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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얌 Mar 04. 2022

잡초 같은 글

솎아내도 다시 피어나는 글 쓰기



아침 일찍 텃밭으로 간다. 파종기를 놓칠세라 일주일 전 열심히 뿌려둔 채소 씨앗들은 움을 틔우느라 한창이다. 도로의 매연과 소음에도 아랑곳없이 감자, 상추, 부추, 강낭콩들이 곰지락곰지락 갓난애 손바닥 같은 움을 틔웠다. 


좁쌀만 한 존재에서 큰 존재에 이르기까지 오늘따라 눈부시다. 계절 따라 인간의 오감을 깨우는 힘이 놀랍기만 하다. 새삼 나는 인간으로서 받기만 하고 그들에게 무엇을 베풀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밭고랑에 삐죽삐죽 난 잡초를 뽑는다. 이따금 따뜻한 실바람이 불어와 쉬고 있는 풀잎과 꽃들을 살갑게 쓰다듬는다. 이름 모를 꽃들이 많기도 하다. 하나하나 그들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이 절절히 마음에 와닿는다.




풀밭에 앉아서 잡초를 만져보다 문득 며칠 전 책장을 정리하다 우연히 펼쳐보았던 고전 수필 <역옹패설서>가 떠올랐다. 작가는 자기를 낮추어 재목감이 못되어 베어지는 해(害)를 면할 수 있었고, 오래 살아 즐겁다고 했다. 그래서 잡된 글쓰기나마 즐길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고도 했다.


감히, 잡초 같은 나의 글쓰기도 그와 같은 기쁨을 누리며 오래오래 이어졌으면 한다.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보냈던 어느 날 한 남자의 아내로, 세 아이들의 엄마로 살면서 내게 어울리는 이름을 불러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던 나는 잡초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이렇게 마음의 여백을 그려낼 수 있는 연필과 종이가 허락되는 순간이 새삼 귀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언덕을 오르다 잠시 나무 그늘에 앉았다. 사방이 푸름으로 가득한 산, 나무와 풀꽃이 바람을 기다리고 있다. 

바람이 불면 이것들도 나처럼 자신의 꿈과 소망을 더 크게 펼쳐보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런 화려함을 자연은 다양한 색으로 보여준다. 봄 초록의 활력, 푸른 여름의 시원함, 잘 익은 황갈색 가을의 풍성함, 그리고 색을 벗고 진정한 색을 입는 시간의 겨울. 한때 잡초를 가장 닮은 계절이 겨울이 아닐까 생각했다. 순환하는 시간들에서 유독 솎아버려도 좋을 것 같았기에. 


하지만 겨울이 있어서 봄꽃들이 강인하게 피어나듯 잡초같이 흔들리던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글을 쓰게 된 오늘이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느껴진다. 뽑고 또 뽑아도 자라나는 잡초처럼 생명력 질긴 글들을 쓰라고 잡초들은 내 발목을 간지럽힌다.


햇볕 따스한 흙을 비집고 나오는 잡초를 뽑는다. 내일이면 잡초가 하룻밤 사이에 다시 얼마나 자라날까? 

이런 호기심에 나는 내일도 일찍 텃밭으로 달려올 것이다. 잡초는 새롭게 돋아나 나를 반길 것이다. 




어릴 적 어머니와 남의 무논에 가서 풀을 뽑은 적이 있었다. 논에 엎드려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려가며, 키 큰 벼 아래 진흙을 두 손으로 파기도, 긁기도 하면서 잡초를 뽑았다. 도중에 거머리가 다리에 달라붙어서 무서움에 떨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그것들은 자신이 안전하게 숨을 집인 잡초들을 마구 뜯어낸데 대해 처절한 저항이었다. 그 잡초들은 말려서 다시 거름으로 사용되었고 겨울에는 소죽을 쑤는데 쓰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한 잡초도 그렇게 유익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잡초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아름답다. 세월 속에 나 역시 제대로 된 큰 집을 지을 재목감은 되지 못하고 잡초로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때 무논의 잡초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일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위안이 된다.


자세히 보니, 큰 나무 아래 무성한 잡초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잡초들의 품에 큰 나무가 안겨있다. 나무 한 그루를 키우고 보호하기 위해 이름 없는 잡초들이 자양분이 되어 준 것이다. 이 순간 텃밭의 잡초가 더욱 아름답게 여겨지는 진짜 이유이다. 나의 작지만 자랑하고 싶은 보람들이 바람에 하늘거리기 시작한다.


표제 이미지: 픽사베이, Konevi



글쓰는 할머니, 구하나

: 손자들을 키우러 상경했다 60에 여고 입학, 70에 국문과에 입학, 팔십대인 지금까지 팔팔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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