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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니야 Oct 27. 2024

9.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

자영은 스티커 씰은 화장대에 나란히 올려두었다.

‘새봄 이가 좋아할까?’ 자영은 서주 선배의 딸아이를 떠올리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서주 선배만 떠올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함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렸다. 자영은 몇 차례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을 때 바쁘다는 핑계로 답문을 차일피일 미뤄왔다. 자신이 헤아리지 못한 선배의 그늘에 대해 넘겨짚듯 아는 척할 수도, 모른 척 푸념을 늘어놓으며 뻔뻔하게 굴 자신도 없었다. 어느새 마음엔 선배에 대한 완고했던 동경과 기대는 녹아 흘러내렸다.

 선배는 늘 자신의 삶을 우선순위에 두고, 일상을 꾸려가면서도 이타적이고 배려가 넘쳤다. 연일 야근을 반복하여 지칠 때도 팀원들을 위한 도시락을 손수 챙겨 왔다. ‘내 것 싸는 김에 겸사겸사 챙겨 왔어.’라고 말하며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담담한 배려가 좋았던 상사이자 인생 선배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자영은 서주에 삶과 고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철옹성과 같이 견고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더라도 말 못 할 고충이나 어려움은 있을 수 있다. 그런데도 자영은 당연히 선배가 뭐든 수월하게 이루는 완벽한 사람, 행복과 만족이 넘치는 삶을 산다고 믿었다. 뒤늦게나마 자영은 서주의 속내가 궁금했다. 선배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선배, 지난번엔 죄송해요. 일이 바빴어요.”

자영은 망설임 끝에 서주에게 연락하여 사과했다.

“그래.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걱정했어.”

“일은요. 선배야 말로 잘 지내고 있어요?”

자영은 태연자약한 어투를 유지하며 물었고, 서주는 ‘나야 늘 비슷하지. 잘 지내고 있어.’라며 여느 때와 비슷한 음성으로 답했다. 자영은 흘깃 우연한 기회로 구하게 된 캐릭터 스티커를 보며 물었다.


“선배, 새봄 이가 지난번에 좋아한다고 했던 캐릭터가 뭐였어요?”

“티그렛이라는 로봇 캐릭터야. 그건 왜?”

“빵은 경쟁률이 높아서 못 구했지만, 운 좋게 스티커는 얻게 돼서요. 다행히 제가 갖고 있는 것 중에 있네요. 티그렛.”

자영은 짐짓 태연한 척 밝게 꾸민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구했어? 주변에서 구한 사람이 거의 없는 희소한 스티커인데. 새봄 이가 이모 최고라면서 좋아하겠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

“곧 봬요 선배, 또 연락드릴게요.”

자영은 짧은 통화를 마쳤다. 희소한 확률로 나오기 어려운 캐릭터 스티커라니, 얻어걸린 행운이었지만 여러모로 기분이 좋았다. 이런 인기 제품은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제법 쏠쏠한 가격에 판매된다는 소문을 들었던 적이 있던 터라, 그 남자가 불순한 목적으로 편의점에 여러 제품을 자신이 유리하게 이용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계획과 달리 중요한 스티커는 자신이 갖게 되었다는 것을 그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좀 예쁘게 쓰셨어야지.’

자영은 남자 아르바이트생을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은근히 그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 주었다는 생각에 야릇한 통쾌감이 이어졌다.

 남자를 두 번째로 만난 건 며칠 뒤였다. 그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서주 선배의 연락이 왔다. 머뭇거리던 자영이 전화를 받지 않자 준원은 말했다.

“급한 연락이면 받고 와요.”

“아니에요. 술 더 마시는 거 어떠세요?”

준원과의 두 번째 만남은 훨씬 편안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두 사람은  그가 제안했던 ‘연애의 온도’라는 전시회를 본 직후 그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자영은 작품을 기획한 작가와 그가 친분이 있는 사이라는 점이 신기해서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물었다.

“일전에 다른 작품 전시회를 할 때 인터뷰를 했던 게 인연이 됐어요.”

