왔으니 ‘넌 당연히 나와 결혼하는 게 마땅해.’라는 무언의 압박이 전 남자친구에게 고스란히 전달 됐을 것이다. 책임이라는 단어가 사랑이라 믿어왔으며 그 행동의 증명이 결혼이라는 루트라는 믿음은 조금씩 균열이 일었다. 사랑의 발전이 책임감과 신의로 연장되는 건 맞지만, 책임감이 사랑을 앞지를 순 없다. 부드러운 파이 반죽의 중심부에 담겨 있는 앙금처럼, 책임감은 관계의 중심부를 단단히 잡아주더라도 책임감만으로 유지되는 관계는 향기 잃은 꽃이나 맥락 없는 편지와 같이 공허하다. 그와 헤어진 뒤 더는 남자를 만나거나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수 없을 거라며 자조하던 자영은 사랑이 그리웠다. 어쩌면 그녀가 덮어두고 사랑에 대한 기대를 버리려 한 건 또 다른 실패를 경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애초에 난 늦어버린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쪽을 택한 건 기대나 노력이 결실하지 못할 것이 걱정되어 내린 결말이었다. 선택지가 없으면 선택에 대한 고민이나 괴로움, 그에 따른 책임 따윈 지지 않아도 되니까.
자영은 준원을 꾸준히 떠올렸다.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려는 태도는, 자기 세계가 확고한 연상의 남자들을 만났을 때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네가 뭘 안다고.’ ‘오빠가 말이야.’ ‘내가 해봐서 아는데.’ 따위의 불퉁한 문장을 내뱉지 않은 걸로 봤을 때 준원은 괜찮은 남자일 수도 있다고 자영은 생각했다.
집에 돌아왔을 무렵 [잘 들어갔어요?]라는 준원의 메시지에 답을 하며 자영은 나른한 기쁨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초조했다. 마냥 이 기분에 젖어 만끽할 순 없었다. 자영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배가시키는 속눈썹이 힘을 다했을 때 그는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근심 어린 걱정에 시름하던 자영은 서주 선배를 떠올렸다. 선배라면 자신의 이런 고민을 들었을 때 어떤 이야기를 해주었을까? “넌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인색하게 평가하는 면이 있어. 너무 큰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불행이야. 네가 원하는 걸 마음껏 기대해. 그럼 네 기대에 맞는 일과 인연도 오겠지. 안 그래?” 의기소침하거나 힘들어할 때 건넸던 선배의 말들이 떠오르자 식은 마음에 온기가 더해졌다. ‘선배는 내가 힘들 때면 도움을 주었는데.’ 자영은 도망치듯 선배의 뒷모습을 외면하고 자리를 벗어난 일에 죄책감과 괴로움이 일었다. 서주 선배에게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할까? 그녀에게 솔직하게 터놓는 게 맞을까, 고민하던 자영은 침대에서 뒤척이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씻지 않은 상태로 잠들었다 깨었을 땐 깊은 새벽이었고, 서주에게 전송하지 못한 메시지 창을 보다 이내 지우고 다시 잠이 들었다.
