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속 터미널, 이른 아침, 수많은 발자국들이 덧칠한 광장 바닥을 전동 청소차가 말끔히 닦아 놓았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바닥.
원래 터미널 광장은 시끌벅적한 곳이었다. "전주요!", "여수요!", "광주 출발 몇 시 행이오!"라는 외침으로 떠들썩했건만 요즘은 승강장 번호와 행선지명이 모든 소리를 잠재워버렸다.
사람들은 차를 마시거나 휴대폰을 만지며 출발 시간을 기다린다. 가격이 싼 음료수 자판기들은 거의 없고 패스트푸드점, 유명 브랜드 커피점 등이 즐비해진지 오래다. 그동안 이곳을 스쳐간 사람들의 만남과 이별, 갖가지 사연을 상상하기에는 너무 말끔한 풍경이다.
어느 한가한 오후, 나는 커피 잔을 들고 터미널 옆 ‘파미에르 광장’에 앉아있었다. 만남의 광장 같은 이곳은 긴 의자와 4인용 원탁 테이블이 정답게 자리하고 있다. 작은딸의 연년생 아이들을 키워주기 위해 서울에 온 내게, 이곳은 지친 몸과 마음의 주름을 펴는 휴식 공간이 됐다.
이른 시간, 큰 전등을 켜지 않아 사람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긴 의자에는 남녀 두 명이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다. 서로의 팔로 어깨를 덩굴처럼 감싸 안고 있어 누구 팔인지 어깨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마치 안토니오 조각상 <에로스와 프시케>같다. 또 다른 좌석에는 남녀 서너 명이 반갑게 수다를 떨고 있고 그 옆에는 한 남자가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중앙 의자엔 한 아가씨가 바쁘게 화장을 고치고 있다.
저 멀리 어느 여인이 보인다. 어깨엔 큼지막한 갈색 숄을 걸쳤고 비닐봉지에서 무엇을 분주히 찾고 있다. 나랑 동년배쯤으로 보인다. 그녀도 자식들 집에 다니러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지나자 배낭 차림의 사람들이 속속 모여든다. 서로 악수를 나눈다. 산악회 회원들 같아 보인다. 어느새 광장은 만선의 고깃배가 흔들릴 때처럼 역동적인 풍경으로 변했다. 문득 지금의 풍경과 옛 고향 풍경이 오버랩 됐다.
어릴 적 고향 마을 한복판에 ‘동사 마당’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지난 소식과 새로운 사건, 사고를 알았다. 소문이 옆집들의 야트막한 돌담장을 타면서 하루가 열렸다. 이웃 어른 아이들까지 담장 너머로 얼굴을 마주해서 안부를 물었고, 대소사를 치른 냄새가 채 가기도 전에 담장 위에 얹힌 음식에서 모락모락 이웃들의 이야기꽃이 피어올랐다.
호사나 흉허물은 한두 시간 지나서 '동사 마당'에 닿으면서 공처럼 굴러 고물이 덕지덕지 묻히기도 했다. 좋은 일은 고물이 잘 털려 얇아진 데 반해 흉허물은 되려 더 커졌다. 그렇게 부풀려진 흉허물도 고개 넘어 옆 마을에 닿기 전에는 체에 걸러져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동사 마당에 모인 어르신들의 조언 탓에 쓸데없는 고물은 다 털려나갔기 때문이다.
정담이 쏠쏠했던 '동사 마당'. 그 '동사 마당'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뒤쪽 의자에 앉았던 여인이 다가와서 한숨을 쉬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 아랑곳하지 않고 실없이 휴대폰만 만지고 있을 때, 여인이 말했다.
“어쩌면 좋습니까.”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마치 어린아이의 간곡한 부탁처럼 들렸다.
“왜 무슨 일인가요?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십니까?”
“저와 잠깐 얘기 나눌 시간이 있으신가요?”
“네, 무슨 일이신지요?”
내 대답에 여인은 안심이 되는지 어렵게 말을 했다.