“예술 계통 쪽으로 아는 분이 많으시겠어요.”

“일을 같이 하게 된 계기로 친해질 때가 있어요.”

자영은 고개를 끄떡였다. 이번에 본 전시는 ‘사랑’에 대해 전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이 좋았다. ‘사랑’이라는 주제가 남녀 사이의 이성적 사랑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점도, 열혈 한 사랑 지상주의자인 작가 본인이 이혼 후 자신은 ‘그림과 고양이’를 더욱 흠모할 수 있게 됐다는 인터뷰 내용도 기억에 남았다. 길고양이들을 섬세하게 관찰하며 그린 크로키 작품도 인상 깊었다. 작품을 보기 전에는 ‘사랑’에 관한 주제를 다뤘다는 말만 듣고 이 작가는 이별의 상처 따윈 없는 순진한 여성일 거라며 폄하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떤 대상이든 단편적으로 판단하고, 제 멋대로 정형화된 규정을 했던 점이 경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선망하는 서주 선배의 삶에는 걱정 근심 없이 마냥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듯, 사랑에 대한 영감을 작품으로 만드는 작가라면 상처 따윈 없이 충만한 애정만 경험했을 거라고 조소했던 점은 단편적인 판단이었다.

“어떤 점이 좋았어요?”

준원은 물었다. 자영은 그가 자신의 생각을 먼저 묻고 경청해 줄 때의 잔잔한 시선의 마주침이 좋았다. 준원의 눈에는 어떤 비난이나 판단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지 않았다.

“서로 간의 비슷한 온도를 꾸준히 유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 좋았어요. 온도는 저절로 맞춰지는 게 아니라 맞춰가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도 공감할 수 있었고요.”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여러 방면의 이야기를 나눴다. 같이 봤던 전시회, 자주 하는 취미, 관심 가는 영화나 좋아하는 음식 등에 대해서. 자영은 준원을 처음 만났을 때엔 나이 많은 어른이라는 사실을 자주 의식하곤 했다. ‘어른답지 못하다거나’, ‘나이 값 못한다’는 말을 들을까 봐 지레 겁먹고 조심스레 행동했지만 준원은 서로를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이를 의식하여 위축된 모습을 보이거나 솔직하게 터놓으려던 마음을 단념하며 일부러 거리를 두려 할 땐 마음껏 이야기해도 좋다고 독려해 주었다. 속마음을 헤집는 따뜻한 말에 마음이 열렸다. 자영은 그에게 여자로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의지 본능을 의식할 땐 약한 마음을 붙들며 이야기의 화제를 바꾸었다. ‘어쩌면 내가 진짜 원했던 건, 서로가 차갑게 얼어붙지 않도록 유지해 주는 적절한 애정의 균형이 아닐까.’ 비워진 술병이 제법 늘어났을 때 자영은 말했다.

“만남이 이렇게 이어지기도 하네요.”

준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우리 계속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망설임 없는 준원의 대답에 자영의 귓불이 달아올랐다. 붉은 기운이 목 끝까지 전해져서 도수가 높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을 때처럼 가슴속이 뜨거웠다.

“그거 알아요? 당신과 같이 있으면 내 나이를 잊게 된다는 거.”

자영이 웃으며 말하자 준원은 미소 지었다. 준원은 나이란 외적인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러 갈등은 나이의 격차가 아닌 생각의 아집과 대화를 나누는 방식에서 생겨나는 거라고, 같이 있을 때 여러 조건을 따지거나 재지 않아도 둘 만의 대화로 가득 채워갈 수  있는 건 좋은 게 아니겠냐고.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서로에게 몰입하는 시간은 유영하듯 흘러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준원은 산책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일정한 속도로 보폭을 맞춰 걸어갔다. 자영은 처음으로 사직서를 쓴 일에 대해 터놓았다. 본격적으로 일을 그만두고 회사를 나와야겠다는 결심이 선 건 아니지만,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 주던 조직을 선뜻 떠나야겠다는 결단이 선 건 이례적인 변화였다. 참고 버텨냈던 회사생활도, 노력하며 맞춰온 연애가 허무하게 종결됐듯 뜻하지 않은 결말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참고 인내하는 것만이 문제의 해결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터놓았다. 준원은 물었다.