*
직장은 그럭저럭 다닐 수 있게 됐다. 우연히 복도에서 범석을 마주치거나 회의 때 부장과 대화를 섞는 일은 불편했지만 그들의 뻔뻔한 태도와 달리 위축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자영은 무감한 태도로 이들을 대했다. 업무 외에 다른 대화가 끼어 들 여지가 없도록 철저히 거리를 두고 행동하던 어느 날, 자영은 광고 기획안의 변경으로 늘어난 업무와 작업에 어려움을 배로 늘려주는 인력 시스템에 참아왔던 화가 터져 나왔다. 부장이 적극적으로 밀어왔던 기획안이 어그러지자 자영의 업무는 과중되었다. 일전부터 신입 디자이너를 뽑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할 때마다 적격자가 없다거나, 회사 재정을 문제 삼아 차일피일 인원 충원을 미뤄온 것도 꽤 오래된 일이었다. 순조로운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도, 도와줄 인력도 없이 디자이너에게 마케팅, 편집 등 전반적인 여러 업무를 이것저것 요구하는 건 인내심을 갖고 참아줄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선 일이었다. 자영은 이런 환경에서 계속해서 일해 나가는 것이 자신의 미래에 유익이 되는가에 대해 고민한 끝에 ‘더는 못하겠다’며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간 참아왔던 말을 단숨에 하게 된 건 계획한 일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참고 희생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든 건 스스로의 업무 존엄성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5년 정도 경력이면 어디든 들어갈 수 있으리라. 부장은 자영에게 먼저 티타임을 제안했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잘 넘어가줬으면 좋겠어. 자네도 알잖아. 일을 하다 보면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향하거나 어그러지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는 걸. 우린 회사의 운명을 같이 한 동지기도 하잖나. 다른 여직원들이 결혼 적령기가 되어 관뒀을 때도 자영 씨만큼은 꿋꿋하게 회사에 남아줬고 우린 그 외에도 각별한 사이인 만큼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어. 그렇지?”
“그간 부족한 인원 충원 안 하고, 우후죽순으로 몰려드는 마감을 혼자 감당하는 일이 당연한 게 아니에요. 중소기업 디자이너의 근무 환경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연차에 맞는 대우는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다른 회사였으면 전 이미 대리나 부장 달았다고요.”
신랄한 자영의 말을 예상하지 못한 듯 부장은 당황하여 식은땀까지 훔쳤다.
“한솥밥 먹으면서 오래도록 일해 온 사이에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거기다 우리가 그냥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상철이가 자영 씨에 대해 불평할 때도 난,”
전남자친구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언급되자 자영은 불쾌감에 표정을 굳히며 잘라 말했다.
“업무 외에 사적인 일까지 끌어들여서 물 타기 하지 마세요.”
부장은 ‘성실하고 참하게 봤는데 실망스럽다며 자영의 태도가 과민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요즘 연애 전선의 문제가 생겨 예민한 짜증이 히스테릭한 신경질로 표현된 거냐는 말을 덧붙였을 땐 테라스에서 그가 자영에 대해 험담하던 모습이 연이어 떠올랐다.
“남자 쪽에서 그 정도 만나고도 결혼을 안 한다는 건 그쪽에 문제가 있다는 거지. 성격이든, 뭐든. 연애할 여자, 결혼할 여자 따로 있는 건 알지?”
댁이 가진 새치 혀 때문에 범석과의 관계가 어그러진 거라며 따져 묻고 싶을 정도로 자영은 화가 잔뜩 치솟았다. 다른 이가 하는 말에 쉽게 마음을 단념하는 의지박약의 남자라면 시작 전에 마무리된 게 다행이다 생각하며 마음을 다독였지만 실제 자영의 속내는 자존심이 단단히 상한 상태였다. 나이에 대한 위축된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부장에게 지독한 복수를 하는 상상이 이어졌다. 이 자의 빈약한 정수리에 뜨거운 커피를 들이부으며 저주를 퍼붓고 싶은 기분. 부장이 봤을 때 자영은 그저 결혼 적령기를 놓치고 중소기업에서 근근이 일하는 여직원에 지나지 않았다.
“먼저 본론을 벗어난 말을 하셨으니 저도 한 마디 해야겠네요.”
“뭐?”
부장은 전에 없던 자영의 단호한 태도에 인상을 찡그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저에 관한 억측이나 유언비어 퍼뜨리는 건 그만두세요. 업무적 능력으로 뭐라 하는 건 참고 들어줄 수 있더라도 인격적인 모독은 못 참습니다.”