"이럴 땐 모르는 사람이 편할 것 같네요, 어디에도 말할 사람이 없고 해서 혼자 해결하기에는 너무 답답해요,”
하면서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저는 아들만 둘입니다. 육 년 전 남편이 알츠하이머병으로 S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남편은 특실에 입원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살던 아파트를 은행 담보로 병원비를 충당했지요. 특실 입원비도 하루 이틀이죠. 벌써 몇 년째인지...이제 우리는 '하우스 푸어'나 마찬가집니다. 그동안은 종종 아들 내외가 왕래 하면서 의논을 했는데, 어쩐지 요즘은 전화도 받지 않아요. 아, 저는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여인의 눈물이 야윈 뺨을 타고 흘렀다.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닦는 모습을 보자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여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자기는 무용을 전공했고 남편은 고위공직자로 퇴직했다 한다. 살아온 세월은 그런대로 가족이 화목했고 윤택한 생활을 하면서 아들과 며느리도 상류층으로 살았다고 했다.
나는 여인의 사정을 잘 모르는지라 어떤 조언도 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따뜻하고 교양 있는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는 내 지혜의 부족함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어려울 때 지푸라기라도 잡게 해 주어야 하는데... 어떤 말을 해야 이 절박한 여인에게 위로가 될까?라는 생각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고향 ‘동사마당’이 떠오르면서 ‘이웃의 정(情)'이 떠올랐다.
“제 말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으면 해요, 병원에 계시는 남편에게 지금의 어려운 형편을 말씀하셨는지요?”
내 물음에 여인은 남편에게 여러 번 말해도 통하지 않는다 했다. 잘 살던 시절만 생각하며 병원 '특실'을 떠날 수 없다고 고집만 부린다고 했다. 여인은 한숨을 쉬었다. 남편을 대학병원 특실이 아닌, 요양원으로 옮겼으면 싶다고 했다.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남편에게 말씀하세요. 솔직히 형편을 털어놓으시고요.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고 하세요. 아주머니 생각대로 요양원을 옮기세요. 연락도 없고 발도 끊은 자식들이 나중에 뭐라고 하겠어요? 제 말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작은딸이 다급히 나를 찾는 소리였다. 연년생 손자 손녀가 낮잠에서 깨어났다고 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한 시간 반이 지났다. 내가 일어서려는데 여인이 말을 멈추려는 기색도 없이 계속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편하네요,”
자꾸 말하고 싶어 참을 수 없는 눈치였다. 연이어 내 휴대폰이 울렸다. 작은딸과의 통화를 끝내고 옆자리를 보니 벌써 백 미터 정도나 멀리 걸어가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굽은 등 야윈 허리에 한 쪽 발을 조금 끌면서, 까만 비닐봉지만 앞뒤로 휘적휘적 흔들린다. 그러고 보니 아까 파미에르 광장 한 켠에 쓸쓸히 앉아있던 그 여인이었다.
강남고속터미널 파미에르 광장. 파미에르는 '가족'이란 뜻이다. 좀전에 내게 속을 털어놓으며 울던 여인과 나는 잠시나마 '가족'이 되었다. 아니, '가족'에게도 못할 말을 나누는 '찐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 '찐한' 관계는 이내 썰물처럼 저만치 쓸려가고 다시 밀물처럼 낯선 얼굴들이 이곳으로 도착한다.
가족에게 차마 말못한 속사정을 털어놓고 사라진 여인. 손에 들린 검정 비닐 봉지를 닮아 애처롭게 여기저기 부대끼고 흔들리던 나이 든 여인, 파미에르 광장에서 헤어진 그 여인에게 잠시 나는 '가족애'를 느꼈고 '이웃의 정'을 느꼈다.
"모르는 사람이 편해요."
여인의 말처럼 '모르는 사람이 편할 때'가 있다. '가족 광장'이란 뜻의 '파미에르 광장'에서 차마 '가족'에게 못할 말을 하고 홀홀히 떠나던 여인. 수십 년 전 고향의 '동사 마당'을 어딘지 닮은 '파미에르 광장'. 그곳에서 나는 여인이 흘리고 간 눈물에 가슴이 먹먹했다.
표제 이미지: 픽사베이
글쓰는 할머니, 구하나
: 손자들을 키우러 상경했다 60에 여고 입학, 70에 국문과에 입학, 팔십대인 지금까지 팔팔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