“기분은 어때요?”

“속 시원해요. 그간 절대 내 입으로는 뱉어내지 못할 말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어요. 그리 힘들지 않은 말이었는데 그간 입에도 담지 못했던 점이 의아해요.”

자영은 쓰게 웃으며 빈손을 쥐었다 폈다. 중요한 무언가를 손에서 놓쳐버린 듯 씁쓸한 표정이었다. 그간 손에 쥐었다가 놓친 것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자존감을 훼손하는 말에도 옷으로 넘겼던 상처의 시간, 한 남자에게 몰입하여 달뜬 연애에 매료됐던 몰입의 과정과 연차가 쌓이며 잃게 된 생기, 흘러가는 젊음과 선망했던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도. 그것들은 한 때 자영의 삶의 전부였지만 잔인한 상처를 남긴 채 모두 떠났다.  

“결정적으로 저의 이십 대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을 만난 게 계기가 된 것도 있었어요. 제가 이십 대 후반에 이 회사에 들어와서 고군분투하며 적응하던 때가 생각나서 안타깝고 안쓰럽더라고요.”

자영은 혜란을 떠올렸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나온 것이 나약한 것 같다며 자책하던 모습은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신입 사원 때의 출근길은 지옥이었다.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나서 출근을 하지 못하게 되기를 바랐던 과거의 ‘나’를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해주고 싶었던 말을 그녀에게 대신 건넸다. 미련하게 버티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했던 건 혜란의 마음을 위안해 주려는 빈말이 아니었다. 자영은 어렸을 때, 사회생활이란 원래 어렵다는 부모와 선배들의 말에 순응하며 부당한 상황도 참고 넘겼던 일을 후회했다. 그간의 인내가 자영에게 가르쳐준 것은 상처와 회한이었다.

“그간 저는요, 나이만 먹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도 취업이 어렵지만 5~6년 전은 지금도 다르지 않았어요. 그때 겨우 취직하게 된 회사에서 그만두는 건 절대 안 될 일이라며 참고 회사를 다녔어요. 거기다 미련하게 한 남자한테만 의존해서 다양한 연애 경험도 하지 못했고요. 직장을 오래 다닌 경력 외에 이렇다 할 뭐가 없어요. 남들처럼 새로운 특기를 개발한 것도 아니고, 안정적인 가정을 일군 것도 아니고. 이곳저곳 여행해 본 추억도 없고.”

“전 자영 씨와 생각이 좀 다른데.”

준원의 말에 자영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둥글고 까만 눈동자에 자영의 모습이 흐릿하게 머물렀다.

“그간 충분히 열심히 살았어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고군분투했잖아요.”

그 말에 자영은 전진하던 걸음을 멈추고 서서 준원을 보았다. 그는 옅은 미소를 띤 채 자영을 보았다. 평범하다 못해 미천하고 미래가 없는 자신의 삶은 능력과 안목의 부족이 일으킨 비극이라고 생각하였던 터라 ‘충분히 애써왔다’는 말을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제 자신을 돌아봤을 때 아쉬운 지점은 있지만 돌아보면 매 순간 그때의 상황에 맞춰 최선을 다했더라고요. 어느 시기든 처음 경험하는 것이니 부족함이나 아쉬움은 남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준원은 다짐하듯 그런 말을 했고, 자영은 그의 기운 옆얼굴을 보았다. 바람에 앞머리가 이마 위에서 흩어졌다.

“그리고 한 가지 다행인 점은, 현재의 내가 과거를 돌이킬 순 없지만 앞으로의 모습은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거예요.”

“준원 씨는 지금 하는 일에는 만족하는 거죠?”