안하무인의 거만한 부장은 자영의 완고한 태도에 움찔 놀랐지만 민망한 듯 얼굴만 붉힐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영은 할 말을 끝낸 뒤 부장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카페를 나왔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커피를 들고 모여 있는 직원들이 보였다. 그중 범석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가 이쪽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자영은 등을 돌려 사무실로 들어갔다.
*
집으로 가는 길, 습관처럼 무심코 고개를 돌려 본 편의점에는 생각지 못한 얼굴이 보였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계산대에 있었다. 그녀가 일을 그만두어 빌린 우산을 돌려주지 못할까 봐 염려했던 마음은 반가움으로 바뀌었다. 여자는 일전에 봤던 것과 달리 올려 묶은 긴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자영은 옛 친구와 재회한 것처럼 반색하며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때 급하게 문을 열고 나오던 남자 아르바이트생과 어깨가 부딪쳤다. 기골이 장대하고 불친절했던 남자였다. 두꺼운 어깨에 밀쳐진 자영은 한쪽 손으로 반대편 어깨를 붙들며 남자를 흘겨보았다. 그는 곁에 자영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듯 거리낌 없이 지나쳐 가버렸다. ‘뭐 저런 작자가 다 있는 건가.’ 기막힌 표정으로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던 자영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캐릭터 스티커 두세 개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건, 그때 그, 빵에 들어있던 스티커인데.’
자영은 떨어진 스티커를 주워 들었다. 몸이 부딪쳤을 때 남자의 헐거운 주머니에서 스티커가 빠져나왔으나 알아차리지 못한 채 가버린 모양이었다.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깜찍한 캐릭터 스티커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 남자인 건가, 싶었지만 귀엽다는 순수한 이유로 이런 물건을 수집할 작자로 여겨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자영은 합리적인 추론을 이어갔다. 이런저런 핑계로 빵 판매를 피하던 남자가 구매 경쟁이 치열한 제품에 들어있는 스티커를 지니고 있는 건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설마, 아르바이트생의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구하기 어려운 상품을 독점하는 건 아닐까라는 추측을 이어가던 자영은 이내 의심을 그만두었다. ‘됐다, 남 일에 신경 써봤자 머리 아픈 건 나야. 저 사람이 있을 땐 절대 이곳에 오지 않겠어.’
먼저 부딪쳐 놓고 사과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무례한 작자에게 굳이 스티커를 돌려줄 마음 은 없었으므로 주운 것들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무감각하게 걸어가던 그 남자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기를 못내 바랐다. 장대한 몸이 바닥으로 하강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상상하며 제 식대로 저주를 퍼붓는 정도로 불쾌감을 상쇄하고 넘어갔다. 편의점에 들어서자 여자 아르바이트생의 낭랑한 목소리가 반겨주었다.
‘어서 오세요.’
그녀에게 비 오는 날 건네받은 호의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뛰어넘어 담박한 기쁨에 마음에 일렁였지만 다른 손님이 있었으므로 자제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자영은 자주 사 먹는 캔맥주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지나쳐 갈 때 빵 코너를 보았지만, 험상궂은 남자가 유통 기한 임박 제품이라는 핑계로 팔지 않은 제품은 품절 상태였다. 방금 주운 스티커를 서주 선배의 아이에게 건네준다면 좋아할까, 어깨를 부딪친 불쾌한 일의 대가로 인기 높은 아이템을 사수한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이네요.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그만둔 줄 알았어요.”
자영의 말에 여자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돌아오게 됐어요.”
돌아오게 됐다는 대답 뒤에 약간의 씁쓸한 한숨이 묻어났다. 그 말속에 담긴 속뜻이 어렴풋이 마음에 읽혔다. 일전에 아르바이트하던 중 자격증 공부를 하던 일이 떠올랐다. 여자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이곳을 떠났지만, 어떠한 이유로 인해 다시 편의점 알바 자리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여러 인원이 돌려 입으며 묻은 때가 끼어 있는 유니폼 조끼의 오른쪽 가슴에는 명찰이 비뚜름하게 부착되어 있었다. 명찰에 새겨진 이름은 ‘손혜란’이었다.
