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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얌 Mar 11. 2022

방 한 칸의 인연

만삭의 임산부에게 셋방을 내어준 할머니


내 고향 민양 마을은 인심 좋기로 소문난 배산임수의 자그마한 어촌이었다. 꿈 많던 소녀 시절에는 살기 좋은 아름다운 마을이었던 이곳. 허나 한 동네 친구였던 남자와 결혼해 시댁으로 들어가자 민양 마을의 삶은 힘들게 다가왔다.


군대에서 막 제대한 남편은 아직은 직장을 구하지 못해 부모님의 어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선주의 아들이었던 남편은 선원들과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야 했다. 일찌기 고등학교 시절, 사라호 태풍 속에서도 유일하게 살아온 마을의 배였기에 남편은 배를 탈 때 두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이제 막 대식구의 시가로 들어온 새색시인 나였다. 배가 바다에 나간 후엔 모든 일(농사와 집안일)은 여자들의 몫이니 나라고 놀 수는 없었다.


비록 가난하게 자랐지만 일을 시키지 않는 어머니 덕에 나는 머리에 임질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 머리에 거름통을 이고 밭으로 나섰다. 거름통은 머리위에서 흔들흔들, 일 못 하는 새색시를 비웃는 듯 흔들렸다.

가득 채우면 옷에 거름이 묻을까 봐 반 통을 채웠다. 밭에 닿을 때까지 내 목은 머리와 통이 굴렁이며 함께 춤을 췄고, 그 통을 머리 위에 이어주는 손윗 동서는 동서대로 이 일은 더 못하겠다는 푸념을 했다.


보름 정도 지나 바다에서 배가 들어온 날, 내  임무는 더 커졌다. 시집 대가족과 선원들 이삼십여 명의 점심 준비를 혼자 도맡아했기 때문이다. 가마솥 뚜껑을 열면 내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그 안으로 줄달음질치곤 했다.




그렇게 농사며 선원들 식사 준비를 하다 보니 맑은 하늘 한번 마음 놓고 쳐다볼 겨를 없이 삼 년이 흘렀다. 큰애가 세 살, 배속에는 둘째가 만삭으로 들어앉아 몸은 한없이 무거웠다. 그래도 남편의 출어복을 챙겨주고 바닷가에 가서 떠나가는 배에 손을 흔들며 무사히 만선으로 돌아오라고 인사를 했다.


배가 마을 앞바다 멀리 돛대가 가물거릴 때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아래채 우리 방으로 들어와 소리 없이 울었다.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이나마 시원스레 열리는 기분이었다.


울고 나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오늘은 큰맘 먹고 무서운 시어머니께 분가의 말을 해야겠다는 다짐은 그동안 셀 수도 없이 해왔다. 그러나 늘 용기가 나지 않아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런 내가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갑자기 용기가 났다.


시어머니의 안방으로 들어간 나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은 딱 한 마디뿐,


  '어무이, 저희 분가하고 싶습니더.'


그러나 막상 그 말을 하려니 남편의 직장이 정해지지도 않은 현실이 떠올랐다. 차마 내가 대가족 시집 생활과 농촌 생활이 고되니 분가하고 싶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었다. 하여 에둘러서 말을 했다.


  "어무이, 뱃속에 둘째가 태어나면 지금 방은 비좁을 것 같습니더."


중풍으로 누운 남편을 대신해 어장을 경영하시고 대가족을 거느리시는 시어머니, 똑똑하신 분께서는 대번에 내 속뜻을 알아차리셨다.


 “아가! 저 아래 논에다 집을 지어 나가야제. 장사도 할 줄 모르는 너그가 우찌 도시에 가서 살라꼬? 아서라. 형편 나아지도록 기다리거라. 그때 가서 문전옥답 큰집 옆 논에다 두서너 칸 짜리라도 지어보자. 아무렴. 내 집이 있어야제."