“몰랐던 작가와 작품에 대해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어요. 새로운 전시의 해설을 맡게 됐을 때 하나씩 알아갈 수 있는 설렘이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힘이에요.”

“멋지네요.”

“자영 씨는요? 만약 직장을 그만둔다면 이후에 어떻게 살고 싶어요?”

“전 비슷한 계열의 회사로 이직 준비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디자이너로서의 경력을 꾸준히 살리려는 건가 보네요.”

자영은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어갔다.

“제 생각과 무관하게도 회사나 광고주가 요구하는 쪽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할 땐 회의감을 느끼지만 그간 제가 한던 일이다 보니 경력을 살려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당장 회사를 그만둔 게 아닌데도, 자영은 마음이 가벼웠다. 계속 한 조직 안에서 버티어 내야 한다는 책무감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내면을 짓누르고 있던 짐을 털어낸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면 그럴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원하지 않더라도 고용주나 회사의 요구에 따라 방향을 바꿔야 할 때도 있고.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할 때 겪는 고충 공감해요.”

어지러울 정도로 혼란했던 감정이 홀가분하다고 느껴졌다. 이 남자의 편견 없이 무해한 공감에 자영의 마음은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위안이 되는 말이네요. 그렇지만 아쉬움은 남아요.”

“어떤 점에서요?”

“난 일이든 연애든 오래 버티는 것 외에는 잘한 일이 없어요.”

“전 오히려 자영 씨가 부러운데요.”

준원의 말에 자영이 ‘어떤 점에서요?’라고 물었다.

“일이든 관계든 꾸준히 이어갈 수 있다는 것도 훌륭한 성과이고 재능이에요. 사람들은 결과에 대해 쉽게 말하지만 끈기를 갖고 오래 해낸 건 자책해야 할 일이 아니에요.”

자영은 과거의 자신을 위안해 주는 이야기를 듣고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정직한 삶의 태도와 일에 대한 열정 등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연하의 남자는 어리광을 부리거나 미성숙할 거라는 편견의 시선으로 재단했던 일이 떠오르자 자영은 부끄러웠다.

“어쩐지 나이를 헛먹은 것 같네요. 준원 씨한테 나이답지 않은 어리광이나 부리고.”

“아직은 미숙한 점이 많지만 전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기회를 놓치거나 소중한 걸 잃어버린 뒤에는 되찾을 수 없을 때가 많으니까.”

말을 이어가던 준원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음영이 진 얼굴을 보던 자영은 그가 떠올리는 생각이 무엇일지 알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말 못 하고, 감추어둔 속사정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비슷한 어둠을 선배의 얼굴에서 발견했던 날이 자영의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난 이들의 어두운 그림자를 본 뒤에 먼저 괜찮으냐고 물을 수 있을까. 이들이 숨겨두었던 상처를 드러냈을 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자영은 고민했다. 나란 사람은 누군가의 상처나 아픔에 대해 진심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일까에 대해. 마냥 밝고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이들 또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저마다의 아픈 사정이 있을 수 있다. 동경할 만큼 반짝이는 삶에도 그림자는 있는 것처럼. 그들이 자신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해 준 만큼 그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마음도 들었다.  준원은 생각에 잠긴 자영의 옆얼굴을 보며 물었다.

“만약 과거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음, 지금의 나라면, 굳이 한 가지 길만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길이 있다는 걸 알면 된다고 말해줄 것 같아요.”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준원의 눈은 생기 있게 빛났다. 그 눈빛을 홀린 듯 올려다보고 있는 자영에게 그가 말했다.

“눈빛이 매력 있어요. 자신 만의 경계와 색깔이 분명한 사람으로 느껴져서 좋아요. 꾸준하게 무언가를 지켜나가는 단단한 힘도 좋고요.”

“그렇지 않아요.”

칭찬은 고마웠지만 한편으로 자영은 마음 한 편이 묵직해졌다. 속눈썹이 없었다 해도 그와 이런 만남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지극히 평범한 자영에겐 계획에 없던 낯선 남자와의 만남이나 데이트는 경험할 수 없는 생경한 행운이었다. 모두 호랑이 눈썹 때문인데. 조금씩 눈썹의 숱이 없어지는 게 느껴지는 게 초조했다.