“돌아왔다는 건,”
“희망했던 직종의 괜찮은 기업에 들어갔는데 버티지 못하고 나오게 됐어요. 좀 한심하죠.”
혜란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다고 생각됐는지 얼굴을 붉히며 계산한 물건을 봉지에 넣어주었다.
“아뇨.”
자영의 말에 혜란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
“그렇지 않다고요.”
자영은 분명한 어조로 덧붙였다.
“주제넘게 넘겨짚는 걸 수도 있지만요. 자기표현에 확실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타입이라고 느꼈어요. 그런 사람이 고대하던 곳에 들어갔는데 그만두고 나왔다는 건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위로에 혜란은 얼굴을 붉혔다. 가까운 가족이나 남자친구조차 신입일 때는 일정 정도 부당한 대우를 겪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버텨야 한다는 쓴 조언을 하곤 했다. 어디서도 위로받지 못하던 때에 그녀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는 자영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시엔 남들 다 참고하는데 너만 왜 투정을 부리느냐는 말에 제 자신이 의지박약이라고 생각했어요. 할 줄 아는 게 많지 않았고, 이런 나를 받아줄 다른 회사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설움을 겪어도 미련하게 버텼어요. 그땐 참는 게 능사라고 모두가 조언했는데, 지금 와선 모르겠어요. 서른 중반이 되도록 꾸준히 한 직장에서 버티고 있는 게 잘한 일인 건지. 오히려 좋은 기회를 찾아 떠날 수 있는 시점을 놓친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지금 와서 드는 유일한 확신이 하나 있다면, 자신을 소모하고 해치면서까지 참고 버텨서 해내야 할 일은 없다는 거예요.”
문득 자영은 부장에게 선뜻 그만두겠다는 말을 한 점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일전에는 결혼 전까지 어떻게든 버티며 회사에서 결혼 자금을 모아야겠다는 심정으로 참고 버텼다. ‘내가 결혼만 해봐라, 이 지긋지긋한 회사 완전 이별이다.’라고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인내하며 버텨냈다. 그러나 노력하고 헌신한 관계는 어그러졌고, 결혼이라는 목표를 이룰 수도 없게 됐다. 성실히 일한 결과가 온건한 보상으로 주어지지도 않는 회사에서는 일에 대한 의욕도 점차 증발했다. ‘회사나 남자’가 자신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점을 자각하자 오히려 툭 터놓고 그만두겠다는 속내를 밝히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간 차마 입으로 내뱉지 못한 그 한 마디는 생각보다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니었다.
“그러면 손님은요, 버틴 것을 후회하세요?”
혜란의 질문에 자영은 자신을 가리키며 희미하게 웃었다. 성실히 참고 다닌 결과 혼자 벌어먹고 살 정도의 자금을 조금이나마 마련한 점이 유일한 이점이라고 답했다.
“약간의 아쉬움은 남아요. 새로운 시도는 애초에 논외로 두고 회사원으로 살았으니까.”
“그렇군요.”
자영은 혜란에게 말하며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때도 있었지만, 경제적인 사정으로 포기했던 때를 떠올랐다. 불안정한 미래를 감당하고서라도 좋아하는 일을 했더라면 어떤 삶이 펼쳐졌을까 상상했다.
“물론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백 퍼센트 옳다고 말할 수도 없겠지만.”
“하고 싶은 일이라면 어떤 일이었어요?”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지금은 디자이너라고 일하고 있지만.”
자영이 말하자, 혜란은 “멋진데요.”라고 말하며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전 손재주는 없지만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동경하고 있어요. 자신 만의 색깔이 드러나는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혹시 어떤 디자인을 하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자영은 민망한 듯 웃으며 “작은 광고 회사에서 여러 잡무를 하는 것뿐”이라고 답했다.