어머님 말씀은 항상 유행가 가사처럼 익혀 알고 있지만, 나는 화난 머슴처럼 말 없이 일어나 우리 방으로 건너왔다.


서너 시간이 흘러 방문을 똑똑 노크하시는 시어머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너그가 정 그렇게 마음먹었다면 내가 말릴 수 있겠나." 

나도 모르게 시어머니의 손을 덥썩 잡았고 가슴이 벅차 한동안 그 손을 놓지 못했다.


큰아이를 등에 업고 만삭의 몸으로 십 리를 걸어 선착장에 도착했다. 통영에서 친정이 있은 마산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분가의 꿈에 부풀어 몸이 고된 줄도 모르고 나는 바다를 보고 또 보았다.




친정아버지께 여태껏 해 온 시집 생활의 어려운 점을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께서는 "네가 농촌 생활에 익숙하지 못해서 힘든 거제." 라시면서도 어려운 내 처지를 이해해주셨다. 그러고는 몇 년 동안 열지 않아오신 쌈지에서 보석같이 여기는 돈 이만 원을 꺼내 주셨다.

그러시면서 조용히 내게 물으셨다.


  "니... ‘참을 인’ 자를 하루에 몇 번이나 쓰노?"


나는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쓰며 살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부모님의 충고와 걱정 어린 표정과 돈을 가슴에 안고 다시 시댁이 있는 통영으로 돌아왔다. 민양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하늘을 날고 있는 새의 기분이었다.


다음 날 일찍부터 애를 업고 시내에 셋방 얻으러 다녔다. 그 시절은 셋방이 너무 귀했다. 아들을 등에 업고 남산만한 배까지 앞세운 나는,  셋방 푯말이 붙어있나 두리번거리며 시내를 돌아다녔다.


셋방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더니... 사나흘을 그렇게 허탕만 치고 몸이 녹초가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나흘째 되는 날, 통영 해저터널 옆 골목 돌담에 걸터앉아 아들을 쉬게 하고 뱃속의 아이도 위할 겸 나도 한숨 돌리고 있었다.


마침 내 옆에 앉아 쉬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나를 보자 “이 새댁은 어디 사노? 생전 안 보던 얼굴이네.”라고 하셨다. 나는 그분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내 입술은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자초지종 엮으며 마치 만화책 한 권을 다 읽을 때처럼 술술 풀었다. 내 말을 조용히 들으시던 할머니께서는 혀를 끌끌 차시며 농촌 일을 한 해본 사람은 고되다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말끝에 생각난 듯 덧붙이셨다.


  “우리 집에 안 쓰는 방 한 칸이 있는데 오래 비워서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


나는 그때 할머니가 하느님이 보내주신 천사처럼 보였다.  '어쨌든 가 보자.'라고 마음먹고 아이를 등에 고쳐 업고 할머니 뒤를 강아지처럼 졸레졸레 따라갔다.


그렇게 해서 열 달 사글세로 방을 얻게 되었다. 부엌도 없는 단칸방이었다. 그래도 시집에서 나온다는 설렘으로 내 가슴은 두근대고 설레였다.




살다보니 할머니의 처지는 세를 놓아야 할 형편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식구 없이 혼자 사시다 보니 사람이 그리워서 였구나....'


이제 와 나도 할머니의 나이가 되어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또 다른 마음도 있으셨을 것이다. 나의 딱한 처지에 연민을 느끼셨을 것이다.


이제 내가 그분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 마음씀이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 것이었는가를. 이미 하늘나라로 가셨을 주인집 할머니, 어느덧 그 할머니의 나이에 이르런 나. 요즘 들어 길을 가다 만삭의 임산부를 보면 그 할머니가 그리워진다. 나도 그 누구의 가슴속에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인연으로 남고 싶다.




글쓰는 할머니, 구하나

: 손자들을 키우러 상경했다 60에 여고 입학, 70에 국문과에 입학, 팔십대인 지금까지 팔팔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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