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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얌 Jun 14. 2022

보리를 밟듯 글을 쓴다

  꾹꾹 밟아야 좋은 보리잎이 올라오듯 글도 그렇다

와, 저게 뭐야, 보리잖아!

부모님 제삿날이라 고향에 갔을 때였다. 해변도로 가의 보리밭을 보았다. 보리밭에 앉아서 나풀거리는 잎을 만져 보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상큼한 보리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어릴 적 부모님이 처음으로 밭을 사서 보리를 수확했던 날처럼 감동스러웠다.




백여 가호 집들이 조가비처럼 다닥다닥 정겨운 반농반어촌. 그곳으로 이사를 가면서 우리 집의 어려운 생활은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바다에 나가시고 어머니는 남의 밭일을 하러 다녔다. 나는 젖먹이 동생을 업고 밭 언덕에서 온종일을 보냈다. 쑥도 캐고 피비도 뽑고 색색의 풀꽃을 보면서 밭일이 끝날 어머니를 기다리는 것이 일과였다. 그럴 때면 밭이 있는 집들이 부러웠다. 


  '밭뙈기 하나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아버지께서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집에 들어서셨다.


  "우리도 밭이 생겼다, 오늘에야 드디어!"


나는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신을 신는 둥 마는 둥, 제일 먼저 옆집 영애와 순철이 집으로 달려갔다. 


  "이제 우리도 밭을 샀다! 우리도 밭이 있어 이제!"


팔짝팔짝 뛰며 자랑을 했다.


나는 '우리 밭'이 보고 싶어 어머니를 졸랐다. 하지만 좀전에 어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밭' 보다 더 급한 곳이 있으셨다. 물고기를 살려서 팔아야 제값을 받는다며 어머니더러 어서 시장에 가자 하셨다. 응석 부리는 나를 본체도 않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나가셨다. 부모님이 타신 배가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나는 언덕 위에서 울부짖었다. 


  ‘‘밭에 가아! 바다 가지 마아! 우리 밭에 가아!"


목이 터져라 우는 나를 보고서 바다 한가운데로 가던 배는 되돌아왔다. 부모님은 동생을 업은 나를 데리고 오 리쯤 산길을 걸어가셨다. 갈목 고개를 넘어 꿈에도 그리던 '우리 밭'에 도착했다.


  "에게, 이게 밭이야?"


엄청 크고 넓을 것이라 생각했던 기대와는 딴판이었다. '우리 밭'은 너무 작았다. 산비탈에 있는 밭인 데다 한가운데 크고 작은 돌까지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은 금세 언덕 아래로 돌들이 굴러 떨어질 듯이 위태롭게 보였다. 내가  "무슨 밭이 이래?" 하며 실망하니 어머니는 등을 토닥여주셨다. 


  "이 산천 밭뙈기도 아버지께서 밤낮으로 고생해 어렵게 장만했다."


말끝에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던 어머니. 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 가슴과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시간이 지나 아버지는 결국 고기잡이 일을 그만두고 농사일을 시작하셨다. 볼락어 눈알처럼 불거진 돌들을 파서 아래로 굴리시며 묵정밭을 옥토로 만든다고 하셨다. 


그러던 중 큰 돌을 무리하게 옮기시다 허리를 다치셨고 일 년을 꼬박 방에만 누워계셔야 했다. 그때 아버지는 내게 <심청전>, <콩쥐팥쥐전>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그때 내가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옛날이야기들은 시골 소녀의 정서를 풍부하게 해 줬고 상상력을 무한히 넓혀주었다. 글을 쓰는 요즘 그때의 아버지에게 이야기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이 들곤 한다. 다행히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 덕분인지 아버지의 병환은 점점 호전되어갔다.  


어렵던 우리집 형편도 조금씩 풀리면서 겨울이 가고 여름이 왔다. 온 마을은 보리를 수확하느라 바빴다. 집집마다 곡식 가마니들이 마당에 가득 쌓였으나 우리 밭은 그렇지 못했다. 거름을 못 줘서 쭉정이 보리 이삭을 비벼 키질을 하니 한 말 가량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첫 수확 보리는 우리 식구를 설레이게 했다.


어머니는 정성껏 돌절구에 물을 묻혀 가면서 겉보리를 찧으시더니 그걸 무쇠솥에 넣었다. 무거운 솥뚜껑을 열고 하얀 사발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리밭을 담을 때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땀방울들이 둥글둥글 맺히자마자 떨어졌다. 쌀 한 톨 넣지 않은 질퍽한 보리밥. 하지만 풋김치와 강된장에 비벼 먹던 순간, 우리 식구들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벅찬 표정이 되었다. 처음으로 맛본 '우리밭 보리'. 그 맛은 쌀이나 꿀 보다도 더 달았다.




그러고 보니 그 시절 고향은 늘 보리 향으로 가득했다. 진초록 완연한 봄, 마을 뒷산 비탈 밭에는 보리 김매는 사람들의 노래가 한창이었다. 김을 매다 허리를 펼 때쯤이면 여기저기서 새참을 이고 오는 장관이 펼쳐진다. 돌담 밭고랑을 경계로 군데군데 맛있는 음식과 농주 냄새는 보리 냄새와 잘 섞여 든다. 


보리 대가 풀풀 날리며 뜨겁던 오뉴월. 온 마을 사람들은 보리타작을 끝내고 또 다른 가을 곡식을 심었다. 가을걷이를 하고 난 시월 중순 풍경은 또 달랐다. 남자들은 소를 코뚜레 줄로 잡아당겨 '이랴' 이랴'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쟁기로 밭을 갈고 여자들은 부지런히 그 뒤를 따라갔다. 치마로 소쿠리를 감싸 안고 보리 씨앗을 뿌리면서 밭고랑을 따라가던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설이 지나면 바늘처럼 뾰족 뾰족 움을 틔운 싹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자라났다. 그때가 되면 어른 아이 모두 보리밟기에 나섰다. 나도 친구들과 신나게 보리를 밟으면서 어른들을 향해 물었다. 


  “왜 보리를 밟아요? 보리가 아프겠다."

  "보리는 잎이 세 장 정도 될 만큼 싹이 올라올 때부터 서너 번 밟아주어야 해. 그래야 땅이 단단해지고 뿌리가 튼튼히 자랄 수 있어."


어른들은 내게 상세히 얘기해주셨다.


예사롭게 들은 그때 그 말이 요즘 들어 생각난다. 이렇게 서툰 글을 한 줄씩 써 내려갈 때 특히 그렇다. 마치 땅이 단단해지길, 보리 뿌리가 튼튼히 자라길 바라던 보리밟기처럼 내 삶이 단단해지길 바라면서 글을 쓴다. 



표제 이미지: 픽사베이



글쓰는 할머니, 구하나

: 손자들을 키우러 상경했다 60에 여고 입학, 70에 국문과에 입학, 팔십대인 지금까지 팔팔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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