“닮고 싶었던 사람이 있어요.”

자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회사에서 내가 동경했던 선배. 그 사람이 딱 지금 당신이 말한 것처럼 특별한 아우라를 갖고 있었어요. 대단한 미인이 아닌데도 시선이 가고, 사람들의 주목을 이끌 수 있는 그만의 힘이 대단했죠. 선배의 모든 게 부러웠어요. 당당한 걸음걸이, 뛰어난 능력, 배려 깊은 성격.  제 눈엔 모든 게 완벽해 보였는데, 어쩌면, 제가 생각한 게 전부가 아니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

준원은 말끝을 흐리는 자영을 바라보았다.

“나에 대해 쉽게 판단하고 평가 내리던 사람들을 원망하면서도 정작 존경했던 선배에게서 저 또한 보고 싶었던 모습만 찾아봤어요. 준원 씨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말끝을 흐리던 자영은 고개를 숙었다.

“저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요?”

머뭇거리던 자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니까 생각이나 경험 면에서 부족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하철에서 도와줬을 때에도 의심과 경계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고요. 멋대로 판단해서 미안해요.”

자영은 자신이 뱉어낸 말이 마음을 상하게 만들까 염려되었는지 서둘러 다음 말을 덧붙였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아뇨.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낯선 사람이 다가왔으니 당황할 만했어요.”

자영은 너그럽게 마음을 쓰는 준원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지만, 그가 자신에 대해 갖는 긍정적인 기대나 호감이 일회적인 감정일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생각에 잠긴 자영은 걸음이 꼬이는 바람에 휘청이다 한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준원은 자영의 한쪽 팔을 부축하듯 잡아주었다. 자영은 지탱해 준 손에서 팔을 빼며 얼굴을 붉혔다.

“좋네요. 작품에 대해 대화 나누는 것도, 같이 걷는 것도. 오랜만에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요.”

“너무 잘해주지 말아요. 그럼 의도와 무관하게 오해할 수 있으니까.”

자영은 경계하며 잘라 말했다.

“어떤 계기로든 서로 가까워질 수 있잖아요. 지금은 그런 과정이고.”

준원은 거리를 두려는 자영의 태도에 기분 나빠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다.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자영 씨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뜻이었어요.”

“그쪽이 전에 받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고 말했었죠, 지금 당신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에요.”

자영은 설렘에 상기되는 감정을 애써 내리눌렀다. 속눈썹이 없더라도 남자의 태도는 바뀌지 않을까? 자영의 머릿속에서는 줄곧 같은 의문이 이어졌다. 밋밋하다 못해 볼품없는 민낯을 드러내면, 이 남자도 냉정히 돌아설 거라는 확신 어린 기시감이 들었다. 범석이 몇 차례의 만남 뒤 태도가 돌변했던 것처럼. 호랑이 눈썹으로 상승한 매력이 잠시 연하의 남자에게 좋은 기운을 끼쳤을 뿐이다. 눈썹이 없는 자신의 민낯은 초라하고 궁색하다고 자영은 자조적으로 판단 내렸다.

“다들 그랬어요. 처음엔 호감을 갖더라도 기대에 부합하지 않으면 돌아서기 마련이에요. 장기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은 건 내 문제일 거라고 험담하던 부장이나 그 말에 동조하여 마음을 단념한 애인이나 다 그랬어요. 물론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건 알아요. 완벽해 보였던 선배의 어두운 면을 봤을 때 실망하여 돌아선 나 또한 그들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어요.“

자영의 말에 상관없다는 듯 준원은 확신어린 투로 말했다.

“난 머리가 나빠서 자영 씨가 말한 그들과 다를 거라는 믿음을 어떤 방식으로 증명하면 좋을지 아직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분명한 건 하나예요. 당신에 대해 알고 싶고 이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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