“디자인은 미적 감각이 없는 분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세심한 관찰력이나 센스 등이 한데 어우러져야 할 수 있는 일인데, 멋지네요.”
실전으로 하는 업무에 어울리지 않는 극찬에 가까워 부담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한 보람의 기쁨을 느꼈다. 봉급은 적고 업무 강도는 높다거나 툴 몇 개 다룰 줄 알면 손쉽게 할 수 있는 기능적인 일로 치부되는 않고, 디자이너의 능력에 대해 존중해 주는 점이 고마웠다.
혜란은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르바이트하는 틈틈이 공부와 건강관리에 신경 쓰는 점이 바지런한 그녀의 생활 태도를 잘 드러내준다고 느껴져서 어여쁘게 느껴졌다.
“그러다 좋은 기회를 얻게 돼서 면접 보고 합격했는데, 몇 주 만에 나오게 된 거예요.”
“후회해요?”
자영의 질문에 머뭇거리던 혜란은 이내 솔직하게 답했다.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해서 나온 거라 후회하진 않아요. 단지, 부모님이나 다른 사람들의 걱정 어린 말을 들으면 불안할 때가 있어요. 미안하기도 하고요.”
“버틸 수 없다고 판단돼서 나온 거라면 그게 맞아요. 난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미련하게 참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땐 회사를 그만두는 게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실패로 여겨졌지만 그게 아니어도 어떻게든 살아지더라고요.”
자영의 말에 어두웠던 혜란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꾸준히 알바를 하기로 했느냐고 묻자 급작스럽게 비어진 시간이 있어 몇 차례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본래 이 시간대에 일하던 분이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부탁을 해서 오게 됐어요.”
계산한 물건을 받아 들었을 때, 자영은 이곳에 온 목적이 떠올랐다.
“아차, 잊을 뻔했네요.”
자영은 가방에 늘 지니고 다녔던 우산을 건네주었다.
“전해 주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돌려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아, 잊고 있었는데.”
혜란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내일 일기 예보를 확인해 보니 비가 온다네요.”
“고맙습니다.”
혜란의 인사에 자영은 기분 좋은 인사를 나눈 뒤 편의점을 나왔다. 자영은 신기하기만 했다. 그간 서주 선배에게 기대어 푸념을 늘어놓거나 속으로 삭이기 바빴는데, 선뜻 먼저 위로의 말을 누군가에게 건넸던 자신의 행동은 의외의 충동적 용기였다. 한편으론 혜란의 모습이 사회 초년생이었던 때의 ‘자신’을 비춰 보는 것만 같은 애틋함을 느꼈던 게 다정히 말을 걸게 된 요인이기도 했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고들 말하지만, 제일 좋은 건 고통스럽게 버티며 자신을 소모하는 게 아닌 보람을 느끼며 꾸준함을 유지하는 하는 것이었다. 매일 지루한 출퇴근을 반복하는 직장인의 삶이라도, 미약하지만 단정한 보람과 기쁨을 느낄 기회가 애초에 없다면 그 과정은 지옥처럼 괴롭다. 거창한 목표나 자아실현은 아니더라도 자기 삶을 수용하고 인정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 수 있는 나의 일을 구축하는 건 중요했다. 적어도 내가 하는 일을 미워하거나 증오해서는 안되며, 그 일이 경제활동을 위한 고통스러운 고문이 되지 않는 건 어떤 일을 하든 적용되어야 할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돈을 떠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경제활동이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으로써만 작용하는 건 멀리 봤을 때 좋은 방식은 아니었다.
자영은 집에 돌아온 뒤에 처음으로 사직서를 썼다. 새로운 곳으로의 이직이든, 열심히 달려온 5년여 시간에 대한 휴식이든 어떤 결론을 정해 두진 않았지만 근무 환경의 개선이 없다면 망설임 없이 나가야겠다는 결심이 바로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